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게 길을 묻다 - 트라우마를 넘어선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찾아서
고혜경 지음, 광주트라우마센터 기획 / 나무연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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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나 세월호는 마음에 새겨진 문신 같다. 책에서만 배운 4.19와는 또 다른 아픈 기억이다. 나는 중학교 때 소위 유언비어로 광주를 만났고 대학 1학년 때 사진전으로 광주를 만났다. 간접적인 경험이었지만 그 아픔은 역사적 유전자에 새겨져 버렸다. 아마도 세월호 사건과 더불어 죽을 때까지 이 각인을, 이 낙인을 풀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직접 겪은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 책은 직접 광주를 겪은 사람들의 꿈 분석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융의 꿈 분석심리학에 바탕을 둔 치료의식이자 사회적 기록이기도 하다.

 

고혜경은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베트남 참전용사라 써 붙인 노숙자가 없는 이유를 한국의 가족주의가 전쟁의 상흔을 가족 안에서 치유시켰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사회적으로 참전용사가 반사회적으로 인식된 미국과, 박정희 군부정권에 의해 칭송받았던 한국 사회의 차이도 있을 것 같다. 사회적 사고는 사회적 트라우마로 남지만 어떤 사회문화 속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현명하게 극복할 수도, 오히려 더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월남전 참전의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니겠지만)

 

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리 상태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래서 내 꿈을 되새겨 보는 일도, 남의 꿈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남의 꿈을 듣는다는 것은 가슴으로 듣는 것이어야 한단다. ‘내 꿈이라면’, ‘내가 상상해 본다면이런 마음으로 듣는다. 꿈을 해석해 주려거나 조언하려 들지 말라고 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대목 중이 이런 것이 있었다. 광주의 트라우마를 가진 내담자 중에는 꿈에 귀신을 자주 보는 이가 있었다. 심리학적으로 꿈에 나타나는 귀신은 내 안의 어떤 에너지, 한의 응어리 같은 것이라고 한다. 고혜경은 꿈 속 귀신에게 말을 걸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라 한다. 그러면 두려움이 순화된다고. 나는 귀신을 자주 보진 않지만 나쁜 남자에게 쫓기는 꿈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린아이를 자주 보곤 하는데 이 대목을 읽은 후 그들을 두려워하기보다 그들은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새벽마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을 곱새기는 시간을 꼭 갖는다. 그때마다 그들의 정체는 내 안의 무엇이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것이 공포든 불안이든 죄의식이든, 나의 것이기 때문에 모두 안쓰러운 것들이다.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 보인다. 어떤 것은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짊어지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그러니 꿈에 등장하는 무서운 존재들을 쫓아낼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광주를 겪은 이들, 세월호를 겪은 이들 앞에 나의 그림자는 새발의 피일 뿐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지난일로 치부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광주의 묻힌 이야기들을 들춰 다 들어줘야 한다.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이들은 지금에라도 감옥에 가야 한다.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의 억울함은 이미 이생에서 도저히 풀 수 없는 것일지 모르더라도, 적어도 그 시신을 찾아 해원하고 그 원혼에게 세상의 미안함을 충분히 보이는 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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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정반대의 행복 - 너를 만나 시작된 어쿠스틱 라이프
난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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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의 어쿠스틱 라이프를 너무너무(너무는 부정적 부사라고 하지만 매우, 정말, 진짜, 그 무엇보다도 이 부사가 가장 적절할 때가 있다) 좋아한다. 만화를 보는 내내 꽉 차게 행복했다. 아껴 읽었다.

 

그래서 난다의 다른 작품을 찾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아이들이 다 커버려 내게 실용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육아일기지만 이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유모차 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장애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목숨 걸고 고속버스에 탑승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싸우고 소리 높이는지. 나의 이동이 제한되기 시작하면서 간신히 이해하게 된 내 좁은 시야가 창피했다.

 

아이를 키우며 아이의 그럴 수밖에 없는특성을 알게 된 뒤에야 다른 약한 존재에게도 관대해졌다.

 

그렇다, 엄마가 된다는 일이 공로를 인정받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사람을 잘 키워내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 그리고 나 자신. 아기를 키우면서 인간으로 내가 성숙해가는 경험을 한다. 수많은 인내해야 할 일들을 겪으면서, 한없이 약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지면서 말이다. 나는 그 경험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연약한 존재들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가 누군가의 엄마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엄마가 되지 않은 사람은 그런 공감을 못하느냐고? 물론 아이를 간절히 원하고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엄마를 경험하는 일의 의미 깊고 신비로움을 논하는 것은 잔인한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엄마를 선택하고 스스로 기꺼이 그 어려움을 감당한 사람이 그 정도의 보람을 얻는 것이 그리 불공평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난다도 역시 아기를 통해 그런 시선의 확장을 경험한 것이다. 약자에 대한 공감, 장애인에 대한 공감, 어린 아이들의 말을 인내하고 들어줄 수 있는 어른스러움을 갖게 된다. 나는 그 대목이 가장 좋았다. 육아를 통한 엄마의 성숙, 육아의 고단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귀한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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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와요, 북유럽살롱 - 북유럽 사람들이 오늘도 행복한 이유, 궁금해요?
정민혜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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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여행을 가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들을 보고 있었다. 스웨덴 하지 축제 미드솜마리도 궁금하고 내가 좋아하는 달라하스트(말 목각인형)과 화관도 좋았지만 이 책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북유럽의 육아법이라는 얀테의 법칙이다. 아이들에게 저런 품성을 기르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배려와 존중의 교육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고슴도치들처럼 안에는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나만 최고인 양, 남을 공격할 무기로 온 몸을 두르고 사는(원래 내면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일수록 공격적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1.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2. 네가 다른 사람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3.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4.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자만하지 말라

5. 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6. 네가 다른 이들보다 더 중요할 거라 생각하지 말라

7. 네가 뭐든지 잘 할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

8.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라

9. 다른 사람이 너를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10.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

 

 

스웨덴의 음식물 쓰레기는 바이오가스로 재활용된다고 한다. 체온, 커피의 온기, 기차의 열기 등도 모두 에너지로 환원해 쓴단다. 생각할 게 많은 대목이다.

스웨덴에서는 부부에게 아이 한 명당 480일의 휴가를 주고 이중 390일 동안은 월 수입의 80%, 나머지 90일은 매월 30만원 정도 지급한단다. 1995년에는 아빠의 달을 만들어 아빠도 한달 이상 육아휴직을 쓰면 총 육아휴직 기간이 한 달 늘어난다. 남성 육아 60일은 의무사용 기간이다. 우리나라에도 아빠에게도 육아휴직을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하는 제도들이 들어와야 할 것이다. 육아의 부담을 나누는 것뿐 아니라 남녀의 평등한 육아부담을 위해서도 꼭 필요할 것이다.

 

북유럽이 지상낙원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유럽이 궁금하고 부러울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가서 살고 싶은가?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을 거닐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반나절 이상, 저 돌 건물에서 1년을, 혹은 평생을 살 수 있겠는가, 하고.

그저 피안의 세계일 때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K팝 때문에 한국을 동경하는 서구인 이야기를 들을 때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지옥이고 현실인데 그곳을 환상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나의 환상은 또 다른 지옥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그 부러움에서 배울 점을 찾아본다면 감성과 영혼은 하늘을 날지라도 내 발은 땅을 디디리라. 북유럽은 분명 제 3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이 따라 하려 들면 귤이 탱자가 되겠지만 분명 우리에게 맞는 다른 모델로의 전용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자전거를 타고 쓰레기를 줄이고 육아를 세계가 함께 책임지는, 매뉴얼과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지만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그런 세상. 많은 세금을 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공정하게 집행되는 복지, 그로 인해 누구나 인간적인 존엄을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이제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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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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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7년 나의 올해의 책이다. 리베카 솔릿의 문장에 매료되었다. 정희진의 매력과 어딘가 닮았다. 정희진이 리베카 솔릿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 두 사람은 문체가 전혀 다르(정희진이 좀더 뾰족하다)지만 문제의식에 더해진 감수성, 자기만의 독특한 표현의 세계가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둘이 만난다면 서로를 경애할 것 같다.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의도해서라기보다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갖다 보니,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회의 부조리함에 눈 돌리다 보니, 도대체 이 불평등하고 평화롭지 못한 세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분노하다보니 자연스레 거기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문장아름다운 글들이 주는 허망함을 잘 안다. 정말 좋은 글은 꽉 찬 느낌이 든다. 진정성으로. 진정성, 그게 뭐냐고?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고?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냥 그건 느껴지는 것인데, 아마도 그걸 느낀 사람들이 많다면 그 글은 확장되고 움직여 세상을 바꿀 것이다. 리베카 솔릿의 글에는 그런 게 있다.

 

그런 것을 떠나서도 그의 문장은 참 정연하고 아름답다. 오죽하면 내가 이 책의 영어본을 샀을까.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대개 영어가 고향이 아닌 경우가 많다. 다시 원어로 읽고 싶어도 불어가 약해 <어린왕자>, 독어를 전혀 몰라 <데미안>, 스페인어 때문에 <바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없거나 영어로 중역된 것을 보면서 찜찜해 해야 했는데 이 책을 만나서 참 좋았다. 정말 좋은 글을 만났는데 떠듬떠듬이라도 읽을 수 있는 외국어로 쓰인 글이니. 원어민은 영어로 도대체 뭐라고 썼는지, 과연 번역된 책만큼 원어도 아름다운지 확인할 수 있으니.

 

물론 책 한권을 통째로 읽기엔 분량이 너무 많다. 이 책은 참으로 정직하게도 가벼운 재생지에 아주 빽빽한 내용이 담겨있다. 요즘 나오는 책들로 따지면 2,3권 분량 정도 된다. 읽는데 오래 걸리지만 마치 고전을 읽을 때처럼 한 권을 다 읽었다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게 꽉 찬 책이다. 그런 책을 영어도 약한 내가 무슨 수로 한 권을 다 읽으랴? 나는 그저 좋았던 문장이 뭐라고 쓰여 있는지 찾아 읽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밤마다 한 페이지 혹은 반 페이지 정도, 영어 사전 찾을 것도 없이 그저 읽고, 해석이 막히면 그냥 한국어판으로도 또 읽고 그런다. 좋다. 문학적으로도 좋다. 공부라서도 좋고 그냥 글 자체가 주는 재미만으로도 좋다.

 

그의 글이 힘을 갖는 것은 사유한 만큼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온 그의 삶 덕분이다. 그 역시 여성 혼자 험한 길을 걷는 일에 두려움을 가졌음을 솔직히 고백하지만, 그래서 밤길, 혼자 걷는 길을 포기한 나 같은 사람 대신 그는 늘 길을 걸어다녔다. 그는 걷는 일이 단지 산책을 즐기는일이 아니라 길은 모두의 것이라는 명제(자연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라는 명제와 닮았다. 어딘가 아나키하기도 하고 매우 사회주의적인 발언이기도 하다)를 몸으로 실천하는 일임을 말한다. 광장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 걷는 것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많은 일이 있음을 온몸으로 선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녀서 거리에 나간다는 일은 격렬한 투쟁과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라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일인 줄로만 아는 우리 세대에게 미국이나 유럽의 피켓시위는 가소로워보였었다. 저런 것도 투쟁이라 할 수 있겠나 싶어서. 그러나 그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만나고 배운다는 것을 이제 나도 조금씩 깨닫는다. 지난 겨울 수백만 사람들과 함께 했던 광화문 광장의 촛불, 엄마를 뺀 우리 집 식구들 모두, 어린 조카까지 다같이 함께 했던 그 겨울광장의 걷기의 경험은 작은 발걸음이나 즐거운 도보로도 어떻게 연대가 가능한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지 않았는가. 리베카 솔릿은 정신차리라고 야단치지도, 평화를 깨는 자들에게 힐난을 던지지도 않는다. 함께 걷자고 하는 말 무미건조하게 던지지도 않는다. 스스로 걸어본 자, 스스로 핵실험장 사막에 누워본 자로서의 경험과 진정성으로 조근조근 권유한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문체로.

 

 

1980년에 반핵 활동가가 된 나는 봄이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네바다 핵실험장에 갔다. 면적이 로드아일랜드 정도 되는, 네바다 남부의 미국에너지부 소유 부지에서 미국은 1951년부터 지금까지 1000개 이상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핵무기가 캠페인, 출판활동, 로비 활동으로 막아내야 하는 단순한 숫자(예산 액수, 폐기물 처리 비용, 잠재적 사상자 규모)로 보일 때가 있었다. 군비경쟁과 저항 둘 다 관료주의적 추상성으로 흐르면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란 살아 있는 몸이 부서지고, 살아가는 곳이 망가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핵실험장에서는 달랐다. 아름다운 사막을 배경으로 대량 학살 무기들이 계속 폭발하는 봄이 오면, 우리는 한두 주씩 근처에 가서 야영을 했다. 우리는 추상적 숫자를 뚫고 나온 사람들 이었다. 추상적 숫자 너머에 장소와 품격과 행동과 감각의 현실이 있었다. 수갑과 불편과 먼지와 더위와 갈증과 방사능 위험과 방사능 희생자 증언도 현실이었지만, 눈부신 사막의 빛도 현실이었고, 탁 트인 지평의 자유로움도 현실이었고, 핵폭탄으로 세계사를 쓰면 안 된다는 우리의 믿음을 공유하는 수천 명이 운집한 감동적인 장면도 현실이었다. 우리 몸이 우리 신념의 증거가 되었고 사막의 격한 아름다움의 증거가 되었고 가까이에서 세계 종말을 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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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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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파스칼 키냐르를 그만 읽어야겠다.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은 이후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신비한 결속>을 읽었다. 영화로 나온 <세상의 모든 아침>도 보았다.

처음 <세상>을 보았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한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프랑스의 어느 시골의 느낌은 지금까지 읽은 모든 그의 작품에서 변하지 않고 살아 숨 쉰다. 거기에 등장인물들의 깊은 생각에 빠진 이마들이 있고 슬픔의 향기가 묻어 있는 언어 혹은 음악이 같이 있다. 그렇게 공통된 어떤 아우라가 있으면서도 작품들은 다 달랐다. 그러나, 이제는 그만 읽을까 한다.

 

프랑스와 프랑스 문학이 가지고 있는 그 단단한 기품의 정체가 무얼까 자주 생각한다. 남다른, 콧대 높은, 생각이 많은, 그것이 철학이 되어 바탕을 이루는, 그 위에 예술이 싹트고 자라나는, 자본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있는, 그런 느낌을 빅토르 위고나 에밀 졸라에서도 파스칼 키냐르에서도, 여러 프랑스 영화들에서도 느낀다. 여러 차례의 혁명을 거친 자부심에 기인한 것도 있을 것이고 오랜 역사와 사회적 분위기에 뿌리를 두었으면서도 개별이 존중받는 문화 역시 그런 예술적 성취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여러 결실 중 하나가 파스칼 키냐르이다.

 

하지만 <신비한 결속>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놓지 않았던 경탄의 끈이 의구심으로 바뀌는 순간이 왔다. 어쩌면 질시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누리는 고차원의 문화적 수준, 아무리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흉내 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런 의구심이 단지 부러움에 그친다면, 러시아의 혁명 전 귀족들이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고 요즘도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를 배우려 든다더라, 일본에서 프랑스 문화를 동경한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비웃었던 나도 결국은 같은 부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좀 든다.

 

파스칼 키냐르는 어떻게 그렇게 높은 차원의 문학과 음악의 세계에서 살 수 있었을까?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작품 속 주인공들, <세상..>의 콜롱브 선생, <신비한 결속>의 클레르, 그리고 <빌라..>의 안, 세상의 이목과 물질적 풍요와 안락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의, 자연과 영성에 다가가는 높은 예술성들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그것들은 결코 키냐르 개인의 성취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마음이 씁쓸해진다. 프랑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과 부의 바탕에는 제국의 피가 흐른다. 그것들이 없이 프랑스의 문화적 고양이 가능했을까. 파스칼 키냐르는,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고개를 젓고 싶겠지만 말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치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가슴이 아리다. 그런 물적 토대가 없어서 이룬 것이 별로 없는 우리 같은 주변국의 상대적 열패감에, 정신적으로 사랑하던 존재의 위선과 가면을 벗기고 본질을 봐야 하는 아픔까지.

 

안은 마침 죽음을 맞이하듯 세상 모두를 청산하고 훌훌 떠나버린다. 만약 안이 아닌 다른 보통 사람들도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삶으로의 완벽한 전환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택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안이 조금은 부러웠다.

누구나 한번쯤 다른삶을 꿈꾸어 본다. 농담 삼아서라도 이번 생은 틀렸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볼 테다,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안은 그걸 해낸 거다. 물론 작곡가로서의 삶은 그대로 유지했으며, 그가 선택한 또 다른 삶의 대가는 치열한 외로움이었다는 점에서 세속적인 관점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선택이긴 했다. 안으로서는 그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부럽다고 표현하기에는 그녀의 삶은 너무 힘겨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의 까칠한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안에게는 집이 참으로 많구나, 그 모든 집들(남자친구와 살던 집,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싫어서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날 때 처분할 재산들이 꽤나 많구나, 싶어서. 그의 선택은 그야말로 선택받은 자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어지간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있기에 안의 탈태와 전이와 여행과 전환은 가능했던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끼어들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안의 삶에 대해서보다 안에게 어른거리는 키냐르를 자꾸 생각했다. 안은 키냐르의 아니마이다. 돌아보니 <신비한 결속>의 여주인공 클레르에게서도 키냐르의 그림자를 보았다. 남자인 저자가 어떻게 이렇게 여자의 정신세계를, 마치 자기 이야기하듯 섬세하고 정확하게 그렸을까를 감탄하며 읽다가 닿은 생각이다. 물리적인 몸의 성별과 사회적 성, 그리고 정신적 영역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사회적 젠더가 강요하는 그런 구분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진정 인간으로서 자유로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키냐르는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제국의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키냐르의 자유로운 영혼과 그 성과들을 오래오래 사랑했을 것 같다.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명령하지 않았다.

 

무중력 상태가 찾아왔다. 육체가 자신에게서 살짝 떠나는 야룻한 상태. 내면세계의 모든 것이 바싹 말라버리는 상태. 통찰려 혹은 무념무상이 두개골의 공간 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태.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그것이 덜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상태. 고통이 최소한 육체 자체보다 좀더 먼 곳에서 느껴지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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