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의 섬 사계절 1318 문고 28
한창훈 지음 / 사계절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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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삶에, 서이의 그 바이올린 아줌마같은 이가 한 번 들어왔으면, 하는 꿈, 이미 지난 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순진한 책에 조금 머뭇거리며 별을 더 주고 싶어진다. 바닷가에 살아본 사람만 쓸 수 있는 소설을 한창훈이 썼음은 분명하다. 열여섯 소녀의 마음과, 온 세상을 유랑하고 돌아온 '악사' 여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자들의 그 미묘한 울림과 공감을 가슴만 따뜻한 남자들은 잘 알기 어려울 것이다.  

딸애 책상에 놓고 나왔지만 재미없다고 외면당했었다. 나는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다. 음악적 공감대를 표현한 부분은 좋았다. 피아노에 젖어들곤 하는 딸은, 그리고 한 때 자발적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던 열네 살 딸은 아줌마가 등장하기 시작한 중후반기부터 공감하며 읽지 않을까. 앞부분만 읽고 덮어버린 녀석에게 다시,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어쩌면 사막의 허무를 아이도 느끼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아직은 못 버리겠다. 바다에서 몰려오는 안개를, 바다 근처 삶의 추억을 갖고 있는 엄마만큼 실감은 못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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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시공아트 12
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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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만 보았을 때, 뭉크처럼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라면 고흐처럼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불행한 자였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왜곡해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모든 예측은 책을 읽으면서 다 어긋났다. 실레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몇몇 유명한 그림보다도 더 좋은 그림을 그리는, 훌륭한 화가였고, 생각보다 행복했고 생각보다 평범한 자였다. 그의 독특한 자의식을 놓고 평범했다고?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른다. 실레는 드높은 자아와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영혼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의식은 높았을지 몰라도 영적으로 미숙했던 사람이고 자기 재능을 감당하기에는 세속적 욕망이 거셌던 범인이었다.  

이 책은 정말 빨리 읽힌다. 번역이 잘 된 게 분명하다. 글씨가 빼곡한 데도 금방 몰입이 되고 술술 읽힌다. 그렇다고 흥미 위주의 글도 아니다.  도판이 충분하진 않지만 흔히 알려진 그림보다 더 많은 그림에서 오히려 그의 생과 자의식보다 깊은 그림들을 보았다. 미술공부하는 아들 녀석이 그림에 감탄한다. 선은 자유로우나 구도는 탄탄하다. 불안정하나 안정된 구도와 색감이 묘한 매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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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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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야학에서 강학을 1년 했다. 검정고시 야학이었지만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엄격하게 그게 금지되어 있었던 까닭은 그 야학이 구청인지 동사무소에서 지원금을 받고 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주, 교무실 앞에 갱지 시험지에 색연필로 정희성이나 양성우 정호승 등의 시를 써서 붙였다. 대학생이면서도 보수적이었던 어떤 강학들은 뭐라고 하고 눈치를 주기도 했다. 위험한 시를 학생들에게 읽히지 말라면서.. 돌아보니 그 시들이 초등학교밖에 안 나와 졸린 눈을 비비며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1년을 그렇게 버텼다. 

 세계의 끝.. 에 등장하는 '함시사'가 20여 년 전의 추억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소설의 주제를 떠나서 시에 담아내는 떠난 이들에 대한 정서가 공감이 된다. 할 말은 너무 많으나 적확한 표현은 이 세상에 없고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을 때, 그 때 시들은 얼마나 위안이 되던가, 또한 같은 시를 다 달리 해석할 수 있음은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다가 비슷한 공감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의 그 묘한 행복감은 또 어떠한가. 사랑하는 이가 멀리 가버린 후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가 여자친구이든 사랑한 제자이든 영적인 반려자이든 다 다르면서 또한 같지 않은가 

다른 작품은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김연수를 좋아하지만, 나는 김연수의 장편이 더 좋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같은 캠퍼스에서 공부했을 후배인 그가 허명이 아닌 진가를 인정받는 유명 소설가로 성장하고 있는 게 기뻐서 가능하면 그의 작품들을 다 읽어보려 노력한다. 다만 단편은, 여운은 많이 남지만 이야기를 지나치게 함축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의 단편은 가끔 시나 잠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사실 소설로서는 그리 친절한 편은 아니란 생각이다. 그의 소설은 요즘것들처럼 경망하지 않아서 좋은데 그런 묵직함을 담아내기에 단편은 너무 가벼운 그릇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김연수의 장편들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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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안도 다다오 지음, 이규원 옮김, 김광현 감수 / 안그라픽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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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에세이를 좋아하는 내가 대형서점 입구 가판에 깔리다시피 한 이 책을 사지 않은 이유는 샘플북을 빼곤 비닐로 꽁꽁 동여놓았더란 거, 그리고 표지의 안도 표정이 너무 음습해서였다. 사실은 보고 싶기도 했지만 너무 단순하고 무식하고 감정적인 이유로 선택되지 않았던 이 책이 도서관에서 발견되었기에 얼른 집어들어 왔다. 앞의 몇십 페이지만 읽고도 나는 빅토르 하라와 더불어 사지 않은 걸 후회한 책 목록에 이 책 이름을 넣어야 했다. 

문장은 간결하고 잘 읽힌다.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부분조차 있다. 이것은 문장력의 문제라기보다 진짜 자기 것을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라고 본다. 유려한 문장보다도 진정성이 사람의 가슴을 적시는 것, 그래서 나나 많은 사람들은 에세이나 수기를 읽는지도 모른다. 잘 나가는 한 건축가의 회고담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초기에 대학교육조차 못 받고 스스로 헤쳐나왔던 건축의 세계는 단순한 자기자랑이 아니다. 건축을 독학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몸이 먼저 이 직업에 뛰어들고,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공부를 혼자 원서를 사서 채워가는 모습은 단순한 천재와는 다른 어떤 인생 접근법을 보여준다. 이론으로 공부하고는,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에 돈도 별로 없는데 세계를 돌아다니며 건축물들을 섭렵한다. 진정한 독학이다. 그러나 그 독학이 어설펐다면 아마 그의 개인적 호기심을 채우는 정도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사람이 천재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천재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보통 천재들과 다른 각고의 노력들이 더 크게 다가와서 그런 것 같다. 내 아들은 지금 고3이다. 가끔 책을 읽다가 강렬하게 우리집 아이들, 학교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은 것들이 발견되는데 이 책은 아들에게 정말 필요한 책이다. 지금도 가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녀석의 이부자리에 살짝 놓고 오곤 하는데 이 책은,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드넓은 벌판 앞에서 살짝 어지럼증을 느낄 때 읽으면 딱 좋을 것 같다. 그때는 이 책을 사서 줄 것이고 밑줄을 치며, 도판을 모사하며 열심히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아들은 디자인 공부를 하려 한다.) 

안도의 매력은 발상의 신선함과 대범함이다. 커다란 건축물의 공간 구획을 마치 케이크를 칼로 자르듯 시원시원하게 한다. 어번 에그를 보면서 실제로 시공할 때의 어려움을 뛰어넘는 미학적 대범함을 보았고 빛의 교회나 물의 교회에서도 감성의 바닥을 읽을 줄 하는 미적 감수성에 소름이 돋았다. 옥상이나 벽, 문이나 창을 활용하는 방식은 대범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건축이 전부 내 감성에 맞는 것은 아니다. 나는 미술관 같은 데서 흔히 보던 노출 콘크리트 건축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머, 이게 나름 멋질 수도 있네, 그 이상을 못 느낀다. 따뜻한 재료는 아님에 틀림없다. 오히려 안도가 나무나 벽돌로 자기 발상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었을 것만 같다.  

어쨌든, 그의 큼직한 발상은 참으로 부러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스케일 큰 건축가들이 정치나 돈에 흔들리지 않는 미학적 줏대와 문화사적 고집을 가지고 이 도시를 이 나라를 새롭게 변화시킨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 그런 이들이 있음에도 내 눈에 안 보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좁은 지식에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건축들은 다른 것들과의 조화나 도시 전체 마을 전체의 발전적 미학과는 동떨어져서 혼자만 튀는 것들이 많다. 대놓고 말해서, 얼마나 많은 안도의 짝퉁들이 압구정동에 헤이리에 안국동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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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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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유전자'를 읽다가 집어던진 적이 있었다(소심하게 이불 위에다 ^^;) 번역이 너무 엉망인 데 화가 났고, 그런 책이 청소년 권장 소설인 게 화가 났고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어서 화가 났었다. 결국 절반 읽고 말았다. 원서를 사 읽을까 하다가 원작에도 뭔가 문제가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이 두꺼운 책에 나오는 전문적인 용어들(중고등 학교 수준의 단어도 버거운데..)을 일일이 찾아가면 읽을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그러다가 학교 도서관에 '만들어진 신'이 들어왔길래 얼른 빌렸다. 일단 번역자를 확인하고.. 물론 다른 사람이다. 이기적인 유전자는 아마 같은 계통의 학자인가 했던 것 같다. 만약 이 책이 괜찮다면 이기적인 유전자도 달리 읽어볼 요량이었고 마침 그 때 나는 예수전, 최후의 유혹, 예수 하버드에 가다 등 관련 서적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입맛 당기는 책이었다. 

번역은 괜찮다. 흐름도 나쁘지 않다. 나는 무신론자까지는 아니지만 강요된 신앙심에 대해 몹시 회의적인 사람이었으므로 도킨스의 사고는 나와 맞서지도 않았다. 그렇게 200쪽 넘게 읽으면서 나는 좀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도킨스답게 그가 '과학적으로' 신이 없음을 입증하고 인간들이 사회심리학적으로 신이란 존재를 조작해낸 것이라는 결론을 유출하기를 바랐다. 끝까지 가면 그랬으려나.. 전부 합쳐 절반 좀 안 되게 내가 읽은 부분에서 그런 내용은 없다. 그는 강력한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뿐 신이 왜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지를 말하지는 않았다. 이건 내가 원하는 책이 아니다. 

나는 한때 신앙심을 가졌었으나(아주 어렸을 때) 현재 거의 무신론자에 가까운 범신론자이다. 초자연적인 그 무엇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도킨스는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결국 당신은 유신론자이기 때문에 은연중에 나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거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분명 객관적인 자세로 책을 읽을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음을, 그리고 도킨스에 대한 어떤 편견도(번역에 대해서는 좀 있었지만) 없었음을 미리 밝힌다. 오히려 호감을 갖고 출발했다. 기대마저 있었다. 예수 하버드에 가다를 참 재미나게 읽었지만 거기에서 성서의 비과학성을 언급만 했지 조목조목 밝혀내지는 않았으므로(기본적으로 그 저자는 기독교인이었으니까) 그런 궁금증도 해소해줄 줄 알았다.  

혹시 뒤에 가서 그랬으려나? 그러나 200쪽 넘게 도킨스는 기독교인들을 비웃느라 바쁘다. 나는 이런 비웃는 글투가 싫다.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은 더 무섭지만 싫어할 수 없는데 그래, 너네가 얼마나 황당한 줄 아나? 하! 지난 번 그 날개 돋친 듯 팔린 기독교 책 나한테 택배로 부쳐주대? 그런다고 내 생각이 달라질 줄 알아? 뭐 이런 말투다. 싸움의 전략일까? 난 내키지 않는다. 어느 편이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논리를 지닌 쪽이라도 이런 방식으로 싸우면 마음이 싸~ 해진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과학적으로 신이 없을 것만 같은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족, 논리적으로 도킨스는 그다지 성공한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책을 반납해 버렸다.  

나는 책을 한 번 시작하면 무익하든 무미하든 끝을 보는 성격이다. 그런데 도킨스의 두 권은 나의독서력에 오점을 남겼다. 삼세판인데 눈 먼 시계 수리공.. 이란 책을 마지막으로 도전해 볼까. 그래도 영 아니면 내 인생에서 도킨스는 영 아닌 거다. 지구 한 모퉁이의 일개 독자의 '영 아닌' 평가가 뭐 그리 중요하겠나만, 내가 읽은 도킨스는 내 것이니까 나는 도도하게 점수 팍 깎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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