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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데온과 방화마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4
J.J.매릭 지음, 박명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2월
평점 :
일전에 내가 쓴 다른 소설의 리뷰에서도 말한 적이 있듯이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경감 소설"(내가 맘대로 붙인 명칭이다.)과 "경찰 소설". 메그레 경감이 등장하는 시므농의 소설들은 경감 소설에 더 무게를 둘 순 있겠지만 이 두가지 경향을 두루 갖추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J.J. 메릭의 장편 <기데온과 방화마>는 전형적인 경찰 소설이면서도 내가 여태 읽어왔던 경찰 소설들인 87분서 시리즈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메그레 경감 시리즈와 유사한 면도 있는듯 하다. 무게 중심이 경찰 소설에 더 가 있긴 하지만) 스코틀랜드 야드의 범죄 수사 부장(상당한 고위직이다.)인 기데온은 일선에서 뛰어다니는 형사는 아니다. 그는 상관의 입장에서 런던 경시청의 모든 범죄 사건들을 관할하며, 수사를 지휘한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방화사건 이외에 서너가지 사건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다루어 지고 있다.
도서 추리 소설이라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사건의 범인들은 사전에 모두 밝혀지며, 각 사건들은 별다른 트릭이나 추리력을 필요로 하는 범죄가 아니다. 그리고 소설은 갖가지 사건들을 담당 수사관들과 상의하고 방침을 지시하는 기데온 부장의 일과를 추적한다. 이 소설의 놀라운점은 정신없이 진행되는 수많은 사건들과 수사과정 뿐 아니라 기데온의 개인적인 가족 문제, 범인들의 심리와 행동, 피해자의 가족이 겪는 슬픔과 부상당하거나 순직하는 경찰들의 애환까지 대단히 많은 이야기들을 조화롭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스터리 소설 속에서 살인이나 죽음은 워낙 흔하게 등장하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그 자체가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지 않는다. 주변인들은 주위의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거나 크게 동요치 않는다(김전일을 보라!).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화재현장에서 순직한 경관의 아내와 딸의 대화, 성폭행 당하고 살해된 소녀의 부모가 겪는 아픔과 고통에 대한 묘사는 죽음이 사실은 그 당사자들과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아픔인지에 대해 새삼 돌이키게 만든다. 이것은 자칫 살인이나 범죄의 피해자들을 사물화 하고 비인간화 하기 쉬운 미스터리 소설이 좀처럼 갖지 못하는 미덕이다. 엑스트라로 등장해 순직하는 경관이나, 이유도 없이 방화의 희생자가 되는 사람들까지도 캐릭터의 생명력을 부여받고 있다.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변변한 대사 한마디 없는 인물들의 죽음에도 안타까워 해야 했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일선 경찰들의 삶을 보여주는 르포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만큼 이 작품은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과 생동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다큐멘터리적 소설이 주기 쉬운 지루함을 해소시키는 역할이 주어진 주인공 기데온은 아주 현실성 있으면서도 다정다감한 캐릭터다. 혹시 잔혹한 범죄자에 의해 부하 직원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형사의 아내에게 남편의 부상 소식을 미안해 하면서 직접 알리기도 하며, 가족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 곤란해 하고 노심 초사하기도 한다. 행여나 아내가 자신의 행동으로 마음 상하지 않을까 신경쓰고, 자신이 지나치게 담당 수사관의 업무에 간섭하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한다.
인자한 아버지이자 현명한 가장, 그리고 유능하면서도 자애로운 상관으로써의 기데온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훈훈한 경찰 미담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도주에 성공하는 범인, 결국 범죄의 희생양이 되고 마는 사람들, 그리고 필연적으로 예방 보다는 해결에 주력할 수 밖에 없는 경찰의 숙명 등을 통해 자칫 놓치기 쉬운 진지한 리얼리즘의 끈을 굳게 붙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