예전엔 이승환을 참 좋아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행복했고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가끔 이승환식 꺾기 창법이 노래방에서 나오는 건 그때의 그리움 때문이었다. 이승환의 모든 음반을 사 모았고 그가 피쳐링한 음반도 아는 즉시 사들이곤 했다. 그렇게 그의 음악을 들으며 10대를 보냈다. 흑백영화처럼 세상이 명징했던 고등학교 생활도 그와 함께 '천일‘을 보냈다.

 헌데 어느새 부터 그에 대한 애정이 사위어 갔다. 그의 노래를 듣고 오롯이 감상에 젖는 나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예전에 공부를 가르쳤던 아이는 이승환에겐 시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천일동안과 같은 명곡이 나오려면 채림과 헤어져야 한다며 남다른 사랑(?)을 과시했다. 헌데 그 아이의 바람(?)대로 그와 그녀가 헤어졌다. 과연 그 아이의 바람대로 명곡이 나올지 궁금했다. 헌데 이승환의 음악에선 오히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시시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는 그녀에게 띄우는 슬픈 연가(戀歌)처럼 들리지만 천일동안만큼 가슴을 울리지 못했다. 후에 나온 다른 곡들도 이승환식 웅장함과 상큼함은 있지만 예의 그 애절함은 덜 했다. 오히려 그는 제 근육을 키우며 옛 사랑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신의 동안(童顔)에 더 집착하는 듯하고 예전의 두서없음은 조금의 진중함으로 변해 어린왕자가 어른이 된 듯하다.

 그와 나이가 비슷한 이승철의 최근 활약과는 대조적이라 그 씁쓸함이 더해 갔다. 이승철은 이승환이 라이브의 황제로 막강한 팬덤 집단을 이끌고 있을 때, 조금 퇴물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예쁘장한 외모는 아저씨처럼 변하고 가끔 좋은 노래로 대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정도였다. 그랬었다. 헌데 그 비루함이 그의 현재를 낳았다. 요즘 그는 한국 가요계에 조용필 다음가는 보컬로 꼽히며 전성기 때 보다 더 깊은 아우라를 보여준다. 다사다난했던 그의 삶과 거칠었던 인생이 이승철이란 그릇을 더 웅숭깊게 해줬기 때문일 테다. 요즘 이승철의 노래를 들으면 절로 감탄을 하곤 한다. 그의 노래는 다른 사람이 불렀을 때 더욱 빛난다. 서인국이 ‘오직 너뿐인 나를’을 불렀을 때 ‘왜 이승철인가’를 알 수 있었다. 감정 이입과 호소력 하나는 정말 최고봉에 있는 듯하다.

 이에 반해 이승환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고 에둘러 가려고만 한다. 그러니 그의 음악은 ‘천일동안’을 넘지 못하고 ‘한사람을 위한 마음’의 그 따스함에서도 멀어져만 간다. 그는 점점 신승훈처럼 그냥 괜찮았던 가수로 머무는 듯하다. 그의 7집까지는 정말 괜찮았다. 하지만 8집과 9집은 다소 미진했다. 9집 이후로 그의 앨범을 사지 않는 이유다. 나는 이승환이 김춘수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원태연스럽길 바란다. 김춘수의 그 깊은 성찰의 언어보다 원태연처럼 통속적이지만 조금 기품있는 정도의 자태를 원한다. 이승환이 제 생채기를 다 드러내고 스스로를 버린다면 그의 또 다른 ‘천일동안’이 다시금 나타나지 않을까. 승환에 대한 나의 한결같지 못한 간절함을 타박하는 지인에게 스스로를 변명하다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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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의 탄생
배리 네일버프, 애비너시 딕시트 지음, 이건식 옮김, 김영세 감수 / 쌤앤파커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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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시나리오가 완벽히 맞아 들어가긴 어렵다.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변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내생 변수와 외생 변수가 있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내생 변수와 달리 외생 변수는 통제하기 힘들다. 노력에 의해 제어되는 게 아니라 외부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변수이기 때문이다. 결국 완벽한 전략이란 가장 유동적이고 성공 확률이 높은 전략이다. 백 프로는 없지만 백 프로에 가깝게 머리를 굴리고 벼린 전략이다. 무엇보다 내생 변수에 대한 통제는 기본이다. 그렇기에 전략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 최선은 있지만 절대적 전략이란 없다.

 이 책을 읽기 전 ‘삼국지와 게임이론’이란 책을 읽었다. 게임 이론으로 본 삼국지 이야기였는데 새로운 해석이 맘에 들었다. 제갈량의 공성지계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마의가 군권을 유지하기 위한 흑심이 작용했다는 거다. 즉 제갈량이란 맞수가 없다면 사마의는 군권을 놓치기 때문에 뛰어난 연기력으로 제갈량의 책략에 넘어간 척 했다는 거다. 물론 정사에는 이 사건이 허구라고 나온다. 허나 갖가지 상황을 게임이론이란 프레임으로 해석한 이 책은 꽤나 재밌었다.

 헌데 이 전략의 탄생이란 책은 위의 책과 다르다. 재미있긴 하나 어렵다. 수학이 많이 사용된다. 전개 방식은 ‘게임트리’를 통해 눈으로 설명 되고 균형전략 표로 숫자화 된다. 많은 사례가 다소 딱딱할 수 있는 내용에 윤기를 준다. 그렇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게임이론은 이전에 ‘수리 경제학’ 수업 때 배운 적이 있다. 2년 전 백경환 교수님께 배웠는데 이 책은 거의 학부 전공 심화 수준이다. 재정정책이란 수업에서 배운 호텔링 이론도 나오고 도시 경제학 수업에서 배운 시장과 시장 참가자의 유인을 그래프로 계산하는 방식도 사용된다. 그 때의 지근거림이 생각날 정도로 머리를 많이 쓰며 책을 읽어야 한다. 게임이론에서 가장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정도는 아주 우습다. 이 책에 나오는 갖가지 사례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의 기반 위에 상대도 매우 똑똑하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되고 해석된다. 다들 이렇게 까지 머리를 쓰며 살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기실 인간의 이성을 120프로 사용해야 성공에 가까워지는 현 사회의 팍팍함은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무엇보다 경제학이 가진 형이상학적 측면을 실용과 잘 맞추어 설명하였다. 이 책을 오롯이 이해한다면 웬만한 경제학 학사보다 더 뛰어나다고 보면 될 듯하다. 물론 게임이론에 관해서 만이다.

 앞서 어떤 분은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였으나 깔끔한 편집과 정갈한 문장은 그런 지적의 적절성을 의심케 했다. 전략의 탄생이란 제목도 어느 정도 ‘전쟁의 기술’이란 책의 아류라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 비틂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원제를 그대로 번역했다면 전략의 기술이 됐을 테다). 그렇기에 제목 또한 괜찮다고 본다.

 좋은 책이다. 다만 좀 어렵고 실생활에 적용하기엔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다. 이 책을 읽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챕터 하나씩 이삼일에 걸쳐 읽으면 좋을 듯하다. 어쩌면 경제학을 전공해서 더 오래 걸렸을지 모른다. 스스로의 불민함을 탓하며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 공을 너무 들였나 보다. 이런 책을 볼 때마다 경제학 전공이란 게 뿌듯하다. 배움의 기쁨을 느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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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생각을 정리하자는 차원에서였다. 글을 쓰다 보니 희원(希願)이 있었고 그와 연관된 책을 더 읽었다. 다소 스스로를 학대해가며, 또 일상을 침범해가며 책을 읽고 글을 토했다. 어느 책은 쉬이 읽히지 않아 페이지를 나누어 보고 어느 책은 쉬이 읽혀 나름 삽시간에 보았다. 헌데 이 지난한 여정이 벅차다. 하루에 대여섯 개의 서평을 올리는 이들을 따라 잡을 수 없기에 그렇다. 이 경주는 일주일 뒤에 막을 내린다. 알라딘 서평 대회 말이다.

 서평 대회에 올려 진 책들은 제한적이다. 이미 서평을 쓴 책도 많았고 외서나 어린이 용 책 또한 서평 대상이었기에 운신의 폭은 좁았다. 소설의 폭은 넓었지만 호불호에 의해 내팽겨진 작가들의 글이 섞여 있었고, 인문학은 생각을 곱씹으며 읽기를 강요하는 책이었다. 허나 이미 시작한 여정이었다. 이삼일에 한편 꼴로 책을 읽고 글을 쓰면 1등은 하지 못해도 수위에 들지 않을까 하는 구접스런 호승심이 글을 이어나가게 했다. 억지로라도 책을 붙들고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은 정리되고 문장은 경쾌해졌다. 서평 대회의 순기능(順機能)이었다. 흡족했다.

 그래서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바람이었다. 책을 읽고 글로 정돈될 때까지의 시간 덕에 서평에 오롯이 나를 밀어 넣기 힘들었다. 또 드러내고 젠체하기 위한 글이 아닌 스스로를 다독일 글을 쓰려다 보니 생각이 더께로 쌓여야 했다. 버거웠다. 이제 남은 일주일 동안 많아봤자 4권 정도의 책을 더 읽고 서평을 쓸 수 있을 듯하다. 잗다란 스터디와 과외 활동을 감안하면 좀 더 바지런을 떨어야 가능할 수치다. 무엇보다 알라딘에서 지정한 책 중 몇몇은 닿지 않은 곳에 있기에 손에 잡히는 대로 읽을 수밖에 없다. 또 이번 주 토욜엔 시험이 있으니 모레부턴 책을 좀 멀리해야 한다. 이래저래 이 대회의 위너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 많은 책을 읽고 또 흔적을 남기는 몇몇 이들은 뭐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그들의 서재를 기웃거리고픈 생각도 있었으나 부질없음을 깨닫고선 일상에 매진한다. 애초엔 10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게 목표였는데 여태껏 해 온 가여운 노력이 좀 더 스스로를 풀무질하라며 재촉한다. 갑자기 학교 앞 서점인 ‘풀무질’의 아저씨가 생각난다. 잠을 자야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헤아릴 수없는 고민 때문에 글을 쓴다. 글이 이지러진다.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 이런 상태에서 쓴 글은 다음 날 아침 꼭 후회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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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4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4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1-24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시는 글을 즐거이 읽고 있습니다.
이미 이만큼 읽고 정리해낸 것이 큰 성과지만, 또 수위에 올라 다른 책을 살 수 있는 적립금을 타내기를 바래봐요.
화요일 아직 이번주도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드니 우울..
주말바라기예요 전 ^^

바밤바 2009-11-24 08:58   좋아요 0 | URL
ㅎ 나도 조만간 주말바라기 될 듯~ 적립금 타면 책은 안사고 음반을 살 예정임~^^;;
좋은 일주일 되세요~ 제가 기도드릴께요~ 화이팅!!
 
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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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빨갱이가 안 됐냐?”

한 달 전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행동하는 좌파가 되겠다며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게 된 친구가 ‘빨갱이’라는 말을 한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중1 때 아리랑을 읽고 중2 때 태백산맥을 읽었다는 내 회고담 때문이었다. 이런 책을 어렸을 때 읽었다면 당연히 좌파가 되어야 하는 데 이데올로기가 분명치 않은 내 정체성에 친구가 의문을 표한 것이다. 나는 웃어 넘겼다. 스스로를 만족시킬 만큼 명쾌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였다.

이 두 편의 대하소설을 접하게 된 건 민족주의자였던 중학교 국어 선생님 덕이었다. 그분의 강직함과 올곧음은 표상으로 남았고 아직 아이였던 마음에 자그마한 불을 지폈다. 그 분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반드시 읽어야 할 세권의 책으로 ‘태백산맥’, ‘아리랑’, ‘동의보감’을 꼽았다. 동경하는 대상의 그림자라도 좇고 싶던 어린 마음은 이 세 부를 근 1년 만에 다 읽게 하였고 그 이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글짓기 대회 같은 데 나가면 심심찮게 상도 받아오곤 했다. 조정래 씨의 시대정신과 문장에 길들여진 탓이었다.

헌데 내 친구가 가치중립적으로 말한 빨갱이가 되긴 싫었다. 장정일 씨 소설에 나오는 ‘은’처럼 나는 힘을 추종했다. 강자가 휘두르는 권력이 뒷받침 되어야 내 주장은 온전한 모양새를 띈다고 여겼다. 중학생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남자들끼린 주먹 잘 쓰는 자가 권력을 가졌고 그런 권력은 부당한 일은 가능케 했다. 그런 부당함 앞에 말은 부질없었고 약자의 자기 위로에 불과했다. 후에 권력을 쥐는 자는 주먹에서 공부 잘하는 이로 넘어갔고 요즘 내 지인들 사이에선 출세가 그 바통을 이어 받고 있다. 이런 저런 혼란 속에 지금의 나는 시대가 강요하는 중도가 되어 김훈을 좋아라 하고 그 허무함을 긍정하려 한다. 허나 질풍노도의 시기에 내 1년을 앗아갔던 조정래 문학의 세례는 여전히 내 밑둥에 남았고 종종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 제 자신에게 솔직해지려는 좌편향과 조금 더 세속적인 이익을 찾으려는 우편향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충돌한다.

이 책은 과거 그의 문학에 빠져있었던 시간으로 잠시나마 나를 되돌려 놓았다. 한강이란 소설은 대학 2학년 때 완간되었기에 어느정도 머리가 굵어지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인지 그 울림은 두 편의 전작만 못했다. 무엇보다 아리랑과 태백산맥은 매우 힘겹게 읽었는데도 그 기억이 비교적 뚜렷한데 한강의 추억은 흐릿하다. 특히 이 자서전에서 한 여학생이 한 질문인 왜 전라도 사람을 ‘하와이’라고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나 또한 하지 못하겠다. 진정 궁금하니 혹 아시는 분은 댓글 달아주시길 바란다.

책은 문학에 대한 조정래의 정의와 그의 삶, 또 현실에 대한 갖가지 생각이 뭉쳐진 교향곡이다. 주제 선율은 민족주의와 글쓰기이고 2악장과 3악장에선 과거의 조정래를 대면하게 되어 주제 선율의 울림을 더 깊게 해준다. 허나 조정래 본인이 원하던 주제 선율은 시인 김초혜와의 사랑이었던 듯하다. 역사의 도저한 흐름 속에 그 애틋한 설렘은 피아노 선율이 되어 위 교향곡과 협주곡을 이룬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나 제 삶을 돌이켜 볼 때 언제나 등장하는 그녀의 존재는 이 책이 지닌 협주곡적 성격의 증명이다.

또한 이 책은 구술문학처럼 쉽게 읽힌다. 문답형으로 되어 있는 구성 때문인데 신문기사와 같은 딱딱한 종결형이 아닌 대화에서 드러나는 살가움이 문장을 맛깔나게 한다. 또한 좋은 답을 듣기 위해선 질문이 얼마나 좋아야 하는 지에 대한 가르침도 준다. 책을 이끌어 가는 형식인 질의응답에 중점을 둔다면 이 책은 이중주적 구성으로도 볼 수 있다. 다만 격이 낮은 질문에 까칠함으로 답하는 조정래의 일갈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이런 불협화음은 이중주란 정의와 사맛디 아니하게 한다.

책은 뒤로 갈수록 정치적 이야기가 많아지는 데 앞서의 문학과 삶에 대한 조명만큼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미 그의 문학으로 그런 이야기는 쉬이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이 형상화 되는 과정을 통해 독서의 추억을 오롯이 복기할 수 있던 앞 장의 뿌듯함이 사라져서 그럴 테다. 문학의 외피를 벗은 날것의 말은 다소 빈약해 보였다. 그는 천상 작가여야 한다.

한편 고등학생 한명이 아리랑과 같은 소설의 정사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단 질문을 한 부분이 있다. 나 또한 중학교 1학년 때 읽어서 그러한 부분이 나올 때마다 낯부끄러움과 심장의 빠른 고동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더랬다. 조정래 씨는 이에 대한 답변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데 다소 명쾌한 답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왜냐면 나또한 왜 이렇게 성애 묘사가 자세할까 하는 생각을 그 즈음에 했기 때문이다. 글들이 그려낸 머릿속 영상을 누군가 알아챌까 심히 부끄러워하며 책을 읽은 추억 또한 겹쳐졌다. 지금은 왜 그런지 이해가 가지만 질문을 했던 그 고등학생과 유년의 낯붉음을 잊지 못하는 과거의 나를 위해서 엄밀한 언어로 풀어줬으면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문을 꼽아 보자면

‘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는 부분이다. 최근 철학 책을 읽으며 부딪쳤던 그 무용함에 대한 고민이 조정래의 정의로 명쾌해졌다. 물론 그 명쾌함이 지극히 온당한 것은 아니나 나름 언어로 육화할 수 있기에 가슴에 닿았다. 문학이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는 정의는 조정래 문학관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말이다. 그의 글이 그래왔고 그의 삶이 그래왔으니 이러한 정의는 지당하고 또 지극히 설득력 있었다.

조정래 덕분에 나는 학창시절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세상을 겹눈으로 보려 노력했다. 덕분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으며 힘에 대한 맹목적 추구는 점점 사위어 갔다. 구월의 이틀마냥 당시 1년은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내 성긴 하루와 자늑자늑 이어지는 삶속에서 말을 이야기를 한다.

왜 내가 빨갱이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은 그 친구 외에도 ‘프레시안’ 기자로 일하는 친구와 진보신당 진성당원으로 열렬히 활동했던 절친한 형 또한 했던 질문이다. 답하자면 조정래의 글은 내 삶을 변화시켰지만 규정짓진 않았다. 그 울림이 작아서라기 보단 내 고민에 대한 해답으론 다소 야위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입으로만 좌파를 부르짖으며 미시파시즘을 행하는 사람이나 물질적 쾌락은 오롯이 누린 채 좌파를 부르짖는 ‘강남좌파’의 덜된 자기 객관화와 비겁함만은 갖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여전히 내 삶은 현실에 대한 던적스러움과 ‘권력에의 의지’의 길항작용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 충돌을 감내하지 못해 흐느적거리며 현실을 영위한다. 덕분에, 이 책은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그 때의 1년이 가슴에 여울지며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첨언하자면 시사인에서 나온 책이다. 조정래답고 온당 그리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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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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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배와 파스타를 먹고 학교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후배는 내 표현력이 좋다며 나를 추어올렸다. 최근 김훈 씨 소설을 많이 봐서 그럴 거라 답했다. 그 애는 남자들은 대부분 김훈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일반화를 내렸다. 나는 김훈의 글이 가진 허무성과 힘을 부정하지 않는 보수주의의 매력 덕이라 했다. 그 말은 즉각적으로 나왔지만 여태껏 여투어둔 생각의 결정이 언어화 된 것이었다. 그랬다. 내게 김훈은 과한 문장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시쁘게 여기지 않는 허무적 보수주의자였다.

 이 책은 이러한 정의와는 다소 빗겨있다. 아무래도 그가 기자시절 썼던 글모음이라서 그럴 테다. 서사라는 고갱이가 빠진 그의 글은 아무래도 공허하다. 레토릭은 강하고 말은 차고 또 넘친다. 사물의 외양을 오롯이 글로 나타내려는 닿지 않는 노력이 안타깝다. 외양에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언어의 성찬이 다소 가벼이 느껴지는 건 이러한 미욱한 노력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때의 김훈은 지금처럼 문장이 짧지 않고 생각이 날카롭게 벼려있지 않다. 두루뭉술한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과한 레토릭에 의존하는 나약함도 보인다.

 기실 그는 책의 뒤편에 이 글은 완성이 아니라 흔적이라고 했다. 이제 이런 문장을 쓰지 않으며 그는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을 추수하듯이 챙기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그 또한 15년 동안 제 스스로 갈무리한 문장과 적확한 언어들에 비해 비루하고 가난한 과거의 글이 마뜩찮았을 테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낸 건 자신의 과거를 오롯이 감싸 안으려는 예의 그 보수주의와 더불어 출판사의 판매 전략이 작용한 탓일 테다.

 다만 글에 관한 그의 자잘하고 너른 생각들은 유심히 읽어볼 만하다. 미당의 글에 대한 예찬과 천상병에 대한 야릇한 그리움, 또 신경숙의 말을 파헤치고 쪼개려는 그 말들은 청신하다. 헌데 고종석의 글과 비교하면 김훈의 문학에 대한 평은 덜 아름답다. 고종석은 ‘모국어의 속살’이란 책을 통해(한국일보에 연재한 칼럼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에 버금가는 언어들로 찬란히 풀어냈다. 과거의 글과 현재의 글 사이에서 주례사 비평이 아닌 앙칼진 비평도 쏟아내고 제 스스로의 욕심도 드러내는 솔직한 글쓰기는 책 속 시만큼 아름다웠다. 헌데 김훈은 꾸준히 말로 시인을 드높이고 글로 시를 감싸려하니 핍진한 언어가 더욱 빈약해 보인다. 물론 두 글의 시차를 감안해야겠지만 고종석의 문장을 더 높이 쳐줄 수밖에 없는 명징한 차이가 있다.

 기자라는 직함에 갇혀 문학성을 억누르던 김훈의 짓누름이 최근의 다작이란 드러냄으로 나타난다면 이 책은 그 시발점이다. 그는 이 산문을 통해 자신을 가두고 있던 기자의 틀을 벗어 던지고 제 말을 마음껏 휘두른다. 바르고 정확한 말만 구사해야 하는 기자란 직업 속에 벼리고 쟁여둔 말이 거침없이 쏟아지다 보니 독자에 대한 배려는 부족했던 듯하다. 그 화려한 풍경이 상처로 남은 이유다.

 여전히 나는 김훈의 글을 부지불식간에 따라하고 또 그의 생각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김훈이 비교적 젊은 시절에 남긴 이 글은 그 또한 많은 시간을 들여 제 글을 살찌웠단 걸 알게 해준다. 문학을 꿈꾸는 이에겐 이 책이 조바심을 다소 눅여줄 듯하다. 그도 시간의 세례를 받아 자신을 완성했음을 이 책은 오롯이 증명한다. ‘던적스럽다’나 ‘비루하다’란 말이 잘 어울리는 요즘 세상에 김훈의 글은 더 빛이 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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