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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성석제 지음, 김경호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평점 :
아이들과 중간고사 직전, 교실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 방과 후 고작 2~3시간 공부를 하는 것이지만 오후 5시쯤 아이들과 나누는 간식이 행복하다. 매일 뭔가 다른 메뉴를 생각하느라 내 머리가 아프다. 하루는 토스트, 하루는 삶은 달걀, 하루는 라면...
남는 아이는 서른 일곱 명 중 고작 5~7명. 정작 남았으면 하는 아이들은 다 가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아이들이 남기도 하고 남아서 공부하는 효율이 과연 학원이나 독서실 가서 하는 것보다 높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3학년을 맡을 때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던 추억, 선생님과 함께 간식을 나누며 해가 질락말락할 때 집에 돌아가는 추억을 남겨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이들을 위해 싸구려이긴 하지만 아주아주 큰 덕용 토스트 한 묶음과 마가린을 사고 프라이팬과 가스버너를 챙겼다. 달걀 한 판, 라면 한 박스, 그리고 집에서 젤 큰 냄비도.
모든 메뉴가 인기 있었지만 넷째날 끓여 먹은 라면이 최고였다. 우리 반 아이들은 10명 정도, 하지만 다른 반에서 방과 후 수업을 하던 아이들과 냄새 맡고 몰려온 교생들, 다른 선생님들까지, 라면 서른 개가 순식간일 것 같았다. 한 번에 10인분도 채 끓이지 못하는 냄비 때문에 라면이 끓으면 재빨리 종이컵에 건지고 냄비뚜껑에 건지고, 그 국물에 또 새 라면을 넣고, 어제 삶아 먹고 남은 달걀을 풀고...
세상에서 젤 맛있는 라면을 먹고 뒷처리까지 깔끔하게, 대걸레질까지 다 해낸 아이들, 다음 날, 오늘은 무슨 간식을 먹을까, 하자, 어제 남은 라면이요~ 한다. 질리지도 않냐? 어제 먹었는데... 그러자 아이들의 말..
"샘~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 뭔 줄 아세요?"
(나) '당근 모른다' "뭐냐?"
"라면입니다~"
그렇게 이틀 연속 끓여먹은 라면,(어머니들 아셨으면 싫어하셨을 거야), 다 먹고 난 후 아이들은 샘~ 저희는요, 한 시간 공부, 한 시간 간식, 한 시간 농구, 한 시간 휴식, 이렇게 시간표 짰어요~ 이러더니 칠판에 이렇게 적는다.
Best Seller(울반 학급문고 목록 참조)
1. 나의 라면 오렌지 나무 2,. 어린 라면 3 . 우리들의 일그러진 라면 4. 라면 언니 5. 나는 라면의 택시 운전사
best movie
1. 웰컴 투 라면골 2. 올드 라면 3. 왕의 라면 ...
best animation
1. 라면의 움직이는 성. 2. 철권 라면 3. 라면 중사 케로로 4. 라면은 못말려....
아참, 나는 성석제의 '소풍' 서평을 쓰던 중이었군.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장면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이들이 칠판 가득 써넣던 라면 이야기들. 음식 이야기 많고 많다. 개인적으로 음식에 관한 만화를 열심히 읽는 요즘이지만 신문에서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게 음식 이야기이다(대부분 맛있고 분위기 좋은 음식점 이야기이지만) 나는 먹는 것에 별로 집착하지도 않고 음식문화에 별 의의를 둘 만큼 정신적 여유도 없는 사람이지만 가끔 정말 좋은 음식에 얽힌 사람들의 추억이 떠오른다. 내 인생의 절반은 먼지 냄새 풀풀 나는 남자 아이들과 함께 했던 까닭에 대개는 참으로 허름하기 짝이 없는 음식의 추억들이 그 아이들과 함께 한다.
성석제의 재치 넘친다고 칭송받는 그 문체는 나처럼 한 없이 깊이깊이 더 깊이 진지진지 더 진지, 하다 못해 고리타분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별 매력이 없다. 그렇더라도 이 책은 다른 '음식문화체험'류의 책들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도, 이러구러한 해외여행의 체험과 또 어찌저찌한 유명인사들(이름을 밝혀 그들의 이름에 편승하는 어설픈 짓은 하지 않으나 어쩌구 이웃작가 어찌어찌 화가나 교수 하는 식이다)과 흔히 먹지 않는 음식을 (때로는 찾아가서) 먹기도 하는 약간의 사치와 아닌 척하는 잘난 척이 없다 할 순 없지만, 작가 특유의 그 '눙치는 기술'로 껍데기 홀딱 까놓은 메추라기 알 마냥 매끈덩 빠져나가진 않는다.
여기 쌩뚱맞은 만화가 끼어든다. 나쁘지 않다. 좋다고까진 못하겠다. 그래도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글과 만화는 참 어울리지 않는 듯한 게, 성석제에게서 어딘가 모르게 90년대 초반 아날로그 냄새가 나고 만화는(필치는 물론 아날로그인데) 컴으로 그린 게 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눙치는 기술이 비슷하여 그런지, 만화는 뭐야, 이게 하다가도 만화로 인하여 글을 읽고 싶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누글까, 이런 기획을 한 이는??
'소풍'을 읽으면 그 이야기에의 몰입 뒤로, 나에게 있었던 음식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인사동, 종로 뒤, 해남의 어느 한 정식 집, 베이징의 어느 불친절하던 중국집.... 아, 그래 당신 멋진 데를 갔군, 나도 언젠가 여길 가 보겠어, 가 아니라, 아, 그래, 나도 언젠가 이 비슷한 델 갔던 거 같아. 선풍기만 겨우 덜덜 돌아가던 유명하다는 칼국수집에서 무지 덥게 먹었던 칼국수 맛처럼, 거기, 비장한 인생의 의미를 심으려기엔 너무 덥거나 너무 맛있거나, 너무 배고프기만 했던 추억들,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 다 이야기하기엔, 거기에 깊은 인생의 의미를 다 설파하기엔 좀 그래서, 아 거기, 한 번 간 적 있었어....(누구와 같이 갔던가는 말하지 않음. 그날 슬펐는지는 말하지 않음, 어떤 저녁이었나는 말하지 않음..)
말하지 않음의 여지를 남겨둘 줄 아는 걸 보면 분명 성석제는 매력있는 작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