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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평점 :
이제 파스칼 키냐르를 그만 읽어야겠다.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은 이후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과 <신비한 결속>을 읽었다. 영화로 나온 <세상의 모든 아침>도 보았다.
처음 <세상>을 보았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한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프랑스의 어느 시골의 느낌은 지금까지 읽은 모든 그의 작품에서 변하지 않고 살아 숨 쉰다. 거기에 등장인물들의 깊은 생각에 빠진 이마들이 있고 슬픔의 향기가 묻어 있는 언어 혹은 음악이 같이 있다. 그렇게 공통된 어떤 아우라가 있으면서도 작품들은 다 달랐다. 그러나, 이제는 그만 읽을까 한다.
‘프랑스’와 프랑스 문학이 가지고 있는 그 단단한 기품의 정체가 무얼까 자주 생각한다. 남다른, 콧대 높은, 생각이 많은, 그것이 철학이 되어 바탕을 이루는, 그 위에 예술이 싹트고 자라나는, 자본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있는, 그런 느낌을 빅토르 위고나 에밀 졸라에서도 파스칼 키냐르에서도, 여러 프랑스 영화들에서도 느낀다. 여러 차례의 혁명을 거친 자부심에 기인한 것도 있을 것이고 오랜 역사와 사회적 분위기에 뿌리를 두었으면서도 개별이 존중받는 문화 역시 그런 예술적 성취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여러 결실 중 하나가 파스칼 키냐르이다.
하지만 <신비한 결속>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놓지 않았던 경탄의 끈이 의구심으로 바뀌는 순간이 왔다. 어쩌면 질시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누리는 고차원의 문화적 수준, 아무리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흉내 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런 의구심이 단지 부러움에 그친다면, 러시아의 혁명 전 귀족들이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고 요즘도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를 배우려 든다더라, 일본에서 프랑스 문화를 동경한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비웃었던 나도 결국은 같은 부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좀 든다.
파스칼 키냐르는 어떻게 그렇게 높은 차원의 문학과 음악의 세계에서 살 수 있었을까?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작품 속 주인공들, <세상..>의 콜롱브 선생, <신비한 결속>의 클레르, 그리고 <빌라..>의 안, 세상의 이목과 물질적 풍요와 안락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의, 자연과 영성에 다가가는 높은 예술성들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그것들은 결코 키냐르 개인의 성취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마음이 씁쓸해진다. 프랑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과 부의 바탕에는 제국의 피가 흐른다. 그것들이 없이 프랑스의 문화적 고양이 가능했을까. 파스칼 키냐르는,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고개를 젓고 싶겠지만 말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치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가슴이 아리다. 그런 물적 토대가 없어서 이룬 것이 별로 없는 우리 같은 주변국의 상대적 열패감에, 정신적으로 사랑하던 존재의 위선과 가면을 벗기고 본질을 봐야 하는 아픔까지.
안은 마침 죽음을 맞이하듯 세상 모두를 청산하고 훌훌 떠나버린다. 만약 안이 아닌 다른 보통 사람들도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삶으로의 완벽한 전환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택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안이 조금은 부러웠다.
누구나 한번쯤 ‘다른’ 삶을 꿈꾸어 본다. 농담 삼아서라도 이번 생은 틀렸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볼 테다,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안은 그걸 해낸 거다. 물론 작곡가로서의 삶은 그대로 유지했으며, 그가 선택한 또 다른 삶의 대가는 치열한 외로움이었다는 점에서 세속적인 관점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선택이긴 했다. 안으로서는 그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부럽다’고 표현하기에는 그녀의 삶은 너무 힘겨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의 까칠한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안에게는 집이 참으로 많구나, 그 모든 집들(남자친구와 살던 집,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싫어서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날 때 처분할 재산들이 꽤나 많구나, 싶어서. 그의 선택은 그야말로 선택받은 자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어지간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있기에 안의 탈태와 전이와 여행과 전환은 가능했던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끼어들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안의 삶에 대해서보다 안에게 어른거리는 키냐르를 자꾸 생각했다. 안은 키냐르의 아니마이다. 돌아보니 <신비한 결속>의 여주인공 클레르에게서도 키냐르의 그림자를 보았다. 남자인 저자가 어떻게 이렇게 여자의 정신세계를, 마치 자기 이야기하듯 섬세하고 정확하게 그렸을까를 감탄하며 읽다가 닿은 생각이다. 물리적인 몸의 성별과 사회적 성, 그리고 정신적 영역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사회적 젠더가 강요하는 그런 구분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진정 인간으로서 자유로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키냐르는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제국의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키냐르의 자유로운 영혼과 그 성과들을 오래오래 사랑했을 것 같다.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명령하지 않았다.
무중력 상태가 찾아왔다. 육체가 자신에게서 살짝 떠나는 야룻한 상태. 내면세계의 모든 것이 바싹 말라버리는 상태. 통찰려 혹은 무념무상이 두개골의 공간 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태.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그것이 덜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상태. 고통이 최소한 육체 자체보다 좀더 먼 곳에서 느껴지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