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지형의 70%가 산지일 정도로 울퉁불퉁하다. 이곳에서 밥 빌어먹기 가장 쉬운 방법은 논농사나 밭농사를 통한 곡류 섭취다. 프랑스나 미국과 같은 서구인들은 평원이 많아 방목을 통해 많은 가축을 기를 수 있었다. 한반도인 보다 육류 섭취가 용이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제한된 가축을 이용하여 효율적인 단백질 섭취를 할 수밖에 없었다. 농가에 자주 보이는 개를 잡아먹거나 사육이 용이한 돼지를 키우는 것은 육류 섭취를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였다. 소는 다른 가축과 달리 농사를 짓는데도 쓰였기에 쉬이 잡아먹지 않았다. 마을 잔치나 집단으로 제사를 지낼 때에나 민중들은 쇠고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소고기는 워낙 귀하기에 살코기뿐 아니라 내장과 뼈까지도 먹거리로 이용되었다. 소의 뼈는 고와서 곰국을 만들고 내장은 곱창이나 내장탕을 만들어 먹었다.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특히 소는 조상들에게 버릴 것 하나 없는 동물이였다.

  지금, 대한민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광우병 문제로 시끄럽다. 미국인들이 먹는 쇠고기와 국내에 수입된 쇠고기가 같다는 정부의 말은 국민들 귀에 신통치 않다. 광우병 유발 물질이 많이 포함돼 있다는 척수나 내장 부위의 수입 또한 문제이다. 미국인과는 다른 식습관과 유전자 때문에 한국인이 광우병에 취약하다는 주장이 대중 사이에 설득력을 얻는다. 미국인들과 달리 한국인들은 내장과 척수 부위를 조리해서 먹기 때문이다. 30개월 이상 된 쇠고기 수입 허용과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오역 문제 또한 정부 불신을 심화 시킨다. 먹거리 문제이기에 국민은 날이 서 있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광우병이 발생할 확률이 낮다며 ‘광우병 괴담’을 진정 시키기 바쁘다. 심지어 정부의 어느 관리는 국민의 잘못된 식습관을 준엄히 꾸짖으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정당화 하려고 한다. 내장과 척수를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은 현재 소득 수준에 비춰볼 때 잘못된 습관이라며.

  단백질 섭취가 힘들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소를 이용했던 조상들은, 이제 후세의 어느 관리에게 계도 대상이다. 곱창을 좋아하는 서민들도 잘못된 식습관을 가진 부적절한 국민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때문에 조상의 알뜰함과 개인의 취향까지 비판하는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국민을 섬긴다는 정부가 오히려 국민을 훈시하는 모습은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게 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먹고 사는 문제는 그들이 쓰는 어휘를 보더라도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식구(食 口)라는 한자말에 밥이라는 뜻이 있고, 가장을 뜻하는 영어 표현은 ‘빵을 구해 오는 자(bread winner)' 이다. 이렇게 보면 먹거리인 쇠고기 수입 문제 때문에 촛불 시위를 하는 시민들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촛불 시위대에게 정치적 행위를 중단하라하는 정부의 외침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국민의 자발적 행위를 오독하는 정치적 해석이다. 국가의 수장이라는 대통령 또한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 시키는데 일조한다.  ’미국산 쇠고기, 먹기 싫으면 안먹으면 된다‘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된다‘라 했던 마리 앙뜨와네뜨의 일화 마냥 국민들에게 허탈감을 준다. 사실 문제를 떠나서 잘못한 일은 사과하고 불평등한 협상은 다시 하는 것이 정부의 도리이다. 이명박 대통령 탄핵 서명 인원이 100만 명을 넘어 섰다는 것은 정부를 향한 국민의 꾸짖음이라는 사실을 정부 관계자는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렵다. 쉽게 쓰여진 글이 많지만 알아듣기 어려운 글이 태반이다. 쉬운 글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바를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의 소재와 여기저기 흩어 놓은 잡스러운 문장이 혼재되면 글 쓴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다이달로스의 미궁이 완성된다. 어떤 사람이 이 미궁에 발을 디뎠다고 하자. 미궁에 갇힌 사람들이 테세우스가 아니듯 아르아드네가 놓고 간 실타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신화에서와 같은 친절한 인도자는 없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과 문장 해석력만이 출구로 이끌어 줄 실타래다. 길을 몰라 먹먹해져가는 가슴이 출구는 커녕 본인만의 새로운 미로를 만들어 오갈데 없이 자책만 계속 할 때는 어찌할까? 그럴때는 미로를 설계한 필자를 탓하고 자신을 되돌아 보면 미궁의 탈출구가 보인다.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하늘로 솟아 올라 제 갈길을 가는 것이 가장 명쾌한 탈출구이다. 시덥지 않은 미궁에서 허우적 될 바에는 미궁이란 없는 존재인냥 무던히 지나가는 것이 미궁을 설계한 글쟁이들에게 가장 근사한 복수가 된다. 소통이 아닌 자기만족으로 글을 쓴 사람들 마음 한구석에는 '내마음 아실이'를 욕망하는 이중성이 있다. 좀 더 쉽고 정갈하게 이야기 한다면야 당신 글의 행간을 읽을 '그대 마음 아실이'는 넘실되듯 많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바가 나와 같이 살면서 나는 좀 변했다. 스토아 학파(stoic)적 자세로 자취방에서의 삶을 영위 해 왔는데 이 쾌락주의자인 조바는 나의 경건한 생활에 육식과 유흥을 심어 준다. 그가 전해주는 육식이라는게 고작해야 치킨 몇조각과 조금 더 고급스런 상차림이 놓여진 식당에서의 식사이지만 은근히 절제를 모토로 살고 있던 자취방에 평지풍파를 가하고 있다. 밤에 자잘한 세속의 소리에 귀를 막고자 클래식 음반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그는 나에게 린치를 가할거 같은 눈빛으로 준엄하게 정지 버튼을 누르라고 한다. 혹시 정 그렇게 음악이 듣고프다면 이어폰을 끼고 들으라는 그의 강권은 사소한 자유마저 억압하는 빅브라더와 같은 독재의 전형이다. 덕분에 잔뜩 날카로워진 신경과 무던하게 살이 올라버린 몸과 수십번의 조임질이 가해져야 할 것 같은 생활의 나태함이 나를 점점 대중과 괴리 시킨다. 자아가 제대로 옹립하지 않은 마음에 타인과 뛰놀고픈 욕망은 사치라 여기고 오로지 스스로를 위한 노동에 매진하고자 할적에도 조바는 다시금 준엄한 짓누름을 가한다. 자기가 가지고 온 밥상이라며 홀로 공간을 차지하여 자기계발에 힘쓰며 나의 공간은 공공재를 바라보는 상인의 탐심이라도 작용한듯 선점한뒤 버티고 나가지 않는다. 햇살 가득한 방으로 이동하기 위한 열망으로 새로이 이사한 방안에 반지하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검은 대형(big brother)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그가 심어주는 유흥이란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다. 스타를 좋아하긴 하나 가끔씩 생활의 반주로 섞어 들곤 하던 것을 그는 일상이라는 들판에 심어 버렸다. 몇번이나 싫다고 하지만 나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아는, 마치 파놉티콘의 간수마냥 나의 치부까지 아는 그의 퀴클롭스와 같은 눈은 결국 나의 욕망을 건드려 그의 뜨거운 욕망과 합치시켜버린다. 그 욕망의 활주로를 나오고 나면 나의 불평은 지난하게 이어지지만 마이동풍이란 고사성어만이 말이 이어지지 않는 공간을 밀도있게 채운다.

 별칭이 조바(jorba)니까 그 희랍인인지 그리스인인지 하는 조르바처럼 좀 자유롭고 대인배처럼 살았으면 좋겠지만 조바는 스스로를 소인배라 칭하여 본인의 옹졸함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옹졸함에 떳떳한 것이 대인배라 여기는 그의 괴상한 배짱은 어떠한 수사학이나 논리학 또는 경제학적 사고방식이 침투하지 못할 그만의 철옹성의 토대를 제공한다. 그러고선 본인의 공부가 급하면 그는 나의 나태함을 질책을 가하며 스스로를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리고선 승리의 쾌감을 느낀다. 물론 그가 공부하러 나갈때 주로 내가 하는 행동은 잠이다. 잠만큼 사람을 달콤하게 매혹하면서 많은 영감의 사료가 되고 벌판이 되고 광장이 되는 공간이 없기에 나는 잠을 예찬하지만, 시대를 거슬러 사는 자에겐 그만큼 사회적 제재가 가해지기 마련이다. 보통 이러한 사회적 제재는 거시적인 국가 권력의 내팽기침이나 또래 집단으로 부터의 소외라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어느순간부터 조바가 사회적 제재 그 자체가 되었다. 나의 미시적 삶까지 조여오는 국가 권력의 앞재이마냥, 조바는 나의 행동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어디 아랫것들이나 한다는 쌈박질에서 유래한 암바를 가한다. 그는 아나키스트에겐 내셜널리스트일 것이고 파시스트에겐 자유주의자일 것이며 자유주의자에겐 국가주의자일 것이다. 그의 손은 모차르트나 슈베르트가 그렇게 두려워 하던 죽음과 닮았을 수도 있지만 딱히 무슨 영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음.. 조바는 무섭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울 2008-04-15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조르바님이 궁금해요. 정말요. ㅎㅎ

바밤바 2008-04-15 20:07   좋아요 0 | URL
제가 쓴 글을 다시 보니까 완젼 악당같이 묘사해놓았네요.
사실은 좋은 사람이에요. 명륜동에 오시면 실체 확인이 가능합니다 ㅎ
 

 지금 나는 참 고민이 많을 시기이다. 내 또래들은 이번 설날에 세뱃돈을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하였고 어떤 아해들은 자기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성찰적 고민을 하였다. 또 어떤 친구는 사회에서 좀 더 높은 값으로

팔려 나가기 위한 담금질을 위해 휴학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고 또 어떤 친구는

자기가 계속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길을 찾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잡다한 고민에서 해결된 이들도 있다. 초딩때 젤 친했던 나의 친구는 전공 공부에

대한 회의를 거듭하다 수능을 다시 보기로 한 후 고등학교 때 이후로 가장 편안한 경지에 이르렀다.

고시를 보네 좀 있다 컴터 관련 직종으로 옮길거네 하던 경찰대 나온 내 고딩 때 짝궁은 이제

달려가는 시간의 속도와 보조를 맞추기에도 버거운지 스스로의 위치에 자족하기로 한다고 그런다.

솔직히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야 수많은 고민과 끝간데 없는 헤아림과 무량대수와 같이

느껴지는 경우의 수를 살피느라 심신이 다 피곤에 절어 있지만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고 나면야

오히려 모든 행동들은 명쾌해 지고 정신은 오롯이 자기가 가야할 길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나도 지금 잡다한 고민에 빠져있다. 강박증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잡생각들을 생각지 않으려는

고민과 언제 다시 상경하느냐에 대한 여러가지 변수들에 대한 헤아림이 만든 고민이 있다.

불과 몇달 전에 결정한 언론사 쪽의 길이 나에게 맞는가에 대한 고민과 아버지가 부재한 이후로

맘이 조금은 여려지신 엄마에 대한 고민과 지금 사놓은 이 수많은 클래식 음반들을 언제

다 집중해서 듣느냐에 대한 고민이 있다. 나보다 어리거나 혹은 그 또래의 사람이 깊은 학식이나

뛰어난 통찰력을 보였을 때 잠시나마 그이를 질투하는 이 소인배적 마음을 어떻게 누그리냐는

고민이 있고 몇몇 사람들과의 만남에 특별히 가중치를 두지 않고 어떻게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까 하는 박애 정신과 같은 좀 같잖은 고민도 있다. 피동피동 살이 오르는 얼굴과 어느새부턴가

또래들보다 나이를 먹어 보인다는 지인들의 말에 반응한 외양에 대한 고민도 있고 하루하루가

알차게 여물어 지지 않는 것에 대한 존재 성찰론적 고민도 있다. 

이러한 고민들도 과연 루비콘 강을 건널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불현듯 술라 펠릭스에 관한

시오노 나나미의 말이 떠오른다. 술라는 좋은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항상 명쾌했기 때문에

인간적 매력이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따른다는 식의 말.. 

잡다한 고민은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결정을 명쾌하지 못하게 하기에 사람을 우유부단

하게 하고 광장 공포증이 있는 사람마냥 밀실에서 모든 걸 해결하게끔 만든다. 물론 이러한

점이 나의 매력이 될 수 있지만 이제 이것의 유통기한은 조금 지난 것 같다. 유통기한이 지난걸

계속해서 먹으면 처음에야 그 익숙한 맛 덕분에 버리지 않길 잘했단 생각이 들지도 모르나

시일이 조금씩 흐르면 몸에 탈이 생기고 다른 음식조차 입에 담기 힘들어 진다. 이러한 고민의

끝은 아마도 늙은 노새와 작별을 구하고 새롭고 힘센 당나귀 등에 올라타는 일일 것이다.

인생이 종마 경주라면 아마도 지금이 타이어를 갈 때가 아닐까 한다.

----- 결론이 이상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희끗희끗 보이던 시간도 날짜도 없던 밤에

누구도 모를 분칠을 당신 앞에 해두고

옆집의 바둑이도 조금은 잠잠할 적에

반짓고리 옥가락지 쳐다보며 잠시 시름에 잠깁니다.

 

왜그런지 몰라 미운 그대가 달빛처럼 좁은 방 가득 채울적에

지그시 깨문 입술 사이로 파르르 눈물이 흐릅니다.

 

겉저고리 사이에 드러난 가슴팍에 서린 온기가

어쩌면 임의 손길이 달빛을 빌어

내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진 것을 아닐지 하는 망녕된 생각에

홀로 얼굴 붉어지고 가슴이 널뛰듯 하지만 

임을 원망함에

다시금 나를 질책하고 당신을 미워합니다.

 

기나긴 상념을 닭 우는 소리가 깨돋울 때에야

지난한 하룻밤이 햇님에게 자리를 내줄 때가 됐음을 압니다.

 

비단을 팔러 온 상인의 늙은 노새만이 이 시름을 아는지

저벅저벅 걸음으로 햇님 깔리는 땅바닥을

되새김질 하는냥 못내 못살게 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