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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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배와 파스타를 먹고 학교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후배는 내 표현력이 좋다며 나를 추어올렸다. 최근 김훈 씨 소설을 많이 봐서 그럴 거라 답했다. 그 애는 남자들은 대부분 김훈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일반화를 내렸다. 나는 김훈의 글이 가진 허무성과 힘을 부정하지 않는 보수주의의 매력 덕이라 했다. 그 말은 즉각적으로 나왔지만 여태껏 여투어둔 생각의 결정이 언어화 된 것이었다. 그랬다. 내게 김훈은 과한 문장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시쁘게 여기지 않는 허무적 보수주의자였다.

 이 책은 이러한 정의와는 다소 빗겨있다. 아무래도 그가 기자시절 썼던 글모음이라서 그럴 테다. 서사라는 고갱이가 빠진 그의 글은 아무래도 공허하다. 레토릭은 강하고 말은 차고 또 넘친다. 사물의 외양을 오롯이 글로 나타내려는 닿지 않는 노력이 안타깝다. 외양에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언어의 성찬이 다소 가벼이 느껴지는 건 이러한 미욱한 노력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때의 김훈은 지금처럼 문장이 짧지 않고 생각이 날카롭게 벼려있지 않다. 두루뭉술한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과한 레토릭에 의존하는 나약함도 보인다.

 기실 그는 책의 뒤편에 이 글은 완성이 아니라 흔적이라고 했다. 이제 이런 문장을 쓰지 않으며 그는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을 추수하듯이 챙기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그 또한 15년 동안 제 스스로 갈무리한 문장과 적확한 언어들에 비해 비루하고 가난한 과거의 글이 마뜩찮았을 테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낸 건 자신의 과거를 오롯이 감싸 안으려는 예의 그 보수주의와 더불어 출판사의 판매 전략이 작용한 탓일 테다.

 다만 글에 관한 그의 자잘하고 너른 생각들은 유심히 읽어볼 만하다. 미당의 글에 대한 예찬과 천상병에 대한 야릇한 그리움, 또 신경숙의 말을 파헤치고 쪼개려는 그 말들은 청신하다. 헌데 고종석의 글과 비교하면 김훈의 문학에 대한 평은 덜 아름답다. 고종석은 ‘모국어의 속살’이란 책을 통해(한국일보에 연재한 칼럼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에 버금가는 언어들로 찬란히 풀어냈다. 과거의 글과 현재의 글 사이에서 주례사 비평이 아닌 앙칼진 비평도 쏟아내고 제 스스로의 욕심도 드러내는 솔직한 글쓰기는 책 속 시만큼 아름다웠다. 헌데 김훈은 꾸준히 말로 시인을 드높이고 글로 시를 감싸려하니 핍진한 언어가 더욱 빈약해 보인다. 물론 두 글의 시차를 감안해야겠지만 고종석의 문장을 더 높이 쳐줄 수밖에 없는 명징한 차이가 있다.

 기자라는 직함에 갇혀 문학성을 억누르던 김훈의 짓누름이 최근의 다작이란 드러냄으로 나타난다면 이 책은 그 시발점이다. 그는 이 산문을 통해 자신을 가두고 있던 기자의 틀을 벗어 던지고 제 말을 마음껏 휘두른다. 바르고 정확한 말만 구사해야 하는 기자란 직업 속에 벼리고 쟁여둔 말이 거침없이 쏟아지다 보니 독자에 대한 배려는 부족했던 듯하다. 그 화려한 풍경이 상처로 남은 이유다.

 여전히 나는 김훈의 글을 부지불식간에 따라하고 또 그의 생각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김훈이 비교적 젊은 시절에 남긴 이 글은 그 또한 많은 시간을 들여 제 글을 살찌웠단 걸 알게 해준다. 문학을 꿈꾸는 이에겐 이 책이 조바심을 다소 눅여줄 듯하다. 그도 시간의 세례를 받아 자신을 완성했음을 이 책은 오롯이 증명한다. ‘던적스럽다’나 ‘비루하다’란 말이 잘 어울리는 요즘 세상에 김훈의 글은 더 빛이 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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