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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의 삼촌 브루스 리 ㅣ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2년 2월
평점 :
내가 소설을 참 안 읽는 편인 건지, 편식을 하는 건지 몰라도 우리 독서모임에서 천명관을 읽자고 누가 추천했을 때 그가 누구지? 싶었다. 두 권의 두께까지는 소설이니까 그렇고,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의 속도감 때문에 그 두께의 부담도 금세 사라졌다. 앞 부분을 읽을 때에는 '키치'스러움을 느꼈다. 아하, 90년대에 유행하던(는?) 가벼운 말투 속에, 엽기적이고 기이한 사건 속에, 환상 속에, 비현실 속에 페이소스를 담는, 뭐 그런 소설인가 보다. 그래서 심지어는 군에서 휴가나온 아들에게 나중에 부대로 부칠테니 읽어봐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낄낄대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발견했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1권 뒤쪽으로 가면서 박정희를 언급할 뿐 아니라 삼청교육대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소름 돋는다. 잘은 몰라도 이렇게까지 자세히 그것을 언급한 소설이나 작품이 있을까 싶다. 함부로 언급하기 미안하고 부끄럽고 무서운 근대사 속의 사건이 한둘 아니지만, 광주는 몸서리를 치고 나서 그 비극이 숭고로 전환될 수 있기에 '입 밖으로 꺼내 말하는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삼청교육대는 그저 우리의 '치부'일 뿐이다. (요즘 인터넷 댓글 중 차라리 그때처럼 삼청교육대를 부활하여 범죄를 소탕해야 한다는 식으로 어버이연합스러운 주장을 하는 사람도 없진 않지만 누가 뭐래도 삼청교육대는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부끄러운 인권 사각지대의 역사일 뿐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안타깝지만 아직까지 그것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마무리도 없고 시도도 없다는 게 더 문제다.)
이 소설에는 해학과 비장이 묘하게 섞여 있지만 (해학은 달관과 체념을, 비장은 초밀도 '레알'리즘을 통해 나타내는데 그것은 등짝을 마주 대고 있어 더 기묘하다. 남사당패가 공연할 때 쓰던 여러 얼굴의 꼭두와 같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소설이란 게 우리 삶을 집약해서 보여주며 대리만족이든 카타르시스든 느끼게 해주는 임무가 있으니 그런 면에서 보면 '좋은 소설'일 것이 틀림없다. 우스꽝스런 말투와 그 안에 담긴 심각한 사건들 사이의 괴리는 일종의 장치이자 기법일 것이다. 우리 삶은 기실 미친듯이 심각하다가, 지나가고 나면 뭐 별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를 것들로 가득차 있거나 그 반대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삼촌에게 부르스 리는 회망의 상징이다.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쯤 있을 수 있다. 아니, 그런 거 없이 그저 생명의 도리를 다하며 사는 사람도 많고 굳이 그게 무얼까 생각해내려 애쓰는, 그러나 그런 거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많을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그게 부르스 리든 조그만 자기 가게 하나 갖는 거든 언젠가 책을 내리라는 소망이든 뭔가 하나를 갖고 산다는 것 자체가 기특한 일일 게다. 그런 점에서 삼촌은 기특하다. 왜 하필, 이제 세상에서 한물 간(가고 있었던) 부르스 리냐고 물으면서 웃을 수는 있지만 그 하나가 왜 꼭 지적이고 거창하고 명예로운 것이어야만 하겠나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삶의 희망은 변하지도 않더라는 것. 우울증을 앓던 어떤 주부가 늘 가방에 청산가리 병을 넣고 다녔는데 그에게 그 독약은, 언젠가 정말 힘들면 떠날 수 있는 열쇠였다. 그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그 가방 속 청산가리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삶의 이유는 다 다르다. 그러므로 삼촌의 부르스 리는 정당하며, 누구도 비웃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막연하게 꿈을 갖다가 그것을 바래버리지 않았고 어쨌거나 그 분야에서 나름 일가를 이루지 않았는가. 삼촌이 살아온 바닥의 삶이 누구에게나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삶이 그의 것보다 일반적이고 덜 고단하다고 해서 그의 인생을 폄하해서는 안 되겠다. 그의 부르스 리는 한결같아서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한다. 어떤 조건이든 어떤 과정이든 역시 삼촌의 사랑은 우직하다. 험난하기가 유행하는 조폭영화, 범죄영화 여러 편을 압축해놓은 듯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파란만장은 결코 '사람을 죽이지 못 할' 한 무도인의 순수한 생을 참으로 짧게 만들어 버린다. 하긴 누구의 인생이든 돌아보면 짧다. 우린 독자로서 겨우 두 권의 책으로 그의 50 평생을 돌아보니 험난은 하나 참 짧다는 생각이 든다.
나 혹은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나? 아이들을 보면 저 녀석의 앞날이 어떨까 생각한다. 유난히 운이 나빴던 오래된 제자 아이가 생각난다. 맑은 아이였지만 온갖 싸움에 휩쓸리곤 했다. 주변 선생님들은 그 아이가 운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아이를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다. 이건 진실이 규명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어쨌거나 나의 안목으로 그 아이는 부모도 없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지언정, 나쁜 짓을 할 아이는 아이었다. 그렇지만 그 동네 아이들 패싸움 끄트머리엔 꼭 그 아이가 있었다.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무리가 끌려올 때 함께 딸려와 다른 아이들이 정학을 먹을 때(벌써 20년 전 이야기라 중학교에서 종학이 있었다.) 반성문 한장이라도 써야 했다.
그 제자 아이가 오버랩되는 '삼촌'은, 삶은 진흙탕이었으나 그 마음이나 인격은 유의원이나 유사장보다 더 인간에 가깝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다면 유씨 부자의 삶을 갖고 싶은 게 현실임이 비극이라면 진정 비극이지만.
서술자인 '나'와 그의 '형'의 삶은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촌의 삶이 미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대척점에서 보다 거시적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캐릭터도 없다. 이러나 저러나 다들 비루한 세월을 건너왔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삼촌의 인생에 대비된 '나' 형제들의 삶도 참으로 구차하고 비겁하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으며 감정을 이입하거나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하나씩은 있다면 나로서는 서술자 혹은 그의 형이 나의 삶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행복했을까? 마누라의 잔소리 때문에 개새끼 한 마리를 사들고 가야 하는 서술자의 그럭저럭한 삶은 과연 '삼촌'의 삶보다 더 번듯하긴 한 걸까? 나름대로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게 삶에 맞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 자신도 그의 모습에 비추어 잠시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게 내가 이 소설에서 얻은 가장 큰 무엇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