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 어른을 위한 동화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현대문학북스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정호승의 시를 워낙 좋아한다. 비록 그것이 호구지책이든 넘쳐나는 시심의 또 다른 발현이든 그가 쓴 산문들이 아쉽기는 했어도, '연인'에서 배신이 아니라 책 한 권 전체를 다 시로써 받아들인 기억 때문에 '항아리'나 '모닥불' 같은 책들을 자꾸 만지작거리긴 했었다. 그러다 정작은 우리반 학급문고로 올해야 구입을 하게 되었고 나는 그 중 첫 번째 독자가 되었다.

처음엔 여전히 아름다운 이 시대의 전설같은, 그런 동화라고 생각했다. 마침 두 페이지 가득 차지한 동백꽃 그림이 담긴 오동도 이야기는 바로 얼마전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 유홍준 씨의 '월출산과 남도의 봄'에서 한참 이야기했던 바로 그 선홍빛이었다. 박항률은 어떠한 연고로 정호승과 함께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시세계와 묘하게도 어울린다. 박항율의 작품 중 '응시'라는 제목의 연작들이 있는데 한결같이 도대체 이 세상 어디라고 믿어지지 않는 어딘가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길이 서늘하도록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그 파르스름함이야말로 정호승의 맑음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 책의 이야기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엔 그답게 이쁘고 맑은 이야기요, 지고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친구에 관심이 많아 한 여자아이와 헤어지고 돌아온 날 저녁, 또 다른 여자 후배와 사귀자고 약속을 하는 한 아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점심을 혼자 먹는 날 읽기로 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책은 주로 나무들에 관한 이야기였고 더러는 자물쇠나 칼 따위의 물건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눈 앞에 놓여 있는 움직이지 않는 어떤 물건에도 사실은 마음이 깃들어 있으며, 여기 오기까지 거쳐온 역사가 있고 또한 삶의 마감이 있다는, 시인의 응시가 놀랍도록 빛난다. 그리하여 시인은 식당에서 만나는 작디작은 이쑤시개에서 백두산 바람 냄새도 맡아낸다. 그가 말해주고 싶은 수많은 사랑에 관한 메시지도 그렇지만 사실 이 책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그, '응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던 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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