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그가 미국사람이었기에? 라고 생각한다면 헬린 니어링에게 느꼈던 공감은 해명이 안될 것이기에 그건 접기로 하자. 하지만 도대체 어째서일까? 소로우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어째서 그가 월든에 가서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좋아서 갔겠지. 그런데 왜 계속 살지 않았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자연을 사랑하는 방식은 나의 그것과 너무나 달라서 도대체 그에게 주어진 명성이 마음에 들지 않을 정도이다. 그는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다. 그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만을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 특유의 배타적인 고집을 자꾸 발견하고 거북했다. 문명을 비판하는 논조도, 분석적이지조차 않으면서 대안도 없어 보였다. 모두들 그처럼 통나무 집을 짓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사람을 피하는 태도도 그러하고 (자기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로 경멸하는 말투도 그렇고) 지식과 교양에 대해 말할 때의 태도도 그렇고 다양성이라고는, 다른 사람의 문화적 성향이라고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도 도무지 정감이 가지 않는다.

소로우 같은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단지 호숫가에서 자기가 지은 통나무집에서 2년씩이나 살았다고 해서 (아, 물론 그가 지은 꽤 설득력 있는 몇몇 저서들!) 그에게 그토록 명성을 얹어주어야 하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소로우처럼 물가로 혼자 비집고 들어가 인간이 저지른 문명이란 야만에 대해 고민하고 자기만이라도 고상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적게 먹고 적게 쓰며 고요히 산다. 그러나 그런다고 이 야만적 문명이 멈추진 않더란 것,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 문명에 오염된 현실을 들이마시고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세상엔 더 많더란 것, 그들에서 소로우의 책은 잠시 잠깐의 위안밖에는(때론 위안조차도 안됨) 안된다는 것을, 한번쯤은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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