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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17년 8월
평점 :
이 책은 2017년 나의 ‘올해의 책’이다. 리베카 솔릿의 문장에 매료되었다. 정희진의 매력과 어딘가 닮았다. 정희진이 리베카 솔릿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 두 사람은 문체가 전혀 다르(정희진이 좀더 뾰족하다)지만 문제의식에 더해진 감수성, 자기만의 독특한 표현의 세계가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둘이 만난다면 서로를 경애할 것 같다.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의도해서라기보다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갖다 보니,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회의 부조리함에 눈 돌리다 보니, 도대체 이 불평등하고 평화롭지 못한 세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분노하다보니 자연스레 거기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문장‘만’ 아름다운 글들이 주는 허망함을 잘 안다. 정말 좋은 글은 꽉 찬 느낌이 든다. 진정성으로. 진정성, 그게 뭐냐고?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고?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냥 그건 ‘느껴’지는 것인데, 아마도 그걸 느낀 사람들이 많다면 그 글은 확장되고 움직여 세상을 바꿀 것이다. 리베카 솔릿의 글에는 그런 게 있다.
그런 것을 떠나서도 그의 문장은 참 정연하고 아름답다. 오죽하면 내가 이 책의 영어본을 샀을까.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대개 영어가 고향이 아닌 경우가 많다. 다시 원어로 읽고 싶어도 불어가 약해 <어린왕자>를, 독어를 전혀 몰라 <데미안>을, 스페인어 때문에 <바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없거나 영어로 중역된 것을 보면서 찜찜해 해야 했는데 이 책을 만나서 참 좋았다. 정말 좋은 글을 만났는데 떠듬떠듬이라도 읽을 수 있는 외국어로 쓰인 글이니. 원어민은 영어로 도대체 뭐라고 썼는지, 과연 번역된 책만큼 원어도 아름다운지 확인할 수 있으니.
물론 책 한권을 통째로 읽기엔 분량이 너무 많다. 이 책은 참으로 정직하게도 가벼운 재생지에 아주 빽빽한 내용이 담겨있다. 요즘 나오는 책들로 따지면 2,3권 분량 정도 된다. 읽는데 오래 걸리지만 마치 고전을 읽을 때처럼 ‘한 권을 다 읽었다’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게 꽉 찬 책이다. 그런 책을 영어도 약한 내가 무슨 수로 한 권을 다 읽으랴? 나는 그저 좋았던 문장이 뭐라고 쓰여 있는지 찾아 읽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밤마다 한 페이지 혹은 반 페이지 정도, 영어 사전 찾을 것도 없이 그저 읽고, 해석이 막히면 그냥 한국어판으로도 또 읽고 그런다. 좋다. 문학적으로도 좋다. 공부라서도 좋고 그냥 글 자체가 주는 재미만으로도 좋다.
그의 글이 힘을 갖는 것은 사유한 만큼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온 그의 삶 덕분이다. 그 역시 여성 혼자 험한 길을 걷는 일에 두려움을 가졌음을 솔직히 고백하지만, 그래서 밤길, 혼자 걷는 길을 포기한 나 같은 사람 대신 그는 늘 길을 걸어다녔다. 그는 걷는 일이 단지 ‘산책을 즐기는’일이 아니라 ‘길은 모두의 것’이라는 명제(자연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라는 명제와 닮았다. 어딘가 아나키하기도 하고 매우 사회주의적인 발언이기도 하다)를 몸으로 실천하는 일임을 말한다. 광장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 걷는 것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많은 일이 있음을 온몸으로 선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녀서 ‘거리에 나간다’는 일은 격렬한 투쟁과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라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일인 줄로만 아는 우리 세대에게 미국이나 유럽의 피켓시위는 가소로워보였었다. 저런 것도 투쟁이라 할 수 있겠나 싶어서. 그러나 그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만나고 배운다는 것을 이제 나도 조금씩 깨닫는다. 지난 겨울 수백만 사람들과 함께 했던 광화문 광장의 촛불, 엄마를 뺀 우리 집 식구들 모두, 어린 조카까지 다같이 함께 했던 그 겨울광장의 걷기의 경험은 작은 발걸음이나 즐거운 도보로도 어떻게 연대가 가능한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지 않았는가. 리베카 솔릿은 정신차리라고 야단치지도, 평화를 깨는 자들에게 힐난을 던지지도 않는다. 함께 걷자고 하는 말 무미건조하게 던지지도 않는다. 스스로 걸어본 자, 스스로 핵실험장 사막에 누워본 자로서의 경험과 진정성으로 조근조근 권유한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문체로.
1980년에 반핵 활동가가 된 나는 봄이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네바다 핵실험장에 갔다. 면적이 로드아일랜드 정도 되는, 네바다 남부의 미국에너지부 소유 부지에서 미국은 1951년부터 지금까지 1000개 이상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핵무기가 캠페인, 출판활동, 로비 활동으로 막아내야 하는 단순한 숫자(예산 액수, 폐기물 처리 비용, 잠재적 사상자 규모)로 보일 때가 있었다. 군비경쟁과 저항 둘 다 관료주의적 추상성으로 흐르면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란 살아 있는 몸이 부서지고, 살아가는 곳이 망가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핵실험장에서는 달랐다. 아름다운 사막을 배경으로 대량 학살 무기들이 계속 폭발하는 봄이 오면, 우리는 한두 주씩 근처에 가서 야영을 했다. 우리는 추상적 숫자를 뚫고 나온 사람들 이었다. 추상적 숫자 너머에 장소와 품격과 행동과 감각의 현실이 있었다. 수갑과 불편과 먼지와 더위와 갈증과 방사능 위험과 방사능 희생자 증언도 현실이었지만, 눈부신 사막의 빛도 현실이었고, 탁 트인 지평의 자유로움도 현실이었고, 핵폭탄으로 세계사를 쓰면 안 된다는 우리의 믿음을 공유하는 수천 명이 운집한 감동적인 장면도 현실이었다. 우리 몸이 우리 신념의 증거가 되었고 사막의 격한 아름다움의 증거가 되었고 가까이에서 세계 종말을 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