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 연구 - 상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1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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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양이 나온 영화 '유리'를 본 게 언제였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 영화도 나름대로 잘 만들어진 것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이 이 책을 읽으며 받은 분위기와 매우 흡사하구나. 박신양을 고른 것도 잘된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상권 부분을 영화로 만든 그 '유리'는 참 핍진한 상태에서 만들었다는 느낌을 지금도 떨칠 수가 없다. 영화를 보면서는 그것이 이 소설을 영화화한 것임을 몰랐고 구도를 말하는 영화라기보다 젊은 날의 한 생각 많고 마음 속 몸 속이 번잡한 견딜 수 없는 젊은이의 모습 - 일부는 나의, 당신의, 그의 젊은 열정과 궁금과 욕망과 번뇌를 닮은 - 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보니 그저 작품을 그대로 옮기려 몸부림을 쳤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박신양은 괜찮았지만 이름을 기억 못하는 촛불중과 수도부 역의 배우들, 그들의 추운 연기는 계산된 것이 아니라면 참 거북했다. 그래서 내 일기장에는 이 영화에 대해 어설픈 사춘기의 뭐 어쩌구 이런 식의 낙서가 적혀 있는 걸로 기억한다.

박상륭의 소설을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어렵게 쓰여진 것들은 십중 팔구 가짜라고 굳게 믿는 나로서는 철학과에 다니는 제자가 이 책을 사달라 했을 때 사춘기적 지적 허영과 객기에서 못 벗어난 줄 알고 조금 걱정을 했었다. 그 아이가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었으리라 믿고 잠시나마 그리 생각했던 것 미안함을 전한다.

솔직히 상권을 읽으면서 긴 시간을 잡아 먹어 가며, 무슨 철학책을 읽는 줄 오해를 받아가며 오래오래 이 책을 품고 다닌 나 스스로가 좀 짜증나기도 했었다. 영화 속 촛불중의 좀 역한 연기 탓에 ~입지, 하는 말투는 견디기 힘들었고 살해와 낮잡한 성이 구도의 길로 '미화'되는 것인지 어떤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박상륭 식의, 일종의 시 같은(그러니까 말하자면 시적 허용 비슷하군) 그 문체의 아름다움이 죽어 쓰러진 '나'의 주검을 안고 부르는 수도부의 노래에서 극에 달하고, 하염없이 유리를 찾아 헤매이고 유리 안에서 또 찾아 헤매이는 그 황량함의 이미지가 또한 아름답고, 책 한 권에 걸친 피곤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헤맴 뒤에 찾은 '읍내'의 현실적 느낌과 풍경이 너무 안온해서 상권 뒤쪽 쯤 가서는 갑자기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불승으로 등장하지만 예수의 행각을 하며 성경에 대해 설파한다. 그 대목에서는 다시 한번, 처음부터 꼼꼼히 성경을 읽고 싶어졌다. '나'의 설파에 숱한 부분을 공감하기에도 그랬고, 정말 오랜만에 어린 시절 사랑하는 맘으로 읽었던 성경에 대해 이토록 오래 말하는 자리가 있었던가 싶어 향수에도 젖었다.

뭐랄까, 그의 낯선 문체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대학 때 한 사랑하는 친구와 너무 다른 어휘를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절망했던 적이 있었다.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썼던 그와 나는 결국 부부가 되어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면서 손짓 하나조차 읽어낼 사이가 되었지만, 사랑하는데 전혀 다른 말을 지껄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애증이 교차했던 스무살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그 때, 비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쓰고 있지만 그의 영혼만은 하염없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용서했듯이, 박상륭의 이상한 문체는 혹 세상에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이해해주지 않는 특이한 어법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깊이가 얕아지는 것은 아니며 그의 영혼의 번뇌가 가벼운 것도 아님을, 혹시 이해는 못하더라도 그를 깎아내려서는 안되는 일임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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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왕자 -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1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1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지만 옮김, 레인레이 그림 / 마루벌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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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왕자였던 그가, 보석과 금박으로 뒤덮였던 그가, 죽어 동상이 되지 않았더라면 죽는 날까지 호사를 누리고 살았을 그가, 누더기가 되고 납심장 조각으로 남고서야 비로소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는 세상이 혹은 하느님이 참 공평하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자기도 모르게 높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곱게 살아가 고통과 번뇌의 통과의례를 본의 아니게 '못' 겪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 인생이란 게 고통받고 고생하고, 특히 고뇌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점수를 더 주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실지로 그렇지 못하여 참으로 통탄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왕자'는 그래서 참으로 사랑스럽다. 어쩌면, 동상이 되어 높은 곳에 서 있으니 사람들의 고통이 보여 견딜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 높은 곳에서도 여전히 철딱서니 없이 또 한 세월을 보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가 마음 아플 수 있었던 맑고 천진한 마음에 충분히 경의를 보낸다. 그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질과 순탄, 혹은 고난의 인생길 그 어떤 운명이든 그것에 상관없이 남의 고통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리고 안아주고 해결해 줄 수 있는 고상한 천성이란 것이 분명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제비'처럼 괜찮은 친구들 만나게 되면 더더욱 빛을 발하리라. 만나서 함께 더욱 더 맑아지고 더욱 더 힘이 나고 더욱 더 실효성이 높아지는, 하나 더하기 하나이되 둘 이상이 되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친구이리라.

내가 마루벌의 이 책을 산 것은 순전히 그림 때문이었다. 이렇게 글자가 많은 그림책은 이미 초등학생인 큰 아이를 위해 사는 것이므로 번역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번역에서 하자를 발견하지 못했고, 혹여 부족한 점이 있었더라도 제인 레어의 아름답기 짝이 없는 그림 때문에 다 용서가 되었으리라. 만약 번역이 문제였다면 나는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야기를 꾸며 들려주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은 매력적이다.

제비가 가고 싶어하는 이집트의 그림은 마치 벽화같다. 이집트 벽화에서 옮겨온 듯하면서도 한 컷 한 컷에 또 이야기가, 신화가 담겨 있다. 왕자가 내려다보는 도시 전경은 원근법이나 따위를 무시한 것같이 보인다. 중세의 유럽 지도같은 느낌이 든다. 거꾸로 흐르는 운하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손바닥 안에 그 거리를 얹어놓고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정말 왕자의 동상이라면 그렇게 한 눈에 도시를 내려다 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가난한 청년 작가의 다락방 그림은 오페라 '라보엠'을 연상시킨다. 그러다가도 집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그림은 어느 안락한 주방의 작은 소품처럼 적당히 귀엽고 예쁘장하게만 보이기도 한다. 하얀 눈이 쌓인 거리의 그림은 북유럽을 연상시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작은 아이가 이 책을 읽어주자 왕자의 눈을 빼 주는 장면에서 울먹였다. 아무래도 구연을 너무 실감나게 한 탓인 것도 같다. 아니, 사실은 어느 새벽,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이 책을 보다 혼자 울었던 기억이 더 맞는 것 같다. 왕자의 눈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자의 가슴아픔이 아파서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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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 어른을 위한 동화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현대문학북스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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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의 시를 워낙 좋아한다. 비록 그것이 호구지책이든 넘쳐나는 시심의 또 다른 발현이든 그가 쓴 산문들이 아쉽기는 했어도, '연인'에서 배신이 아니라 책 한 권 전체를 다 시로써 받아들인 기억 때문에 '항아리'나 '모닥불' 같은 책들을 자꾸 만지작거리긴 했었다. 그러다 정작은 우리반 학급문고로 올해야 구입을 하게 되었고 나는 그 중 첫 번째 독자가 되었다.

처음엔 여전히 아름다운 이 시대의 전설같은, 그런 동화라고 생각했다. 마침 두 페이지 가득 차지한 동백꽃 그림이 담긴 오동도 이야기는 바로 얼마전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 유홍준 씨의 '월출산과 남도의 봄'에서 한참 이야기했던 바로 그 선홍빛이었다. 박항률은 어떠한 연고로 정호승과 함께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시세계와 묘하게도 어울린다. 박항율의 작품 중 '응시'라는 제목의 연작들이 있는데 한결같이 도대체 이 세상 어디라고 믿어지지 않는 어딘가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길이 서늘하도록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그 파르스름함이야말로 정호승의 맑음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 책의 이야기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엔 그답게 이쁘고 맑은 이야기요, 지고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친구에 관심이 많아 한 여자아이와 헤어지고 돌아온 날 저녁, 또 다른 여자 후배와 사귀자고 약속을 하는 한 아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점심을 혼자 먹는 날 읽기로 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책은 주로 나무들에 관한 이야기였고 더러는 자물쇠나 칼 따위의 물건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눈 앞에 놓여 있는 움직이지 않는 어떤 물건에도 사실은 마음이 깃들어 있으며, 여기 오기까지 거쳐온 역사가 있고 또한 삶의 마감이 있다는, 시인의 응시가 놀랍도록 빛난다. 그리하여 시인은 식당에서 만나는 작디작은 이쑤시개에서 백두산 바람 냄새도 맡아낸다. 그가 말해주고 싶은 수많은 사랑에 관한 메시지도 그렇지만 사실 이 책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그, '응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던 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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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탐사와 산책 20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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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려진다면, 혹은 나의 아들에게라도 건축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한다면 좋겠다. 건축학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첫째, 집 한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미학이 있다. 여럿이 모여 살아서 더더욱 아름다운 그 무엇. 안국동 기와집들의 군락에서 느낄 수 있는 집합의 미학 같은 것 말이다. 둘째. 삶이 담긴 예술이란 것. 만들어 놓아 두고 보는 작품이 아니란 것이다. 책 속에 있는 유명한 건축물들은 끼끗하니 고와보였지만 기실은 손잡이마다 손때가 반질반질 앉았을 터이다. 어느 책에선가도 그런 이야기를 본 것 같다. 아무도 살지 않은 채 몇 백년을 모셔두는 집보다 지금도 사람들이 들어 살고 절하고 자고 먹는 집들이 더 건강하다는. 그것이 건축물의 매력이다.

김석철의 미덕은 그것이다. 건축을 누가 삶에 이토록 가까운 예술이라 생각했겠나. 그야말로 전문가가 아니면 '논'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을 터인데 쉬운 말로 풀어 우리와 이야기 나누는 자세가 어디 그리 흔하랴. 덕분에 나같은 문외한도 그의 책을 두서너권 읽으면서 이런저런 '집'에 대한 생각들이 들고 나고, 그런 생각의 와중에 결국은 이런 비판조차 감히 해본다. '그런데 왜 김석철이 더듬어 만나는 '집'들은 다들 그리도 유명하고 비싼가'고, '그는 어찌하여 지중해의 바다를 면한 하얀 집들의 구조라든가 우리나라의 한옥 골목, 20세기 한국 건축물들의 무질서와 반자연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돈많은 귀족과 부자들의 발원으로 지어진 고급한 건축물들의 미학만을 말하는가'고.

건축도 예술이라면, 무엇보다도 더더욱 살갗에 와닿는 예술이라면 우리 어린 벗들 중 누군가가 저 아파트만의 살벌한 도식이 아닌 정녕 아름답고 따스하며, 그 안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인간중심의 건축예술을 실현하는 '건축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그런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어린 날부터 교양으로서 건축을 말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김석철을 뛰어넘는 더 쉽고 더 따스한 책을 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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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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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미국사람이었기에? 라고 생각한다면 헬린 니어링에게 느꼈던 공감은 해명이 안될 것이기에 그건 접기로 하자. 하지만 도대체 어째서일까? 소로우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어째서 그가 월든에 가서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좋아서 갔겠지. 그런데 왜 계속 살지 않았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자연을 사랑하는 방식은 나의 그것과 너무나 달라서 도대체 그에게 주어진 명성이 마음에 들지 않을 정도이다. 그는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다. 그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만을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 특유의 배타적인 고집을 자꾸 발견하고 거북했다. 문명을 비판하는 논조도, 분석적이지조차 않으면서 대안도 없어 보였다. 모두들 그처럼 통나무 집을 짓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사람을 피하는 태도도 그러하고 (자기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로 경멸하는 말투도 그렇고) 지식과 교양에 대해 말할 때의 태도도 그렇고 다양성이라고는, 다른 사람의 문화적 성향이라고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도 도무지 정감이 가지 않는다.

소로우 같은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단지 호숫가에서 자기가 지은 통나무집에서 2년씩이나 살았다고 해서 (아, 물론 그가 지은 꽤 설득력 있는 몇몇 저서들!) 그에게 그토록 명성을 얹어주어야 하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소로우처럼 물가로 혼자 비집고 들어가 인간이 저지른 문명이란 야만에 대해 고민하고 자기만이라도 고상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적게 먹고 적게 쓰며 고요히 산다. 그러나 그런다고 이 야만적 문명이 멈추진 않더란 것,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 문명에 오염된 현실을 들이마시고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세상엔 더 많더란 것, 그들에서 소로우의 책은 잠시 잠깐의 위안밖에는(때론 위안조차도 안됨) 안된다는 것을, 한번쯤은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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