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나라다."
교육을 통해서나 언론을 통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주입된 단서에 따른다면 이 명제는 당연히 참이다.
물론 미국은 철저한 삼권분립, 개인주의, 자유와 평등, 독립선언문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기본권 등이 잘 실천되고 있는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 보다 우리 국민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아마도 정치권의 부정부패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보다 덜 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건국 이래 수많은 정치권의 부정부패에 지긋지긋해 하는 우리 나라 국민들에게 "청렴한 정치가와 정치세력"은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한 원형으로 보일 만 하다.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그동안 너무 과대평가해 온것이 아닐까? 같은 대통령제라는 이유로 우리의 민주 발전의 모델이 지나치게 미국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나 반성할 필요가 있는것 같다.
미국은 개방적인 나라로 비쳐지지만 사실 그들의 정치 논리는 지극히 보수적이다. 문제점이 숱하게 드러난 대통령 선출 방식을 고치지 않는 그들의 수정헌법 고수주의만 보아도 그들의 보수성을 알 수 있다. 양당제로 굳어진 정치 지형도 결코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이 존재 하지 않는 나라, 중도와 보수만 있을 뿐 진보 정치 세력이 전무한 나라가 미국이다. 하물며 우리 나라도 진보 정당이 의회에 진출하였고 대통령 선거에서 의미있는 득표율을 올리지 않는가. 미국의 패권주의적 성향의 강화는 이러한 진보정치 세력의 미약함과도 관련이 있다.
대통령은 오로지 앵글로 색슨 계열의 백인 남성들이 도맡아 한다.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 계층이라고 통칭되는 그들은 미국의 정치권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물론 카톨릭 계열의 대통령 케네디도 있었고, 케리도 카톨릭 신자였지만 그 물이 그 물 아닌가?) 행정부 고위직이나 주지사들 중에는 소수 민족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출마설이 오락가락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대통령 자리에 한해서는 백인 남성의 기득권이 당분간 유지 될거라고 예상한다. 단지 그들이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미국의 민주주의의 약점 또 한가지는 이번 선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듯, 일반 국민들의 정치 의식이 너무 낮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미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과 미국의 패권주의적 속성을 알지 못하는 듯 하다. 그들은 대부분 단지 자신의 집안이 오랜동안 공화당 지지였는지, 민주당 지지였는지에 따라 투표한다. 대통령 후보가 누구이든 지지율의 큰 차이가 없고, 부동층도 적다. 두 정당간의 차별성이 크지 않은 탓도 있지만, 미국의 초강대국적 입지를 생각한다면, 미국인들이 보다 전 지구적인 정황을 염두에 두고, 미국의 대외정책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염두에 두고 투표를 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미국인들의 정치의식은 낮은 투표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36년만의 최고 투표율이 기껏해야 60%라니..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미국이 투표율이 낮다는 근거로 선진국들의 투표율 운운해가며 우리 나라의 투표율을 낮추려는 음험한 시도가 큰 문제이다.
실제로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 언론들은 지난 총선에서 공공연히 투표율을 낮추려는 시도를 했다. (조선일보는 목요일이 투표일이니 금요일날 휴가를 내고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을 무비판적으로 취재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기권할 수 있는 권리도 권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낮은 투표율로 이익을 얻는 정치 집단이 어디인가를 안다면 이는 지극히 편파적이고 음험한 정치 개입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정권은 민주주의의 꽃이자 피맺힌 결실이다. 구미에서도 여성의 투표권이 일반화된것이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무렵이다. 우리 나라는 평등 보통선거에 무임 승차했을지라도 참정권을 얻기 위한 선배 민주주의 국가들의 지난한 과정을 생각한다면 그리 쉽게 선거에 기권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우리 나라보다도 훨씬 투표율이 높으며, 심지어는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벌금을 물리는 나라도 있다. 유럽의 그러한 나라들은 선진국이 아닌것인지 보수 언론에서는 별로 이러한 사실을 다루지 않는다. (기권 벌금제를 도입하자고 하면 헌법 소원한다고 난리를 치는 언론과 무리들은 있을 것이다)
이번 대선을 지켜보면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 어느정도 깨지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영향을 받아 도입된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미국이 우리의 절대적인 모델은 될 수 없다. (유신처럼 얼토당토하지 않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하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배워야 한다면, 극우부터 극좌까지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국민들의 정치 참여 의식도 높은 유럽의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이야 말로 충분히 우리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례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