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왕자 -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1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1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지만 옮김, 레인레이 그림 / 마루벌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왕자였던 그가, 보석과 금박으로 뒤덮였던 그가, 죽어 동상이 되지 않았더라면 죽는 날까지 호사를 누리고 살았을 그가, 누더기가 되고 납심장 조각으로 남고서야 비로소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는 세상이 혹은 하느님이 참 공평하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자기도 모르게 높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곱게 살아가 고통과 번뇌의 통과의례를 본의 아니게 '못' 겪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 인생이란 게 고통받고 고생하고, 특히 고뇌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점수를 더 주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실지로 그렇지 못하여 참으로 통탄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왕자'는 그래서 참으로 사랑스럽다. 어쩌면, 동상이 되어 높은 곳에 서 있으니 사람들의 고통이 보여 견딜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 높은 곳에서도 여전히 철딱서니 없이 또 한 세월을 보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가 마음 아플 수 있었던 맑고 천진한 마음에 충분히 경의를 보낸다. 그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질과 순탄, 혹은 고난의 인생길 그 어떤 운명이든 그것에 상관없이 남의 고통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리고 안아주고 해결해 줄 수 있는 고상한 천성이란 것이 분명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제비'처럼 괜찮은 친구들 만나게 되면 더더욱 빛을 발하리라. 만나서 함께 더욱 더 맑아지고 더욱 더 힘이 나고 더욱 더 실효성이 높아지는, 하나 더하기 하나이되 둘 이상이 되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친구이리라.

내가 마루벌의 이 책을 산 것은 순전히 그림 때문이었다. 이렇게 글자가 많은 그림책은 이미 초등학생인 큰 아이를 위해 사는 것이므로 번역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번역에서 하자를 발견하지 못했고, 혹여 부족한 점이 있었더라도 제인 레어의 아름답기 짝이 없는 그림 때문에 다 용서가 되었으리라. 만약 번역이 문제였다면 나는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야기를 꾸며 들려주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은 매력적이다.

제비가 가고 싶어하는 이집트의 그림은 마치 벽화같다. 이집트 벽화에서 옮겨온 듯하면서도 한 컷 한 컷에 또 이야기가, 신화가 담겨 있다. 왕자가 내려다보는 도시 전경은 원근법이나 따위를 무시한 것같이 보인다. 중세의 유럽 지도같은 느낌이 든다. 거꾸로 흐르는 운하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손바닥 안에 그 거리를 얹어놓고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정말 왕자의 동상이라면 그렇게 한 눈에 도시를 내려다 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가난한 청년 작가의 다락방 그림은 오페라 '라보엠'을 연상시킨다. 그러다가도 집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그림은 어느 안락한 주방의 작은 소품처럼 적당히 귀엽고 예쁘장하게만 보이기도 한다. 하얀 눈이 쌓인 거리의 그림은 북유럽을 연상시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작은 아이가 이 책을 읽어주자 왕자의 눈을 빼 주는 장면에서 울먹였다. 아무래도 구연을 너무 실감나게 한 탓인 것도 같다. 아니, 사실은 어느 새벽,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이 책을 보다 혼자 울었던 기억이 더 맞는 것 같다. 왕자의 눈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자의 가슴아픔이 아파서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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