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골의 꿈 - 전2권 세트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장르 문학으로서의 미스터리 소설은 '시리즈'라는 형식을 적극적으로 채용한다. 최초의 미스터리 소설로 일컬어지는 <모르그 가의 살인>에 등장하는 최초의 명탐정인 오귀스트 뒤팽도 시리즈 캐릭터였으니, 어쩌면 '시리즈'는 미스터리 장르의 태생적 필수 요소가 아니었을까하는 과격한 상상도 해본다.
그리고 '시리즈'라는 그 특징이야 말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다. 셜록 홈즈, 에르큘 포와로, 엘러리 퀸 같은 불멸의 탐정들은 특정 작품에 구애 받지 않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고 있는 그 자체로서의 '브랜드'다.
이에 반해 최근 애호가들사이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은 상대적으로 시리즈 캐릭터가 많지 않다. 가장 활발하게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작가들인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 기리노 나츠오 등은 시리즈 캐릭터가 거의 전무한 작가들이다. 이 작가들이 그만큼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 거리들을 다루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뛰어난 작품을 읽고 난 후 여운을 느끼면서 '아, 이 주인공들이 또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면 좋을텐데..' 라는 상상을 하는 것은 독자의 본능이 아니겠는가.
이런 본능적인 아쉬움 속에 역시 "미스터리는 시리즈가 제맛"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독자들을 기쁘게 하는 시리즈가 바로 이 '교고쿠도 시리즈'다. (책이 나오는 간격이 좀 길다는 단점이 있다..)
장르 소설로서, 미스터리 소설로서 시리즈물은 여러가지 유리한 점들을 갖는다. 독자는 익숙함과 친근한 마음을 품고 소설을 접하기 마련이고 캐릭터의 개성은 작품수가 늘어갈 수록 안정되고 강화된다. 이쯤 되면 작가는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 아닌가? (창작하는 작가의 고충을 모르는 일개 독자의 섣부른 상상이지만)
<광골의 꿈>은 교고쿠도 시리즈의 제 3작이다. 시리즈 1작 <우부메의 여름>이 각 고정 등장인물들에 대한 소개와 향 후 시리즈를 끌고 갈 의지를 담은 파일럿 프로그램이고, <망량의 상자>는 이 시리즈 물에서 작가가 보여줄 작품의 패러다임을 마음껏 펼친 '괴작'이라면 <광골의 꿈>은 '브랜드로서의 완벽한 런칭'의 몫을 해 내고 있는 안정적인 작품인것 같다.
한 챕터만 읽어봐도 느낄 수 있는 교고쿠도 시리즈의 특징인 음울하고 축축하고 스산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패전 후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은 195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인 배경도 이런 분위기를 강화시키는데 일조한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주인공이라 하기엔 점점 그 역할이 미미해 지긴 하지만) 세키구치 선생의 우유부단하고 우울한 성격도 이러한 분위기를 일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양념이다.
세편째를 더하고 나니 이제 작품의 얼개가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후반부의 충격은 아무래도 전작에 미치지 못한다. 워낙에 산만하게 여러가지 사건들을 늘어놓고 있어서 다소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다. 소설 전반에 걸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교고쿠도의 '제령'이 다소 느닷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저런 아쉬운 모습들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는 이 시리즈에 중독돼 있는 상태. 익숙해진 인물들의 등장과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이제는 새로운 재미로 다가온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도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교고쿠도의 옛 친구이자 낚시터 주인인 이사마는 특유의 어눌함과 길지 않은 대사로 배꼽을 빼놓게 만들며(앞으로도 그가 계속 활약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만담의 황제 에노키즈는 아예 탐정에서 만담가로 전업을 한 듯 시종일관 '화려한 활약'을 보여준다. 항상 에노키즈와 기바, 교고쿠도에게 구박만 받는 세키구치의 피학적 성격, 온몸을 검은 색으로 휘감고 '제령'에 나서는 교고쿠도의 박력, 그리고 뿌리 깊은 원념에서 발단이 된 비극적 사건, 수수께끼 같았던 각각의 이야기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하나씩 진실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의 논리적 쾌감. 역시 나는 교고쿠도 시리즈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