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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전에 파우스트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잘 모르는 남의 문화에 기반한 책들을 읽을 때는 늘 이질감을 느낀다. 내가 읽는 이 입장이 아니라면 누군가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할 때 아마도 ‘책을 모두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조언할 것이다. 모르는 이야기는 모르는 이야기대로, 분위기는 분위기대로 즐기면 될 것이다. <신곡> 같은 책은 알알이 박힌 주석을 찾아 읽는 것이 쏠쏠한 재미일 수도 있다. 독서에 정석이 어디 있으랴.
의외로 단테는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둔 ‘지옥론’을 펼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테는 통찰력 있는 저자였지만 그의 견해가 전적으로 객관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터이니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 때문에 영원히 지옥에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도 있겠다 싶어 웃음도 좀 나온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글 쓰는 이는 글로써 세상에 빛을 주기도 하고, 못다 한 고백도 할 수 있다. 기도의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고 글로써 복수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가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이나 인간관계에서 다 못한 말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다. 단테의 신곡에도 그런 요소가 더러 보여 재미있었다.
물론 그런 개인적 경험이 전부였다면 신곡이 고전이 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철저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당시 서구 기독교 사회의 보편성에서 인정받을 만한 가치관이 저변에 깔려 있고 풍부한 상식과 역사적 고찰, 도덕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문학적 섬세함으로 그려낸 상상의 세계는 얼마나 정교한가. 나는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아니다. 어디를 가도 성소에 들르면 알 수 없는 존재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기도와 독백을 올리며 나를 돌아볼 뿐이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사랑하지만 그를 종교적 존재로 만나지 않고 붓다를 존경하지만 역시 신앙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불경 속에 그려진 상상의 세계와 예수가 설파한 레토릭에 감탄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매주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 독송을 하면서 아미타경 속에 그려진 극락세계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문학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곳이 정녕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으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행복하게도 만들고 돌아보게도 만드는 것이다.
단테가 그린 지옥은 참 섬세하다. <파우스트>가 그랬듯이, 단테 이후 그의 지옥도나 천국도에 빚진 예술가들이 참 많을 것이다. 이중 눈에 띄는 지옥행자들이 있다. 3곡에는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지옥이 펼쳐진다. 하느님께 반항도 복종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천사들의 지옥이기도 하다. 죽음의 희망조차 없이 다른 운명만을 부러워하는 자들에게 문 앞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써있다 한다. 희망 없는 지옥이다. 행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 때가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부른 배를 만지면서 ‘아, 행복해~’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바쁘게 일을 하다가 허기질 때, 이 일이 끝나고 곧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 행복하다. 간절히 읽고 싶은 책을 기다릴 때, 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아이들과의 즐거운 수업을 구상할 때 행복하다. 행복은 만족이 아니라 희망이다. 그래서 희망 없는 지옥이야말로 진짜 지옥인 것이다.
<신곡>은 대체로 기독교적 가치에 준해 그려졌으므로 11곡에는 나와 같은 무신론자가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나로 말하자면 한때 자발적 기독교 신자였으나 또한 자발적으로 교회를 뛰쳐나온 사람이기도 하다. 교회가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무언지조차 몰랐던 나의 할머니나 우리 조상들은 다 지옥에 가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교회가 해준 답은 “네가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라.”였다. 논리적이지 않으면 납득을 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6학년의 가슴에 불신을 심어준 교회가 싫었다. 예수님이라면 다르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나왔다. 지금은 ‘한국 개신교 교회’의 타락상이 싫어 거의 반기독교인이 되다시피 했지만 나의 신앙 역사는 그러했다. 지옥에 가고 싶지야 않지만 그렇다고 교회를 다니고 싶지도 않으니 어쩐다?
이간질한 자들의 지옥도 재미있다. 자기 머리를 들고 다닌다고 한다. 부끄러워 하라는 뜻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피에 삶아지는 지옥’에 들어야 하는 폭군들에게 신곡을 읽히고 싶다. 어느 정치인도 자신이 폭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히틀러를 경배하지 말라, 그는 악마다, 라고 말하는 독일인을 보면서 우리의 박정희를 떠올리면서 어디까지를 폭군으로 규정해야 할까를 생각해 본적이 있다. 대개 박정희를 경배하는 이들 중 히틀러를 추앙하는 자가 나온다. 물론 박정희를 좋아하지만 히틀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 둘은 정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맞다. 수백만을 죽인 자와 박정희는 다르겠지. 그러나 정도는 다를지언정 독재자는 독재자, 폭군은 폭군이다. 미화는 금물이다.
무엇보다 가장 ‘지옥스러운’ 지옥은 34곡에 등장하는 ‘배신의 지옥’이다. 가끔 고민한다. 사랑이 더 중한가, 믿음이 더 중한가? 모든 이가 모든 이를 사랑하며 살 수는 없다. 내가 한 생을 잘 살아내고 싶어 몸부림을 쳐도 모든 이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믿음은? 그저 한 개인에 대한 믿음이든, 그것이 사랑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을 어찌 용납할까 싶다. 그래서 그것은 ‘배신(背信)’이다. 사랑보다 뿌리 깊은 믿음을 저버리는 일.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추며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이를 배신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것이 유대 민족을 살리는 일이라고. 그것이 스스로 의식한 것이든 아니든, 잘못된 ‘인식’이든 결국은 배신이다. 가장 멀고도 깊은 지옥에는 배신자들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