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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넌 왜 빨갱이가 안 됐냐?”
한 달 전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행동하는 좌파가 되겠다며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게 된 친구가 ‘빨갱이’라는 말을 한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중1 때 아리랑을 읽고 중2 때 태백산맥을 읽었다는 내 회고담 때문이었다. 이런 책을 어렸을 때 읽었다면 당연히 좌파가 되어야 하는 데 이데올로기가 분명치 않은 내 정체성에 친구가 의문을 표한 것이다. 나는 웃어 넘겼다. 스스로를 만족시킬 만큼 명쾌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였다.
이 두 편의 대하소설을 접하게 된 건 민족주의자였던 중학교 국어 선생님 덕이었다. 그분의 강직함과 올곧음은 표상으로 남았고 아직 아이였던 마음에 자그마한 불을 지폈다. 그 분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반드시 읽어야 할 세권의 책으로 ‘태백산맥’, ‘아리랑’, ‘동의보감’을 꼽았다. 동경하는 대상의 그림자라도 좇고 싶던 어린 마음은 이 세 부를 근 1년 만에 다 읽게 하였고 그 이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글짓기 대회 같은 데 나가면 심심찮게 상도 받아오곤 했다. 조정래 씨의 시대정신과 문장에 길들여진 탓이었다.
헌데 내 친구가 가치중립적으로 말한 빨갱이가 되긴 싫었다. 장정일 씨 소설에 나오는 ‘은’처럼 나는 힘을 추종했다. 강자가 휘두르는 권력이 뒷받침 되어야 내 주장은 온전한 모양새를 띈다고 여겼다. 중학생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남자들끼린 주먹 잘 쓰는 자가 권력을 가졌고 그런 권력은 부당한 일은 가능케 했다. 그런 부당함 앞에 말은 부질없었고 약자의 자기 위로에 불과했다. 후에 권력을 쥐는 자는 주먹에서 공부 잘하는 이로 넘어갔고 요즘 내 지인들 사이에선 출세가 그 바통을 이어 받고 있다. 이런 저런 혼란 속에 지금의 나는 시대가 강요하는 중도가 되어 김훈을 좋아라 하고 그 허무함을 긍정하려 한다. 허나 질풍노도의 시기에 내 1년을 앗아갔던 조정래 문학의 세례는 여전히 내 밑둥에 남았고 종종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 제 자신에게 솔직해지려는 좌편향과 조금 더 세속적인 이익을 찾으려는 우편향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충돌한다.
이 책은 과거 그의 문학에 빠져있었던 시간으로 잠시나마 나를 되돌려 놓았다. 한강이란 소설은 대학 2학년 때 완간되었기에 어느정도 머리가 굵어지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인지 그 울림은 두 편의 전작만 못했다. 무엇보다 아리랑과 태백산맥은 매우 힘겹게 읽었는데도 그 기억이 비교적 뚜렷한데 한강의 추억은 흐릿하다. 특히 이 자서전에서 한 여학생이 한 질문인 왜 전라도 사람을 ‘하와이’라고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나 또한 하지 못하겠다. 진정 궁금하니 혹 아시는 분은 댓글 달아주시길 바란다.
책은 문학에 대한 조정래의 정의와 그의 삶, 또 현실에 대한 갖가지 생각이 뭉쳐진 교향곡이다. 주제 선율은 민족주의와 글쓰기이고 2악장과 3악장에선 과거의 조정래를 대면하게 되어 주제 선율의 울림을 더 깊게 해준다. 허나 조정래 본인이 원하던 주제 선율은 시인 김초혜와의 사랑이었던 듯하다. 역사의 도저한 흐름 속에 그 애틋한 설렘은 피아노 선율이 되어 위 교향곡과 협주곡을 이룬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나 제 삶을 돌이켜 볼 때 언제나 등장하는 그녀의 존재는 이 책이 지닌 협주곡적 성격의 증명이다.
또한 이 책은 구술문학처럼 쉽게 읽힌다. 문답형으로 되어 있는 구성 때문인데 신문기사와 같은 딱딱한 종결형이 아닌 대화에서 드러나는 살가움이 문장을 맛깔나게 한다. 또한 좋은 답을 듣기 위해선 질문이 얼마나 좋아야 하는 지에 대한 가르침도 준다. 책을 이끌어 가는 형식인 질의응답에 중점을 둔다면 이 책은 이중주적 구성으로도 볼 수 있다. 다만 격이 낮은 질문에 까칠함으로 답하는 조정래의 일갈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이런 불협화음은 이중주란 정의와 사맛디 아니하게 한다.
책은 뒤로 갈수록 정치적 이야기가 많아지는 데 앞서의 문학과 삶에 대한 조명만큼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미 그의 문학으로 그런 이야기는 쉬이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이 형상화 되는 과정을 통해 독서의 추억을 오롯이 복기할 수 있던 앞 장의 뿌듯함이 사라져서 그럴 테다. 문학의 외피를 벗은 날것의 말은 다소 빈약해 보였다. 그는 천상 작가여야 한다.
한편 고등학생 한명이 아리랑과 같은 소설의 정사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단 질문을 한 부분이 있다. 나 또한 중학교 1학년 때 읽어서 그러한 부분이 나올 때마다 낯부끄러움과 심장의 빠른 고동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더랬다. 조정래 씨는 이에 대한 답변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데 다소 명쾌한 답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왜냐면 나또한 왜 이렇게 성애 묘사가 자세할까 하는 생각을 그 즈음에 했기 때문이다. 글들이 그려낸 머릿속 영상을 누군가 알아챌까 심히 부끄러워하며 책을 읽은 추억 또한 겹쳐졌다. 지금은 왜 그런지 이해가 가지만 질문을 했던 그 고등학생과 유년의 낯붉음을 잊지 못하는 과거의 나를 위해서 엄밀한 언어로 풀어줬으면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문을 꼽아 보자면
‘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는 부분이다. 최근 철학 책을 읽으며 부딪쳤던 그 무용함에 대한 고민이 조정래의 정의로 명쾌해졌다. 물론 그 명쾌함이 지극히 온당한 것은 아니나 나름 언어로 육화할 수 있기에 가슴에 닿았다. 문학이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는 정의는 조정래 문학관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말이다. 그의 글이 그래왔고 그의 삶이 그래왔으니 이러한 정의는 지당하고 또 지극히 설득력 있었다.
조정래 덕분에 나는 학창시절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세상을 겹눈으로 보려 노력했다. 덕분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으며 힘에 대한 맹목적 추구는 점점 사위어 갔다. 구월의 이틀마냥 당시 1년은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내 성긴 하루와 자늑자늑 이어지는 삶속에서 말을 이야기를 한다.
왜 내가 빨갱이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은 그 친구 외에도 ‘프레시안’ 기자로 일하는 친구와 진보신당 진성당원으로 열렬히 활동했던 절친한 형 또한 했던 질문이다. 답하자면 조정래의 글은 내 삶을 변화시켰지만 규정짓진 않았다. 그 울림이 작아서라기 보단 내 고민에 대한 해답으론 다소 야위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입으로만 좌파를 부르짖으며 미시파시즘을 행하는 사람이나 물질적 쾌락은 오롯이 누린 채 좌파를 부르짖는 ‘강남좌파’의 덜된 자기 객관화와 비겁함만은 갖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여전히 내 삶은 현실에 대한 던적스러움과 ‘권력에의 의지’의 길항작용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 충돌을 감내하지 못해 흐느적거리며 현실을 영위한다. 덕분에, 이 책은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그 때의 1년이 가슴에 여울지며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첨언하자면 시사인에서 나온 책이다. 조정래답고 온당 그리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