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이승환을 참 좋아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행복했고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가끔 이승환식 꺾기 창법이 노래방에서 나오는 건 그때의 그리움 때문이었다. 이승환의 모든 음반을 사 모았고 그가 피쳐링한 음반도 아는 즉시 사들이곤 했다. 그렇게 그의 음악을 들으며 10대를 보냈다. 흑백영화처럼 세상이 명징했던 고등학교 생활도 그와 함께 '천일‘을 보냈다.
헌데 어느새 부터 그에 대한 애정이 사위어 갔다. 그의 노래를 듣고 오롯이 감상에 젖는 나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예전에 공부를 가르쳤던 아이는 이승환에겐 시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천일동안과 같은 명곡이 나오려면 채림과 헤어져야 한다며 남다른 사랑(?)을 과시했다. 헌데 그 아이의 바람(?)대로 그와 그녀가 헤어졌다. 과연 그 아이의 바람대로 명곡이 나올지 궁금했다. 헌데 이승환의 음악에선 오히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시시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는 그녀에게 띄우는 슬픈 연가(戀歌)처럼 들리지만 천일동안만큼 가슴을 울리지 못했다. 후에 나온 다른 곡들도 이승환식 웅장함과 상큼함은 있지만 예의 그 애절함은 덜 했다. 오히려 그는 제 근육을 키우며 옛 사랑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신의 동안(童顔)에 더 집착하는 듯하고 예전의 두서없음은 조금의 진중함으로 변해 어린왕자가 어른이 된 듯하다.
그와 나이가 비슷한 이승철의 최근 활약과는 대조적이라 그 씁쓸함이 더해 갔다. 이승철은 이승환이 라이브의 황제로 막강한 팬덤 집단을 이끌고 있을 때, 조금 퇴물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예쁘장한 외모는 아저씨처럼 변하고 가끔 좋은 노래로 대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정도였다. 그랬었다. 헌데 그 비루함이 그의 현재를 낳았다. 요즘 그는 한국 가요계에 조용필 다음가는 보컬로 꼽히며 전성기 때 보다 더 깊은 아우라를 보여준다. 다사다난했던 그의 삶과 거칠었던 인생이 이승철이란 그릇을 더 웅숭깊게 해줬기 때문일 테다. 요즘 이승철의 노래를 들으면 절로 감탄을 하곤 한다. 그의 노래는 다른 사람이 불렀을 때 더욱 빛난다. 서인국이 ‘오직 너뿐인 나를’을 불렀을 때 ‘왜 이승철인가’를 알 수 있었다. 감정 이입과 호소력 하나는 정말 최고봉에 있는 듯하다.
이에 반해 이승환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고 에둘러 가려고만 한다. 그러니 그의 음악은 ‘천일동안’을 넘지 못하고 ‘한사람을 위한 마음’의 그 따스함에서도 멀어져만 간다. 그는 점점 신승훈처럼 그냥 괜찮았던 가수로 머무는 듯하다. 그의 7집까지는 정말 괜찮았다. 하지만 8집과 9집은 다소 미진했다. 9집 이후로 그의 앨범을 사지 않는 이유다. 나는 이승환이 김춘수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원태연스럽길 바란다. 김춘수의 그 깊은 성찰의 언어보다 원태연처럼 통속적이지만 조금 기품있는 정도의 자태를 원한다. 이승환이 제 생채기를 다 드러내고 스스로를 버린다면 그의 또 다른 ‘천일동안’이 다시금 나타나지 않을까. 승환에 대한 나의 한결같지 못한 간절함을 타박하는 지인에게 스스로를 변명하다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