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기행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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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우습긴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교육 모토는 '전인교육'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그때는 '그게 가능하기는 하냐?' 이런 마음으로 그것을 대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유능한 인재 육성'의 그럴 듯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 이전 시대의 '지덕체를 겸비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고 어찌 생각하면 자기들처럼 육체 강건한(군사적 무력까지도 겸비한) 그런 인간이 되라는, 학원에 대한 일갈로도 읽히긴 한다. 어쨌든 아무 의도 없이 나온 구호는 아니었겠지만 나도 이미 세뇌가 된 건지, 가끔 그 단어가 생각난다. 지덕체 겸비하고 외모도 출중하고 인격까지 훌륭하며 문화예술적 소앙도 뛰어난 완벽에 가까운 인간들도 가끔 있긴 한 것 같다. 그들의 존재는 천연의 혜택인지 교육의 결과물인지 가정과 사회의 합동 예술품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교육으로 그게 가능하다면 교육자로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은 과제이긴 하다.

 

괴테를 읽으면서 많은 찬사를 들었지만 (정작 문학작품은 대개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서 그게 뛰어난 줄 모르고 읽었다. 두 번째 읽은 파우스트에서야 비로소 대작의 소름을 느꼈지 고등학교 때 읽은 젊은 베르테르... 등에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비로소 작품을 만든 작가가 아니라 인간 괴테를 만났다. 여행기는 뭐 그렇다. 소소한 일지들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이 현대의 이탈리아도 아닌 19세기이다 보니 실감을 갖고 그걸 누릴 수는 없다.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즐거움은 있지만. 그런 읽기의 즐거움보다 괴테라는 사람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는 정말로 탐구형 인간이었다. 명성과 부를 지닌 사람으로서 당시로서는 드문 여행을 했을 터이니 이미 특권 속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가 권위 속에서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명성을 탐식했다면 그는 당시에만 풍미하고 말았을 알량한 문화권력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위대한 것은 끊임없이 배우려 들고 새로운 것을 알려 들고 배움의 한 길에 학생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던지려 들었다는 것이다. 그림을 배우고 미술에 눈떠 가는 과정의 기쁨은 순수하다. 내가 이미 이토록 유명한 사람이거늘, 하는 오만이 없다. 맑은 영혼에서 예술이 나온다는 명제는 100% 참은 아니지만  괴테는 그것을 100% 당위로써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래, 원래 예술이란 그렇다며, 라고 새삼 자각하게 해준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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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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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참 안 읽는 편인 건지, 편식을 하는 건지 몰라도 우리 독서모임에서 천명관을 읽자고 누가 추천했을 때 그가 누구지? 싶었다. 두 권의 두께까지는 소설이니까 그렇고,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의 속도감 때문에 그 두께의 부담도 금세 사라졌다. 앞 부분을 읽을 때에는 '키치'스러움을 느꼈다.  아하, 90년대에 유행하던(는?) 가벼운 말투 속에, 엽기적이고 기이한 사건 속에,  환상 속에, 비현실 속에 페이소스를 담는, 뭐 그런 소설인가 보다. 그래서 심지어는 군에서 휴가나온 아들에게 나중에 부대로 부칠테니 읽어봐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낄낄대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발견했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1권 뒤쪽으로 가면서 박정희를 언급할 뿐 아니라 삼청교육대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소름 돋는다. 잘은 몰라도 이렇게까지 자세히 그것을 언급한 소설이나 작품이 있을까 싶다. 함부로 언급하기 미안하고 부끄럽고 무서운 근대사 속의 사건이 한둘 아니지만, 광주는 몸서리를 치고 나서 그 비극이 숭고로 전환될 수 있기에 '입 밖으로 꺼내 말하는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삼청교육대는 그저 우리의 '치부'일 뿐이다. (요즘 인터넷 댓글 중 차라리 그때처럼 삼청교육대를 부활하여 범죄를 소탕해야 한다는 식으로 어버이연합스러운 주장을 하는 사람도 없진 않지만  누가 뭐래도 삼청교육대는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부끄러운 인권 사각지대의 역사일 뿐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안타깝지만 아직까지 그것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마무리도 없고 시도도 없다는 게 더 문제다.)

 

이 소설에는 해학과 비장이 묘하게 섞여 있지만 (해학은 달관과 체념을, 비장은 초밀도 '레알'리즘을 통해 나타내는데 그것은 등짝을 마주 대고 있어 더 기묘하다. 남사당패가 공연할 때 쓰던 여러 얼굴의 꼭두와 같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소설이란 게 우리 삶을 집약해서 보여주며 대리만족이든 카타르시스든 느끼게 해주는 임무가 있으니 그런 면에서 보면 '좋은 소설'일 것이 틀림없다. 우스꽝스런 말투와 그 안에 담긴 심각한 사건들 사이의 괴리는 일종의 장치이자 기법일 것이다. 우리 삶은 기실 미친듯이 심각하다가, 지나가고 나면 뭐 별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를 것들로 가득차 있거나 그 반대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삼촌에게 부르스 리는 회망의 상징이다.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쯤 있을 수 있다. 아니, 그런 거 없이 그저 생명의 도리를 다하며 사는 사람도 많고 굳이 그게 무얼까 생각해내려 애쓰는, 그러나 그런 거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많을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그게 부르스 리든 조그만 자기 가게 하나 갖는 거든 언젠가 책을 내리라는 소망이든 뭔가 하나를 갖고 산다는 것 자체가 기특한 일일 게다. 그런 점에서 삼촌은 기특하다. 왜 하필, 이제 세상에서 한물 간(가고 있었던) 부르스 리냐고 물으면서 웃을 수는 있지만 그 하나가 왜 꼭 지적이고 거창하고 명예로운 것이어야만 하겠나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삶의 희망은 변하지도 않더라는 것. 우울증을 앓던 어떤 주부가 늘 가방에 청산가리 병을 넣고 다녔는데 그에게 그 독약은, 언젠가 정말 힘들면 떠날 수 있는 열쇠였다. 그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그 가방 속 청산가리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삶의 이유는 다 다르다. 그러므로 삼촌의 부르스 리는 정당하며, 누구도 비웃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막연하게 꿈을 갖다가 그것을 바래버리지 않았고 어쨌거나 그 분야에서 나름 일가를 이루지 않았는가. 삼촌이 살아온 바닥의 삶이 누구에게나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삶이 그의 것보다 일반적이고 덜 고단하다고 해서 그의 인생을 폄하해서는 안 되겠다. 그의 부르스 리는 한결같아서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한다. 어떤 조건이든 어떤 과정이든 역시 삼촌의 사랑은 우직하다. 험난하기가 유행하는 조폭영화, 범죄영화 여러 편을 압축해놓은 듯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파란만장은 결코 '사람을 죽이지 못 할' 한 무도인의 순수한 생을 참으로 짧게 만들어 버린다. 하긴 누구의 인생이든 돌아보면 짧다. 우린 독자로서 겨우 두 권의 책으로 그의 50 평생을 돌아보니 험난은 하나 참 짧다는 생각이 든다.

 

나 혹은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나? 아이들을 보면 저 녀석의 앞날이 어떨까 생각한다. 유난히 운이 나빴던 오래된 제자 아이가 생각난다. 맑은 아이였지만 온갖 싸움에 휩쓸리곤 했다. 주변 선생님들은 그 아이가 운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아이를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다. 이건 진실이 규명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어쨌거나 나의 안목으로 그 아이는 부모도 없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지언정, 나쁜 짓을 할 아이는 아이었다. 그렇지만 그 동네 아이들 패싸움 끄트머리엔 꼭 그 아이가 있었다.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무리가 끌려올 때 함께 딸려와 다른 아이들이 정학을 먹을 때(벌써 20년 전 이야기라 중학교에서 종학이 있었다.) 반성문 한장이라도 써야 했다.

 

그 제자 아이가 오버랩되는 '삼촌'은, 삶은 진흙탕이었으나 그 마음이나 인격은 유의원이나 유사장보다 더 인간에 가깝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다면 유씨 부자의 삶을 갖고 싶은 게 현실임이 비극이라면 진정 비극이지만.

 

서술자인 '나'와 그의 '형'의 삶은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촌의 삶이 미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대척점에서 보다 거시적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캐릭터도 없다. 이러나 저러나 다들 비루한 세월을 건너왔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삼촌의 인생에 대비된 '나' 형제들의 삶도 참으로 구차하고 비겁하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으며 감정을 이입하거나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하나씩은 있다면 나로서는 서술자 혹은 그의 형이 나의 삶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행복했을까? 마누라의 잔소리 때문에 개새끼 한 마리를 사들고 가야 하는 서술자의 그럭저럭한 삶은 과연 '삼촌'의 삶보다 더 번듯하긴 한 걸까? 나름대로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게 삶에 맞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 자신도 그의 모습에 비추어 잠시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게 내가 이 소설에서 얻은 가장 큰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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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 반反성장 복지국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요시다 타로 지음, 송제훈 옮김 / 서해문집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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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에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이 오바마에게 쿠바에 대한 미국의 봉쇄를 풀고 미주기구회의에 나올 수 있게 하라고 압박을 넣는다는 기사를 보았다. 쿠바, 그리고 오바마, 라틴아메리카....

 

쿠바는 오래 전부터 여행하고 싶었던 나라다. 이유가 뭐냐 물으면... 체 게바라의 나라이고, 천천히 가는 나라, 그리고 그 어둑한 골목 어딘가에 뭔가를 두고 왔나 싶게 정서적 공감대가 느껴지는 나라라서 그렇다. 유럽의 돌바닥도 좋아하지만 그들의 세련된 부유함은 제국의 피냄새를 안고 있기에 대체로 핍박받아온 민족으로서, 또한 사람이 함께 존중하고 살아야 좋은 세상이라고 소박하게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쿠바에 가면 그 중간 지점이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막연한 쿠바,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구조를 가진 특이한 나라임에도 소외되고 도태된 나라, 오바마라면 조금은 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본다. 놀라운 건, 주변의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힘을 합쳐 쿠바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아마도 그들이 여러 국가로 분화되어 있으면서도 민족적 유대감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리라. 그것은 우리 동북아 지역 여러 국가들이 한자문화권에 속하고 비슷한 유교문화를 지니고 있으나 공조와 공생이 전혀 되지 않는 것과 비교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불만이 있다면 마치 쿠바가 유토피아인 것처럼(필자 자신은 누누이 쿠바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강조했음에도) 느껴진다는 것이다.  낮고 느린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불편을 감수할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쿠바의 그런 가난하고 질박한 삶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쿠바가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비참하지는 않다고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일지는 모르겠다. 자본의 달콤함에 흠뻑 젖어 사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난일지는... 아니, 가난이라는 것이 불편을 넘어서 상대적이고 심리적인 어떤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쿠바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라는 말이 허황되게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쿠바에 자꾸 관심이 가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이끌어온 지난 세기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원의 고갈이나 인간성 말살 등 미래를 불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쿠바의 건축, 농업, 교육, 의료 재난구조 시스템 들을 취재하여 보여주고 있다. 르포라고도 할 수 있지만 쿠바 정부에서 나온 공문 같은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는 모든 문제를 정부가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고 해결하려는 문화가 기본에 깔려 있다. 그런데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것은 무슨 모순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늘 의문을 가졌던 점이 쿠바는 그토록 오래 카스트로가 집권했는데 (오래 집권해서 독재라고 하나?) 부패했다는 말이나 국민이 저항했다는 말이 들려오지 않는 점과 많은 독재국가들이 그러하듯 불안한 치안이나 내전의 흔적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수도 아바나의 낡은 집들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공무원인 건축 설계사가 각 가정에 방문하여 어린이까지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건축에 반영한단다. 다만 건축자재가 부족하여 좋은 건축물에서 살기 어렵고 이주 등에도 제한이 있는 듯 보인다. 우리에게도 거주 이전할 때마다 신고에 신고를 거듭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싶다. 또 한 편,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이 시대에는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가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 모순이 슬프기도 하다.

 

2008년 8,9월 구스타프, 이케라는 태풍이 왔지만 전자는 사망자 전무, 후자는 7명 뿐이었다고 한다. 허리케인 미셀로 국토 52%가 피해를 입었을 때도 사망자는 5명 뿐. 재해 방재 시스템으로 평상시 대피 훈련을 강화하고 막상 재해가 발생했을 때에도 대피소 시설을 제대로 해놓아 신뢰가 있다고 한다. 시스템과 신뢰의 문제인 것 같다. 미국 뉴올리언즈에 허리케인이 왔을 때 약탈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뉴스와 비교가 된다.

 

아바나 광장의 초저녁 풍경을 묘사하면서 도시가 밝은 것은 아니지만 치안은 좋은 편이라 한다. 광장을 둘러싼 좁은 골목길에도 가로등이 환하고, 열려 있는 문 안에서는 할머니가 의자를 흔들면서 tv를 보고 있다. 하지만 가로등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최신식 에너지절약형 전구이다. 필자는 ‘여기는 ‘그리운 미래'다’, 라고 표현했다. 검소한 선진성, 지속가능한 성장, 느리지만 인간다운 세상, 지구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의료 교육 등 인간개발지표를 충족시키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 그런 유일한 나라로 쿠바를 꼽으며 일본인인 저자는 에도막부 도쿠가와 시대를 그리워한다. 가난한 권력자, 작은 정부, “힘 있는 자는 녹을 적게, 녹이 있는 자는 힘을 적게” 가졌던 시대, 지역 공동체, 인간적인 법 집행과 공평과 청렴이 공존했던 시대라고. 일본 역사를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리워할 만한 역사 속의 시대를 가진 그가 부럽다. 우리에게도 그런 ‘태평성대’가 있긴 했는지....

 

쿠바의 거리에 게바라의 얼굴은 넘칠 정도로 많지만 카스트로의 초상화는 거의 없다고 한다. 살아있는 지도자는 추앙하지 못하는 법률이 있단다. 법률이 있다고 그게 다 지켜진다는 말인가? 또, 장기집권했던 카스트로가 그것이 법이라서 지켰다면 그것을 독재국가라 할 수 있나? 더 확인해 보고 싶은 내용이다.

쿠바는 가난하지만 더 많은 안전보장이 있어 생활에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예술가 로베르토 페레스 비스카이노가 말했다는데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는 쿠바 사회 전반의 장점인 동시에 문제일 것 같다. 최소한을 제공하는 국가, 그 이상이 불가능한 국가. 그 중간의 국민의 욕망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수용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은 과연(게다가 국제 공조 없이) 가능할까 싶다. 만약 우리가 통일한국을 건설하고 나서 지금의 쿠바를 넘어선 대안적인 훌륭한 시스템을 갖춘다고 기쁜 상상을 해 보더라도 그 이후, 마치 쿠바처럼 국제적으로 미움을 받고 고립당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참, 때 이른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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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하라, 미드에서 과학을 보다 하리하라 사이언스 시리즈 3
이은희 지음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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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카페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무슨 책을 읽거나 선생의 눈으로 읽듯이, 이 저자도 생활에서 무엇을 보든 그것을 과학과 연관지어 보나 보다. 아니, 그에게 있는 어떤 경험이 '쉬운 과학 이야기'로 재생산되게 하는 필터가 되었나 보다. 만약 내가 미국 드라마를 좀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재미있었을 책이지만 전혀 모르는 드라마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과학과 버무리는 솜씨가 아주 좋다. 그러니 당연히 청소년이 있는 집에서라면 아이들을 위해 구해 보면 좋을 책이다.

나 역시 딸을 위해 이 책을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었지만 그 전에 이 책을 어떤 부분들을 수업에 활용하기 위해 체크해 놓았다. 특히 아이들과 핵의 위험성을 공부하는 수업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이 책이 인용되었다. 브라질의 돌멩이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게 읽히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아이들에게도 세슘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오히려 뉴스에서 세슘, 세슘하면서도 그게 어디에 어떻게 위험한지는 말해주지 않았던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이렇게 수업에 책을 일부분을 활용하면서 책도 함께 가지고 들어간다. 여기서 인용했노라고, 도서관에 이 책이 있노라고. 내 독서력의 절반은 나를 위해, 그 나머지는 아이들을 위해 채워진다.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우습게 볼 필요가 없다. 요즘 청소년을 위한 책들의 수준은 너무 높거나 재미있거나이다. 그러므로 어른들,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굳이 자기가 관심을 깊이 갖고 있는 학술적인 어떤 분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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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아찌아 마을의 한글 학교 - 첫 번째 찌아찌아 한글 교사의 아주 특별한 일 년
정덕영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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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이 책을 읽을 즈음 찌아찌아 마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난관에 봉착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하긴 어떻게 순수하게 한글을 그들의 문자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던 나로서는 여기에도 어떤 정치적이고 정책적인 뒷이야기들이 있었구나, 그리고 그것의 진행과정이 삐걱거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한글이 누군가의 음성언어를 표기할 문자로서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2009년에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사람들 말마따나 그걸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느냐고, 자원봉사 차원이라면 20년이 넘는 중등학교 국어교사 자격과 경력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거나 아주 특별한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할 것이 아니라면. 또 그런 기회가 쉽게 오는 것도 아닐 터이고 말이다. 물론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국어 선생으로서 한국어 지식에 대한 총점검도 받을 겸 여러가지 목적으로 그 126시간의 자격연수를 받았고 시험을 치렀다. 교육과정이 매우 충실했던 것만으로도  만족할텐데 자격증을 어렵게 (시험이 어려웠고 합격률동 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더랬다.) 얻었던 만큼 기쁨도 컸다. 중등교사자격증도 그렇지만 자격증을 얻는다고 해서 바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법을 아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에게 어떻게 한국어를 가르칠 것인가는 부딪치며 해결할 문제일 것이다. 가끔 우리 학교 원어민 교사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한국어 (특히 어미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구나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곤 할 정도다.

 

이 책은 '교사로서의 자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구체적으로 많이 언급이 되지는 않는다. 저자의 경험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므로 외국에 나가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주는 것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자세는 모든 일에서 그러하겠지만 교사로서의 자격에서도 제 1 순위인 것 같다. 학생들에 대한 애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책들을 때때로 읽어야만 지금 나는 이 정도면 교사로서 그럭저럭 괜찮지 뭐, 하는 따위의 안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려울 때 열심히, 어려운 아이들을 열심히, 그렇게 가르쳐야 정말 선생이다. 말 잘 듣는 아이들에게 자기가 다 알고 있고 여러 번 가르쳐 본 것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여 스스로 괜찮은 교사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세상 모든 것을 가르칠 수는 물론 없지만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7차교육과정을 거치면서(지금은 개정 7차) 한국어의 문법적인 부분보다는 사회는 보는 눈을 기르는 방향으로 국어교육을 받고 있다. 지식이나 문법, 고전문학의 비중이 제법 있었던 6차교육과정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러다 보니 한국어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다.(국어가 4,5차시로 다른 교과에 비해 많은 수업을 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문학도 더 가르치고 싶고, 말하기 듣기도 부족하고 , 뭐 그런 거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한국어 조음, 발성의 원리나 문법 공부하는 시간에 오히려 흥미를 보이는 남학생도 많다. 나도 개인적으로 고전문법 등을 가르칠 때 재미있다.

 

이주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의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면 그들이 말을 배워가는 그 과정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은퇴 후에 할머니들께 한글을 가르쳐 드리는 꿈도 꾼다. 무엇이 되었든 진정 글과 말로 세상을 활짝 여는 기쁨의 수업이 될 것이다. 배우는 기쁨, 가르치는 기쁨이 점점 사그라드는 '학교'는 그래서 점점 슬프다. 눈이 환해지고 뇌가 환해지고, 그래서 마음이 환해지는 진정한 배움의 학교는 이제 그 시대를 닫고 있는 것인가. 오래 공교육 한 가운데 우뚝 서서 이 길을 걸어온 내 등 뒤로 노을이 지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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