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시학 동문선 문예신서 183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동문선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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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나온 이 책의 역자는 오역을 경계하며 번역에 매진했노라 고백하는 후기를 책 뒤에 실었다. 그 진중함에 웃음이 나왔던 것은, 내가 책을 읽는 내내 이 아름다운 책의 절반을 이해하지 못하고 날려버리는 것을 번역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래, 언어의 차이,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하자. 유난히도 프랑스 저서는 이해가 어려웠던 경험들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하자. 물론, 곽광수 교수의 글 자체가 본문의 문투와 많이 다르지 않을 걸 보면 그분만의 독특한 언어 세계가 있고, 그것이 번역에 그대로 반영된 것도 있을 것 같다. 가령, ‘새롭히다와 같은, 우리 말에 없는 표현 같은 것, ‘살다라고 쓰고 꼭 () 안에 體驗이라고 쓰는 것, ... 역자는 프랑스어와 한국말 사이의 간극을 메울 표현을 찾으려 고심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먹히고 어떤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냥... 시를 읽는다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시는 원래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아름답기만 해도 되는 것이 시라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를 시집이라 부르겠다. 다락방, 지하실, 조개껍질 안, 좁고 넓은 공간, 상상의 공간, 현실의 공간, 우주의 공간, 그리고 원, 심지어 차원을 넘어서는 변증법적 공간까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상념과 감각과 상상, 그리고 몽상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학문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라 시집을 읽듯이 만나야 한다. 이 책은 곧 절판에 이를 것이고, 더 이상 아무도 읽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시는 세월이 가도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데, 그렇다면 이 책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데, ‘난해하다는 혐의로 사라져 버릴까봐, 너무나 아깝다. 바슐라르의 표현에 무릎을 치며 잠 이루기 전까지 이 책을 읽은 날이 많고 많지만 특히 공기에 속하는 것과 대지에 속하는 것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그 탁월함에 잠을 깼다. 이미 많은 이들이 땅과 하늘, 현실과 몽상, 몸과 영혼의 세계를 고찰했겠지만 하필이면 그것을 공기와 대지에 비유하다니. 체 게바라의 꿈과 리얼리스트를 만났을 때처럼 그 시적이고도 적확한 표현에 놀란다. 시인들은 몸의 뿌리를 대지에 내리고도 공기의 삶을 사는 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직 현실만을 살며 몽상의 세계, 시의 아름다움, 또 다른 차원의 정신세계를 갖지 못한 이들을 일컬어 2층밖에 없는 인간이라 표현한다. 지하실이나 지붕 밑, 다락과 같은 공간의 몽상적 의미, 심연, 심리학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심연과 그림자, 자기만의 꿈과 몽상을 지니지 않은 이의 영혼은 얼마나 핍진할까.

 

이 책과 거의 동시에 강맑실의 <막내의 뜰>를 읽고 그 직후 공선옥의 <춥고 더운 우리집>을 읽었다. 두 작가들의 깊은 상념처럼 나 역시 집 꿈을 자주 꾸고 결코 삶에서 연관성이 있을 리 없는 건축 관련 책들을 뒤진다. 사람들은 왜 '집'에 집착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삶의 기반이라서 그러하다는 현실적 이유 말고, 집은 몸 다음으로 영혼을 담는 그릇인 것이다. 그것을 바슐라르는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 하나의 우주라고 표현했다. 이 책 속의 우리들 각자에게는 꿈의 집이, 사실의 과거 너머로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추억 꿈의 집이 하나씩 있다라는 표현을 혹시 강맑실이나 공선옥도 읽은 건 아닐까. 좋은 추억만은 아니더라도 과거의, 특히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는 일은 묘하게 참된 자신을 만나는 것과 닿아 있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 대한 사유가 표현되는 것이 바로 시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시학(詩學)’이 붙은 것이다. ‘시는 그 위대한 기능으로 우리들에게 꿈의 상황을 되돌려 준다.’ 그리고 시는 존재 차원의 거소. 존재의 집인 것이다.

 

융은 집의 공포를 지붕 밑 곳간과 지하로 나눠서 설명한다. ‘집주인(의식)이 지붕 밑 곳간에 들어가면 생쥐와 쥐들의 소란이 조용해진다. 이곳에서는 낮의 경험이 밤의 공포를 지워 버릴 수 있지만 지하실의 어둠은 밤낮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문명은 더 이상 촛대를 들고 지하실에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무의식은 개화되지 않는 법. 무의식은 여전히 지하실에 내려가기 위해 촛대를 든다. 지하실의 벽은 땅속에 묻힌 벽, 이쪽 벽면밖에 없는 벽. 땅 속에 묻힌 광기, 벽 안에 갇힌 드라마....’라고 바슐라르는 융의 심리학에 기대 몽상의 의식 세계를 집에 비유해 분석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장 라로슈의 아름다운 시들을 인용한다.

 

내 마음에 세워진 집

내 침묵의 성당

매일 아침 꿈속에서 되찾았다가

매일 저녁 버리네

새벽으로 덮여 있는 집

내 젊은 시절의 바람()이 열려 있는 집 장 라로슈

    

이 작약은 어렴풋한 집

거기서 누구나 밤을 되찾네

...

모든 꽃받침은 집이다 장 라로슈

 

바슐라르는 아름다운 말에는 아름다운 사물이 대응되는 법이다라고 말한다. 윤동주가 바슐라르를 읽었을 리 없지만 그 역시 <별 헤는 밤>에서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라고 썼다. 말은 때로 허위로 사람을 현혹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세상을 예술로 채워주는 존재이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어머니는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의 시인 정재학은 나의 직장 동료이다. 그의 시 세계가 오묘하고 뛰어날 뿐 아니라, 현실의 건실하고 다정하고 신사다운 그의 모습과 시속의 세계가 너무 달라 농담 삼아 융 심리학의 관점에서 정 시인의 시 세계를 분석해 보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콤플렉스와 그림자, 무의식과 심연의 세계가 따로 있겠으나 어떤 이는 평생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을 자양분 삼아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바슐라르의 다음 구절은 정재학 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시란 언제나 꿈을 몽상으로 만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시적 몽상이란 기본적인 이야기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콤플렉스의 응어리 위에서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은 깨어 있는 몽상을 사는 것이며 특히 그의 몽상은 세계 속에서 세계의 대상들 앞에서 머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 주위에, 하나의 대상 속에 우주를 모은다.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많은 작가와 시인을 만나고 그들의 글과 시를 떠올리다니. 그리고 그가 이끄는 미지의 세계를 몽상할 수 있다니. 이 책을 아껴 읽은 시간은 고작 몇 달이지만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깊은 꿈의 아홉 단계를 넘나들다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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