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은 묘하게 매력적이고 묘하게 힘든 일인 것 같다. 광고와 여성지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다. 더러는 대학 때 누구보다 멋진 시를 쓰던 이들... 만약 시인이 되었다면 한없이 드높은 곳에 빛났을지도 모를 그 무엇을, 아니 빛나지 않았더라고 고귀함을 간직했을 그들이 자본주의의 네온사인 앞에 자신의 빛을 보탬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거기에 녹여 없애버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기도 하다.

 

박웅현에게는 드높은 무언가가 있다. 시적 감성도 있고 인문학적 소양도 있다.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진정성도, 예술성도 있다. 그런데 그는 시인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고 광고인이 되었다. 광고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적인 가치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술적이어야 함에도 상업성이 예술성에 승하는 분야인 것도 사실이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했던가. 어차피 광고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아무리 의식있고 철학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본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웅현이 만든 삼성 광고를 보면서 그의 인문학적 소양의 범위를 가늠해 본다. 아무리 아니라고는 해도 세상은 일등만을 기억한다는 광고의 파장은 컸다. 그것이 이끌어낸 성장 제일주의의 폐해를 예측하지도 못했고 의도하지도 못했다고 한다면 박웅현답지 않다. 그렇게 영민한 사람이 그걸 몰랐을까?

그러고 보니 김정운 이후 나는 요즘 좀 까칠한 것 같다. 재능은 분명 세상을 위한 축복인데 재능이 무의식을 만나면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낳는지 아는 까닭에 좀 까칠해지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박웅현이 공동체에 해악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아까워서 하는 소리다.

 

이 책에서 새삼스레 발견한 도종환의 시가 좋았다.  또 수험생 광고를 보다가 울컥했다. 지금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이 책을 읽던 시점 둘째가 고3이었고 수시에 떨어져 정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라는 멘션은 수험생 자신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이라면 참 성숙한 녀석이겠지만 기실은 어른들이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어차피 누군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수험의 세계가 비장하다. 그 한 복판에 내 새끼가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영웅입니다같은 광고는 (남 비교해서 좀 미안하지만) 이제현의 광고를 보았을 때의 감동이 있다. 인문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사회적 의미, 정치적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이다. 때로 정치색을 빼고 무색무취한 인문학 공부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껍질 직전의 속살만 알겨먹()자는 의도로 매우 얍삽한 자세라 생각한다. 박웅현이 감히 인문학 광고를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그와 같은 사회적 의식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좋은 광고 99개를 두고도 사람들이 삼성의 1등 광고를 자꾸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나머지 광고들의 의식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