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 책이 처음이었으리라. 28살 즈음에 아마도 이 심상치 않은 제목이 나를 끌었을 것 같다. 시인들은 가끔 자기의 죽음조차도 멀찌감치 떨어져 이렇게 한 번 바라보는 습관들이 있나보다. 세월 가고, 잡초 푸르러진 자기 무덤을 바라보며 시인의 넋은 조금 시니컬해져 있으리라. 살았을 적 아팠던 일들도 그저 한갓진 추억이 되었으리라.스물 여덟 즈음,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던 일을 접고 사랑하던 바닷가를 떠나야 했던 때였을 것이다. 세상이 차라리 날보고 망가져 버리라 하는 것처럼 느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최승자의 시집, 슬픔으로 슬픔을, 절망으로 절망을 갈아엎는 그녀의 시집들을 부둥켜 안고 그녀를 애인 삼았더랬으리라.네가 왔으면 좋겠다.나는 치명적이다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내 목숨밖에는. -너에게흐린 날엔 골 뚜껑을 닫아라.그 위에 굵은 대목을 꽝꽝 박아라....그저 화면 자체의 희뿌연 빛으로만 빛나게 하라. - 흐린 날완벽한 절망이 아니고는 쓰지 못할 시들. 그녀의 시를 만난 지 10년에 가까와 가지만 더 이상 그녀의 시들을 펼쳐도 되지 않는 세월들이 쌓여가는 것이 내가 조금은 평안해졌다는 증거이려나. 그러나 내 마음 거기 깊은 곳에 아직 회오리치고 있는, 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