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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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집을 고르는 방법은, 서점에 가서 제목을 보고 맘에 들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고 마음을 찌르는 귀절이 하나라도 있으면 산다, 이다. 거기서 합격해서 이 시집을 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집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 있다 또 비슷이 한 권을 더 사놓고는 아무 사람에게 그냥 주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쩌다 마냥 사랑하는 무엇이 생겼을 것이다. 한없이 밑줄 긋고, 간지에까지 하염없이 끄적거렸을 것이다. 사랑하는 무엇을 위해 간지에 쓴 나의 시를 찢어 건네다 못해 아예 그 시집을 주어버리고 왔을 것이다.

떠나와서, 떠오르지 않는 시,

그대 품은 너무 깊어 나는 거기 흐를 수 없었네 - 강가에서1

이런 귀절이 그리워 한 권을 더 샀을 것이다. 뭔가 두려워 수많은 시들 접지도 못하고 흐린 연필로 눈에 안 띌 밑줄만 그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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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야 날이 저문다
김용택 지음 / 열림원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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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 차례 지고나는 일에 목이 메일 시인
마음 갈 데 없어 마음이 무거워 마음의 끝을 보며 한없이 걸었을 시인
잠들다 눈 뜨면 금간 벽 틈으로 새벽별 하나와 물끄러미 눈 맞추던 시인
밤새 사랑하는 이 창문 앞에서 서성이다 발자국과 더 깊고, 더 춥던 흔적만 남기고 가 버린 시인,
저문 길 하얗게 비질하여 비워두고 정자나무 그늘에 꽃등 들고 밤새워 님 기다리던 시인.

빈 자리마다 서툰 시 따라 따라 끄적이게 하던 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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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133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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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책이 처음이었으리라. 28살 즈음에 아마도 이 심상치 않은 제목이 나를 끌었을 것 같다. 시인들은 가끔 자기의 죽음조차도 멀찌감치 떨어져 이렇게 한 번 바라보는 습관들이 있나보다. 세월 가고, 잡초 푸르러진 자기 무덤을 바라보며 시인의 넋은 조금 시니컬해져 있으리라. 살았을 적 아팠던 일들도 그저 한갓진 추억이 되었으리라.

스물 여덟 즈음,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던 일을 접고 사랑하던 바닷가를 떠나야 했던 때였을 것이다. 세상이 차라리 날보고 망가져 버리라 하는 것처럼 느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최승자의 시집, 슬픔으로 슬픔을, 절망으로 절망을 갈아엎는 그녀의 시집들을 부둥켜 안고 그녀를 애인 삼았더랬으리라.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너에게

흐린 날엔 골 뚜껑을 닫아라.
그 위에 굵은 대목을 꽝꽝 박아라.
...

그저 화면 자체의
희뿌연 빛으로만 빛나게 하라. - 흐린 날

완벽한 절망이 아니고는 쓰지 못할 시들.
그녀의 시를 만난 지 10년에 가까와 가지만 더 이상 그녀의 시들을 펼쳐도 되지 않는 세월들이 쌓여가는 것이 내가 조금은 평안해졌다는 증거이려나.

그러나 내 마음 거기 깊은 곳에 아직 회오리치고 있는, 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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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역사 인물 찾기 2
카테리네 크라머 지음, 이순례.최영진 옮김 / 실천문학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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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이다. 하지만 자주 보는 책이기도 하다. 많이 낡았다.글보다 케테 콜비츠의 판화들을 다시 여러번 펼쳐본다. 무겁고 슬프다. 그림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몇 안 되는 그림들이다.

그녀가 미술학교를 다닐 때 그녀의 선생이 소묘솜씨를 비판했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그림이 기교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혼이 실린 것들이 다 그렇지 않은가. 서툴어도, 서툴수록 마음을 흔드는 그 무엇. 그게 있다. 그녀가 여자였고, 몇 안되는 판화가였고, 정치의식을 예술에 잘 녹여냈고, 그리하여 예술의 실용적 측면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고... 그런 모든 것들이 나의 마음을 잡아 끌지만 한가지 더 공감을 가질 수 있는 요소가 있다.

그녀는 미술을 늦게 시작하였고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교수에게 소묘 솜씨에 대한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회화가 아닌 판화에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면서도 가장 잘해낼 수 있는 출구를 찾아냈다. 만세! 그런 인생이고 싶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서 더 멋진 것을 찾아내는 그런 인생, 자신의 슬픔을 원동력으로 삼아 더 강해질 수 있는 인생, 그리하여 아름다울 수 있는 인생, 그것으로 많은 이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인생, 그것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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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고향
신영훈 글, 김대벽 사진 / 대원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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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사진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샀다. 글이 풍기는 냄새도 사진과 별 다르지 않았다. 어느 흐린 날 - 그런 날이라야 냄새도 눅진하니 땅으로 기어 더 깊이 퍼진다 - 삭정이와 마른 나뭇잎 모아 태우는 냄새 같은 것. 사진 속의 손으로 빚은 징검다리, 휘어진 나무 줄기를 그대로 기둥으로 삼은 어느 부엌 뒤, 뒤란으로 향한 작은 문을 열면 뒷담장과 문 사이 작은 공간에 툭툭 떨어지는 감꽃. 어린 시절 분명 어딘가에서 보았을 터이다, 그런 풍경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꼬맹이 시절에 충청도 깡촌에 있는 시골집을 찾아 버스도 없는 길을 걸어들어갈 때, 어디선가 분명 이 장면들을 본 듯한 낯익음을 느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어린시절이었을까, 아님 전생이었을까.

혹시 그런 인연을 사진으로나마 다시 만날까 하여 군침을 흘리면서 책을 들여다 보고 저 뒷뜰 그늘에 뭔가 있을 것만 같은 집 그림은 스케치로 옮겨도 보았다. 경복궁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꽃담 무늬를 스케치해 보아라, 시켜놓고 정작은 나자신도 거의 처음으로 찬찬히 그 무늬들을 살폈다. 닮았어도 어느 하나도 똑같지 않은 단아하면서도 귀여운 무늬들을 놓은 사람들은 담장을 짓는 동안만이라도 그 안에 들어 살 사람들의 혼이 되어보았나보다. 참 재미있었겠다. 내 살 집 담장, 돌 주워다 흙개어다 지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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