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영의 글쓰기 노트 - 대통령의 필사가 전하는 글쓰기 노하우 75
윤태영 지음 / 책담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혹적인 글쓰기는 매뉴얼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만 같다.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휘몰아치는 글쓰기..여야만 멋진 글이 되지 않을까. 멋진 글과 잘 쓴 글은 다르지 않을까... 문학을 꿈꾸는 이들은 그렇게 가슴에서 퍼올린 글을 쓰는 자신을 열망한다. 그런데 갈고 다듬은, 심지어는 학원 같은 데서 학습된 글쓰기라니.... 내가 요즘 글쓰기 책들을 집어들게 된 계기는 그런 건 아니었다. 정희진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정희진처럼 쓰기>라는 책을 준비한다고 해서 솔깃했다. 그의 글이야말로 요즘 보기 드문 깊은 사색의 명문들인데, 그것도 매뉴얼화가 된단 말인가? 하긴 한참 전에 <고종석의 문장>도 사서 보긴 했다. 그 이유 역시 고종석의 글을 좋아하다 보니 자기 글 쓰기를 어떻게 가르침으로 구성했는지 궁금해서 그랬나 보다. 하지만 분명 신문이나 주간지의 칼럼 중에서도 글 잘 쓰는 이들을 보면 이름을 기억했다가 그의 글을 찾아 읽게 된다. 요즘은 정말 글 잘 쓰는 이도 많다. 명문가가 드물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잘 쓰는 사람들은 있다.

 

글쓰기가 열풍이란다.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가 늘어서 그러나? 아니면 인터넷 신문 같은 데에서 전문가가 아니어도 글 쓸 기회가 많아져서 그런가. 혹은 자기 위안이나 자가 치유를 위한 글쓰기도 확장되는 건가. 위 두 책과는 달리 <윤태영의 글쓰기 노트>는 순전히 이런 나도 내가 쓰는 글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 건지 검증하고프다.’는 열망에서 선택했다. 노무현에 대한 추념은 덤이고.

일단 이 책은 글쓰기의 핵심이 간결하게 군더더기없이 잘 정리되어 있는 좋은 책이다. 목차만 정리하고 염두에 두어도 자기 글에 대해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정리한 것만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 문장을 두 번은 짧게 한 번은 길게(3,3,7) 식으로 리듬을 준다. 시작은 가급적 짧게,

쉼표는 가능한 없다고 생각하고 안 쓴다.

쉽고 간결한 문장 쓰기.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쓴다.

시작은 강렬하거나 친숙하게

대구법을 활용한다.

대화체를 중간에 적극 활용

한 문장이나 한 줄에 같은 단어 쓰지 말 것.

영어식 문장 쓰지 말자.

화려한 수식은 짧게

주어와 서술어는 가까이 둔다.

비슷한 말, 반대말... 사전으로 어휘력 기르기.

하나의 장면을 하나의 꼭지에

가급적이면 객관적 시점으로 (나는.. 쓰지 말기)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

욕심내서 지루하게 쓰기 없기.

핵심 키워드 하나

한 편에 글에는 하나의 메시지만

워딩은 생생하게 따옴표로 옮길 것.

다 아는 이야기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할 것.

반문하기.

주장 글에는 예화를 활용

삭제는 과감히

독자를 의식하고 쓸 것.

 

어떤 것은 새로웠고 어떤 것은 몰랐지만 나 역시 그렇게 쓰고 있는 것도 있었다(가령 주어와 서술어를 가까이 쓰라는 주문이 있다. 문장 배열 순서로는 정확한 문법적 문장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입말에 가까운 글쓰기를 지향하는 내가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 경망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 읽히는 관건이 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 글쓰기의 단점이라고 생각한 쉼표 쓰지 말 것지적도 유용하다. 글쓰기 초보들이 쉽게 접근하도록 책 자체가 간결하면서도 요점만 나와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쓴 글들의 예시가 적절해서 책이 가볍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굳이 단점을 지적하자면, 마치 시의 행 나누기처럼 글을 써놓았는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점이 거슬린다. 읽기 쉬우라고 그렇게 썼을 테지만 글 좀 써보겠다고 이 책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시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산문이 시 흉내내기를 한 것 같아서 불편한 마음도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토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는 우리나라 혁신학교의 중요한 교육철학적, 방법론적 기반이 된 이론이다. 도움이 될 만 한 좋은 이론이자 실천의 생산물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배움의 공동체를 접하면서 씁쓸했던 점이 있다. 89, 전교조가 결성되었고 그 전신인 전교협의 활동은 이미 그 이전부터 계속되었다. 전교협, 전교조 초기 시절 많은 교사들이 꿈꾸었던 학교 현장의 변화그 첫 번째가 바로 교실에서 구현되는 공동체였다. 그것이 수업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 두레 수업이었다. 오늘날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게 된 모둠수업의 뿌리이다. 배움의 공동체와 두레수업은 결국 같은 이야기이다. 아이들의 활동을 중심에 놓고, 서로 도와가며 공부하게 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20년도 더 된 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동체 수업은 그 이론적 성과를 공고히 하지 못하고 허공에 떠도는 신세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아직도 전교조에서는 참교육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방학마다 현장에서 굳건히 뿌리내린 수업방식이나 학급운영 방식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교육적 이론도 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 잇는 전교조의 근간 정신도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 역시 전교조 조합원이지만 전교조의 큰 과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집단은 되었는지 몰라도 학교 현장을 개혁시키지는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아니, 보이지 않은 많은 변화를 이루었음에도 그것이 이후에 더 큰 발전의 역량이 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 놓고 뒤늦게 일본에서 배움의 공동체이론이 들어오자 다들 거기에 열광한다. 우리가 지고 있던 더 좋은 열매를 내던져버리고 남의 것을 좇는다.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다들 수업 정말 잘해볼 열정과 의지가 있는 좋은 교사들인데도 말이다.

 

우치다 열풍도 그렇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 땅에서 교육혁신을 꿈꾼다 하는 젊은 교사들이 솔깃해 하는 이름이다. 우리에겐 그만큼 꼭지가 될 만한 수장이, 이론이, 지도자가 없다는 뜻이다. 나 역시 그 이름에 혹해 책을 펼쳐 보았다. 솔직히 그 이름을 언급하여 열풍에 어떤 식으로든 가세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는 실제보다 큰 옷을 입은 명망가들이 참 많다. 적어도 그런 허세에 바람을 더 넣어주고 싶지는 않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치다는 허세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거나 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추앙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진단한 일본, 특히 일본의 교육은 우리의 것과 많이 닮은 듯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교육현장을 진단하는 데 우치다를 많이 언급한다. 그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닮은 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약 20년의 간격을 두고 경제 문화, 사회, 정치, 교육의 여러 가지 현상에서 일본가 걸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교육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하고 예견이 되는 것도 많다. 그러니 일본을 진단하는 일이 우리에게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정확한 진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치다의 일본 진단은 정확한가? 일단 그의 시각은 올바른가? 즉 그가 올바른 시각으로 일본을 정확히 진단했는가와 그런 일본 사회 진단과 분석이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게 적용되는가, 이 조건들을 다 충족시킨다면 그의 글과 말은 주목받을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바로는 아니다.

  

일단 우치다의 해석은 올바르지 않다. 가장 거슬렸던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물론 사회학이라는 게 정량적 분석이 불가능하긴 하다. 경험들이 모여 분석의 근거가 되므로 100프로 완벽한 해석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학자나 언론인들은 자기가 경험한 것 이상의 자료를 모으려 애쓴다. 우치다의 예시들은 그런 노력이 없다.

 

또 우치다의 시선은 올바르지 않다.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느냐가 중요한데 그의 눈높이는 매우 보수적이다. 일본 전통사회가 요구하는 바른생활 사나이의 시각으로 바라보다 보니 흔히 말하는 루저들, 학교와 교육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올바르게 보지 않는다. 고작 유의미한 시선으로 꼽아보자면 그들이 학교 수업을 거부하는 것은 무기력하고 나타하고 도태된 인간들이라서가 아니라 일부러그리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 정도다. 일부러 그러는 게 맞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 주목하고 우치다의 혜안을 칭송한다. 그럼 왜? 왜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한 해석은 없다. 대안도 없다.

가끔 일본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허망한 지점이 있다. 주인공들은 매우 시크하게 자기자신을 객체화 시켜 현실의 아픔에 젖어들지 않는다. 딱 거기까지. 그래서 현실을 어떻게 극복했다거나 나아갔다는 이야기는 없다. 냉소로 끝. 심지어는 자기자신까지 냉소함. 오벼 파이는 것은 나의 내장일지라도 나는 마취제를 맞고 누워있으므로 얼마든지 고통 받는 나의 내장을 냉소할 수 있다. 멋지지? 이렇게 끝나는 수많은 일본소설들처럼 우치다의 거부자들에 대한 시선 역시 그러하다. 우치다는 그들이 왜 학교와 수업을 거부하는지, 그래서 그런 이들을 학교는 어떻게 품어야 하는지, 혹은 일본 사회가 앞으로 그들이 일으킬 수 있는 문제를 무엇으로 보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고작 일부러 거부하는 거라고, 이거 내가 알아낸 거라고, 그러면 쓰겠어? ?! 하고 야단도 친다. 사회학자연하는 사람이 호통을 치고 가르치려 드는 건 또 뭔가? 지나친 냉소적 거부에 대한 지나친 열정적 개입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 이래 다같이 사이좋게 도우면서 살자라는 가치를 버렸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과거의 그와 같은 기치는 유교적이고 봉건적인공동체(비록 그것이 건전한 것일지라도) 아래 가능했던 것이고 그와 같은 공동체의 가치는 마르크스의 노동자의 단결과는 무관한 것이다. 지금은 자본의 기치 아래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끼리는 단결이 가능하겠지. 마치 두 가치가 하나의 뿌리인 양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오류는 범한다. 그리고 그것을 일본인의 민족성 같은 것으로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게다가 그런 개별화와 분열에 대해 참견하는 수밖에 없다는 대안을 대안이랍시고 내놓고 있다.

니트족에 대한 사회의 책임에 대해서도 방치하면 노숙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교에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쳐봐야 소용없단다. 가정에서 가르치지 않으면 이미 늦는다고. 그런데 니트가 나오는 가정은 대체로 소득이 낮다는 분석은 하면서 그 사회적 구조나 상관관계는 염두에 두지 않는가? 가난한 가정에서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는 분석하지 않나? 원인을 빈곤가정에서 찾았다면 사회에서 빈부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며 빈곤가정에서 가정교육도 못 받고 방치되는 아이들을 어떻게 돌보아 니트족이 되지 않도록 방지할 것인가와 같은 대안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닌지. 그런데 대안이랍시고 주제넘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라’, 체험교육을 하라,종교적 인간을 길러라... 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답답했던 것은 우치다가 아니다. 그렇게 분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름 그 책만큼의 무게로 유의미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 열광하는 한국의 교육관련 종사자들이다. 그것도 꽤나 진보적이고 꽤나 괜찮은 사람들이 말이다.

우치다의 모든 담론이 다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과열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찔레꽃 2015-05-10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 ^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주셨네요 ^ ^

박상희 2016-04-2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생각지 못한 얘기들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양의계곡 2021-07-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짜 너무 속시원한 리뷰!!!
대체 왜 이런 구닥다리 책에 열광하는 건지 원...
한국에도 그만큼 꼰대가 많다는 방증이겠죠.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은 묘하게 매력적이고 묘하게 힘든 일인 것 같다. 광고와 여성지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다. 더러는 대학 때 누구보다 멋진 시를 쓰던 이들... 만약 시인이 되었다면 한없이 드높은 곳에 빛났을지도 모를 그 무엇을, 아니 빛나지 않았더라고 고귀함을 간직했을 그들이 자본주의의 네온사인 앞에 자신의 빛을 보탬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거기에 녹여 없애버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기도 하다.

 

박웅현에게는 드높은 무언가가 있다. 시적 감성도 있고 인문학적 소양도 있다.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진정성도, 예술성도 있다. 그런데 그는 시인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고 광고인이 되었다. 광고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적인 가치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술적이어야 함에도 상업성이 예술성에 승하는 분야인 것도 사실이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했던가. 어차피 광고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아무리 의식있고 철학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본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웅현이 만든 삼성 광고를 보면서 그의 인문학적 소양의 범위를 가늠해 본다. 아무리 아니라고는 해도 세상은 일등만을 기억한다는 광고의 파장은 컸다. 그것이 이끌어낸 성장 제일주의의 폐해를 예측하지도 못했고 의도하지도 못했다고 한다면 박웅현답지 않다. 그렇게 영민한 사람이 그걸 몰랐을까?

그러고 보니 김정운 이후 나는 요즘 좀 까칠한 것 같다. 재능은 분명 세상을 위한 축복인데 재능이 무의식을 만나면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낳는지 아는 까닭에 좀 까칠해지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박웅현이 공동체에 해악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아까워서 하는 소리다.

 

이 책에서 새삼스레 발견한 도종환의 시가 좋았다.  또 수험생 광고를 보다가 울컥했다. 지금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이 책을 읽던 시점 둘째가 고3이었고 수시에 떨어져 정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라는 멘션은 수험생 자신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이라면 참 성숙한 녀석이겠지만 기실은 어른들이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어차피 누군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수험의 세계가 비장하다. 그 한 복판에 내 새끼가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영웅입니다같은 광고는 (남 비교해서 좀 미안하지만) 이제현의 광고를 보았을 때의 감동이 있다. 인문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사회적 의미, 정치적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이다. 때로 정치색을 빼고 무색무취한 인문학 공부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껍질 직전의 속살만 알겨먹()자는 의도로 매우 얍삽한 자세라 생각한다. 박웅현이 감히 인문학 광고를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그와 같은 사회적 의식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좋은 광고 99개를 두고도 사람들이 삼성의 1등 광고를 자꾸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나머지 광고들의 의식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에 파우스트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잘 모르는 남의 문화에 기반한 책들을 읽을 때는 늘 이질감을 느낀다내가 읽는 이 입장이 아니라면 누군가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할 때 아마도 책을 모두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조언할 것이다. 모르는 이야기는 모르는 이야기대로, 분위기는 분위기대로 즐기면 될 것이다. <신곡> 같은 책은 알알이 박힌 주석을 찾아 읽는 것이 쏠쏠한 재미일 수도 있다. 독서에 정석이 어디 있으랴.

 

의외로 단테는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둔 지옥론을 펼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테는 통찰력 있는 저자였지만 그의 견해가 전적으로 객관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터이니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 때문에 영원히 지옥에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도 있겠다 싶어 웃음도 좀 나온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글 쓰는 이는 글로써 세상에 빛을 주기도 하고, 못다 한 고백도 할 수 있다. 기도의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고 글로써 복수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가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이나 인간관계에서 다 못한 말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다. 단테의 신곡에도 그런 요소가 더러 보여 재미있었다.

 

물론 그런 개인적 경험이 전부였다면 신곡이 고전이 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철저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당시 서구 기독교 사회의 보편성에서 인정받을 만한 가치관이 저변에 깔려 있고 풍부한 상식과 역사적 고찰, 도덕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문학적 섬세함으로 그려낸 상상의 세계는 얼마나 정교한가. 나는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아니다. 어디를 가도 성소에 들르면 알 수 없는 존재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기도와 독백을 올리며 나를 돌아볼 뿐이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사랑하지만 그를 종교적 존재로 만나지 않고 붓다를 존경하지만 역시 신앙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불경 속에 그려진 상상의 세계와 예수가 설파한 레토릭에 감탄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매주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 독송을 하면서 아미타경 속에 그려진 극락세계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문학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곳이 정녕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으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행복하게도 만들고 돌아보게도 만드는 것이다.

 

단테가 그린 지옥은 참 섬세하다. <파우스트>가 그랬듯이, 단테 이후 그의 지옥도나 천국도에 빚진 예술가들이 참 많을 것이다. 이중 눈에 띄는 지옥행자들이 있다. 3곡에는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지옥이 펼쳐진다. 하느님께 반항도 복종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천사들의 지옥이기도 하다. 죽음의 희망조차 없이 다른 운명만을 부러워하는 자들에게 문 앞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써있다 한다. 희망 없는 지옥이다. 행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 때가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부른 배를 만지면서 아, 행복해~’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바쁘게 일을 하다가 허기질 때, 이 일이 끝나고 곧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 행복하다. 간절히 읽고 싶은 책을 기다릴 때, 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아이들과의 즐거운 수업을 구상할 때 행복하다. 행복은 만족이 아니라 희망이다. 그래서 희망 없는 지옥이야말로 진짜 지옥인 것이다.

 

<신곡>은 대체로 기독교적 가치에 준해 그려졌으므로 11곡에는 나와 같은 무신론자가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나로 말하자면 한때 자발적 기독교 신자였으나 또한 자발적으로 교회를 뛰쳐나온 사람이기도 하다. 교회가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무언지조차 몰랐던 나의 할머니나 우리 조상들은 다 지옥에 가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교회가 해준 답은 네가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라.”였다. 논리적이지 않으면 납득을 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6학년의 가슴에 불신을 심어준 교회가 싫었다. 예수님이라면 다르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나왔다. 지금은 한국 개신교 교회의 타락상이 싫어 거의 반기독교인이 되다시피 했지만 나의 신앙 역사는 그러했다. 지옥에 가고 싶지야 않지만 그렇다고 교회를 다니고 싶지도 않으니 어쩐다?

 

이간질한 자들의 지옥도 재미있다. 자기 머리를 들고 다닌다고 한다. 부끄러워 하라는 뜻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피에 삶아지는 지옥에 들어야 하는 폭군들에게 신곡을 읽히고 싶다. 어느 정치인도 자신이 폭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히틀러를 경배하지 말라, 그는 악마다, 라고 말하는 독일인을 보면서 우리의 박정희를 떠올리면서 어디까지를 폭군으로 규정해야 할까를 생각해 본적이 있다. 대개 박정희를 경배하는 이들 중 히틀러를 추앙하는 자가 나온다. 물론 박정희를 좋아하지만 히틀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 둘은 정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맞다. 수백만을 죽인 자와 박정희는 다르겠지. 그러나 정도는 다를지언정 독재자는 독재자, 폭군은 폭군이다. 미화는 금물이다.

 

무엇보다 가장 지옥스러운지옥은 34곡에 등장하는 배신의 지옥이다. 가끔 고민한다. 사랑이 더 중한가, 믿음이 더 중한가? 모든 이가 모든 이를 사랑하며 살 수는 없다. 내가 한 생을 잘 살아내고 싶어 몸부림을 쳐도 모든 이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그러나 믿음은?  그저 한 개인에 대한 믿음이든, 그것이 사랑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을 어찌 용납할까 싶다. 그래서 그것은 배신(背信)이다. 사랑보다 뿌리 깊은 믿음을 저버리는 일.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추며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이를 배신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것이 유대 민족을 살리는 일이라고. 그것이 스스로 의식한 것이든 아니든, 잘못된 인식이든 결국은 배신이다. 가장 멀고도 깊은 지옥에는 배신자들이 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엄기호

 

이 책은 나와 같은 교육공동체 벗의 이자 사회학자인 엄기호가 쓴 책이다. 제목이 무척 진하게 와 닿는다. 적어도 교사들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여태까지 학교와 아이들이 병들어갈 때 가장 큰 주범 역할을 했던 것은 교사였고, 그러므로 교사는 가해자이지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교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이 나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교사도 학교가 싫다정도였더라도 많은 교사들이 맞아맞아, 하고 가볍게 동감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싫다두렵다로 나아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남몰래 얼른 책을 집어 드는 시기가 되었다.

 

오늘날 교사들을 학교 가기 두렵게 만드는 일은 무엇일까? 이제 더 이상은 통하지 않게 된 교사의 권위에 맞서 살벌한 눈빛을 날리는 아이들 때문에, 그리고 따박따박 자기 아이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학부모들 때문에? 그리고 아이들끼리의 싸움조차 깨알같이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왕따와 폭력와 송사가 난무하는, ‘손해 볼까 두려워 서로를 핏발선 눈으로 노려보는이 사회의 적대적 분위기 때문에....? 그렇다면 오래 전부터 교사들을 가장 괴롭혔던 관리자들의 횡포는 이제 별 것도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교장이 아무리 막무가내여도 교사를 짜르지는못했으니까. 이제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를 교단에서 물러나게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교장, 교감 때문에 힘들고 지쳤을 때는 아이들이라는 숨통과 출구가 있었다. 교사의 주된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기에 아이들과의 교감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답답함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아이들과의 벽을 느끼고 적대적인 눈빛과 개김에 맞닥뜨려지는 순간, 교사는 이제는 더 이상 출구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엄기호의 글이 교사와 학생의 단절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단절의 사회적 원인을 짚고 있을 뿐 아니라, 교사들이 학교에서 느끼는 갈등의 꽤 중요한 부분임에도 별로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동료와의 관계성 문제도 짚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공감하는 바다. 상대적으로 교사들의 스트레스 원인에서 동료관계가 덜 중요하게 비춰졌던 것은 학생들과의 관계가 좋다면 동료들과의 관계를 좀 서걱거려도 상관없을 만큼 비중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뒤집으면, 그만큼 학교에서, 특히 수업에서 교사들의 협업이 적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동료와의 관계라고 말하면 수업이나 학급운영 등에서 서로 돕거나 교감하거나 서로를 발전시키는 의미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교무실에서 불협화음 없이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많은 교사들은 비교적 평등한 편인 동료들 간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경험하며 상처받아왔을 뿐 아니라,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점에서는 단지 교무실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정도의 동료관계로는 학교생활을 잘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학교 안에서도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갈등과 문화적 괴리는 점점 심각한 문제가 되고 결국 교육적으로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현실이다.)

 

혁신학교는 지금 현재 출구가 없던 한국 교육의 유일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그것이 유일하게 옳은 대안이냐를 떠나서 그나마 차선 혹은 차악일지라도 말이다. 꼭 혁신학교가 아니어도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검토되는 대부분의 학교 형태, 교육과정, 교육철학의 기조는 소통과 협업이다. 아이들에게도 협동학습을 통한 자기주도의 학습 태도를, 즉 물고기 잡는 법을 길러주는 교육이 행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교사들 스스로는 동료교사와의 협업 없이 혼자서 잘해내려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동료가 단지 분위기를 어그러뜨리지 말아야 하는정도의 관계가 아니라 함께 수업을 연구해야 하는 연구 동반자로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중노동일지라도 사람들을 힘내서 일하게 하는 것은 관계이며 관계망의 가장 튼튼한 기저는 그 직업의 목적이 되는 관계일 것이다. 교사에게는 그것이 바로 학생들이다. 그것마저 무너지고 있다는 무진단에 우리가 공감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거라면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비교적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인 나도 가끔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착한 아이들이 다니는 안정적인 학교 분위기 덕에 큰 어려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던 나같은 경우는 매우 행운아일 뿐이라고 누군가가 옆에서 꼬집었다. 교단의 희망을 말하는 자 아직 덜 아파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래, 언젠가 넌더리를 내고 교단을 떠나고 싶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 진단을 넘어 대안을 말하고 싶다. 근거 없는 희망의 독을 뿜어서도 안 되겠지만 대안 없는 절망론으로 그쳐도 안 된다고 말이다. 교육공동체 벗에서 많은 논란이 되는 교육 불가능론을 어떻게든 뛰어넘어야 할 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