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일주일 안에 피아노 죽이게 치는 방법
전지한 지음 / 에듀박스(주)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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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긴가민가 하면서 책을 샀다. 뭐야, 책 제목에서 객기가 느껴지네, 하지만 속는 셈 치고 , 얘기나 한 번 들어볼까? 뭐 이런 기분? 

앞의 소설은 (나쁘진 않았지만 내 관심사가 아니라서) 이 사람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싶은 것인데 그것을 좀 부드럽게 녹아넣으려는 장치려니 싶어서 대충 읽었다. 아니 사실은 이야기 속에 군데군데 피아노 치는  법이 나올 줄 알고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열심히 읽다가 거의 끝무렵에 뒤에 따로 교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정리를 하고 교본으로 넘어갔다. 정말 일주일에 가능하리라 믿지는 않았다. 여기서 일주일이란 미친 듯이, 아니 적어도 열심히 일주일을 몰입했을 때, 라는 의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즐기면서 연습을 한다면 일주일은 부족할 게 분명하다. (만약, 여자친구에게 이벤트라도 열어주어야 한다든지 하는 간절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일주일만에도 가능할 것 같다. 진짜로!) 

나는 체르니 100번 중반 정도의 피아노 지식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중등학교 음악 수업 시간에 들었던 것들이 머리에 남아 있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샵, 플랫, 마이너조차도 그다지 어려운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요즘 나는 기타 연습을 간간히 하고 있는데 솔직히 기타의 코드를 익히면서도 그 개념은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 코드의 의미와 개념을 잘 알게 되었다. (그런다고 기타 코드 잡는 실력이 연습도 안 했는데 늘진 않는다. ^^;)   

와, 신기하네, 이러면서 이메진과 가시나무 등을 연습하다가 왼손 반주 연습을 위해 동영상도 들어가 봤다. 영상을 보면서 연습하니 더 잘 된다. 전지한 씨가 이 책을 쓰고 영상을 만드느라 들인 시간과 공로가 과연 큰 돈이나 명예가 되어서 돌아갔을까, 너무 수고를 한 게 아닐까 싶어 고맙고 미안하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은 정말, 이렇게 쉽고 재밌게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사람들은 왜 모를까, 안타까워 하면 가르쳐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다. 정말 새롭고 신기한 것을 알 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알려주고 싶어질 때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매일 연습할 여건이 아니라서 진도가 끝까지 잘 나가지는 못했다. 정말 피아노를 유려하게 치려면 쉬운 방법이라도 여러 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 그래야 손에서 자연스레 소리나 나는 것이지 악보대로 코드대로 틀리지 않고 쳐냈다고 멋진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으로 잘 따라가 '배우긴' 했는데 '익힘'은 덜 했다. 그래도 참 흐믓하다. 만약 이 책을 실용서라고 불러야 한다면 이 책은 내가 만난 실용서 중에서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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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놀이 공원 - 심리학자들과 떠나는 환상 여행 사계절 지식소설 1
이남석 지음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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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쏟아져 나오는 청소년 소설들을 열심히 읽고 있다.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지, 상담실에 독서치료용으로 둘 만한지, 우리집 아이들에게 권할 만한지 보려고.  

기존 청소년 권장도서라는 것들이 대개는 너무 어려운 것들이 많아서 그 반작용으로 요즘에는 아이들 입말과 아이들 경험을 살린 책들이 많이 나온다. 그 안에 담긴 말들은 매우 거칠고 아이들 생각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미명 아래 내용은 조잡하기 짝이 없다.  그런 류의 청소년 소설이 아니면 학습적인 내용을 아이들이 읽기 쉽게, 재미나게 기획한 것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도 결국 어른이 아이 옷이나 만화같은 복장을 한 느낌이 드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거칠거나 우스꽝스러운 요즘의 청소년 소설들 

우선 이 책은 역사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심지어 철학도 아닌 심리학을 청소년용으로, 소설로 풀어썼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자아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길잡이가 될 만한 책들은 거의 없고 어른들도 어떻게 이끌어주어야 할지 난감한데 자아찾기를 도와줄 수 있는 심리학 소설이라니, 그것도 환상과 놀이공원과 감동이라는 단어가 어우러지는 소설이라니! 

나는 이 소설을 술술 읽었다. 재미가 있어서라기보다 이런 심리학 이론을 이런 식으로 놀이공원의 아이템으로 이끌어내다니 대단한 걸, 하는 마음과 어려운 이론을 쉽게, 비유적으로 풀어쓰는 솜씨를 구경하는 즐거움이 쏠쏠했던 것이다.  특히 에릭슨 이론을 서바이벌 게임으로 비유한 것이 그럴 듯했다.  이렇게 보니 심리학 이론이란 것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괜찮다는 생각도 든다. 전반적인 흐름이 일관성이 있는 것도 좋았다. 주인공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심리학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은 학문일 뿐, 혹은 남의 마음을 이해하는 도구일 뿐 그 자체가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기는 어렵다. (물론 끊임없이 자기를 모델로 생각하며 공부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저자가 '심리학은 외로움을 줄이는 학문'이라 생각했듯이 청소년들이 덜 외롭게 청소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데 심리학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즉 '딱딱한 고목이 아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학문이 되도록, '상처를 어루만지고 우울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꽉 잡아주는 손길'이 되려고 진심을 다한다.  

꽤 그럴 듯한 놀이공원의 비유 

실은 읽는 내내 꽤 그럴 듯하게 비유된 놀이동산의 기획에 감탄하면서도 심리학에 대한 기존의 지식이 전혀 없는 청소년들이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리학 교양강좌쯤을 들은 1,2학년 대학생들이라면 꽤 괜찮게 읽을 법 하다. 하지만 중고생이? 물론 그들은 거꾸로 이 소설을 읽은 것을 계기로 하여 나중에 심리학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을 것 같다. .. 이렇게 조금 비판적으로 이 책을 다 읽은 나는 저자 후기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따뜻한 손 내미는 심리학'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썼다는 저자의 말에 솔직히 감동 받았다. 나는 내 아들을 포함해 주변 아이들에게 이 책을 검증 받아볼 생각이다. 청소년들도 재밌게 감동적으로 이 책을 읽어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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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재발견 - 한국 자본주의와 기업이 빠진 조직의 덫, 개정판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2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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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잠시, 전공과 매우매우 거리가 멀지만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한경전’이니 ‘자구발’이니 하는 책들을 꽤 열심히 읽었던 이래, 경제 관련 서적을 멀리 하고 산 지 오래 되었다.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정도였으려나? 나는 ‘경제’와는 정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의외로  이 조직의 재발견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앞부분의, 개론서처럼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별 친절한 용어 정리 없이 소개하는 부분(그들 대부분이 미국계였던 것 같다)이 좀 지루했지만 거기를 지나자 곧바로 한국 경제와 특히나 한국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각종 조직(군대나 학교, 민노당이 언급되는 참신한 사태라니!)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해간다.  자기 입장을 잘 드러내지 않고(아, 뒤로 가면  입장과 감정이 좀 드러난다. 냉소적이었다가 비판적이었다가 살짝 격앙된 어조였다가, 등등).
 

삼성과 민노당에 대한 언급이 특히 재미있었고 끝부분에서 우리나라 조직(주로 기업을 언급한 것이지만 다른 조직에도 얼핏 적용이 되는)들의 특성(대략 기억하건대, 이기적이고 마초적이고 군대와 흡사하고.. 등등, 시스템의 문제라기보다 거의 문화적인 문제에 가까운 특성들)에 매우 공감이 가기도 했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이다.(내가 여자이고 자녀를 둔 엄마이기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를)

우선, ‘우리나라는 대학진학률이 80%이고 연기금 수백조원을 지니고 있으며 교육을 잘 받은 여성 노동자와 이십대, 그리고 숙련된 고령 노동자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경제가 발전하지 않거나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이와 같은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경제적 조건이 나쁜 게 아니라 위기대처법을 모르는 게 한국경제의 위기이다.’ 대략 이런 내용.

문제는 시스템? 위기대처법? 

내가 어렸을 때는 나라가 발전(경제적 발전이겠지)하려면 국민이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안창호 선생이, 나라를 빼앗긴 것은 국민이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 청년 교육을 강조했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일 수 있는데, 실제로 주변에서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므로 어린 마음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더랬다. 이후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뜨거웠고 그 뜨거운 교육열의 열기를 거쳐온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이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나라 7,80년대의 경제성장이 그런 교육열과 비례하는 듯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기도 했다.(여기서 잠깐, 샛길로 잠시 비껴가 본다. 어느 때보다도(사)교육 열풍이 그야말로 폭풍과 다름없는 21세기 초반의 한국을 거치고 나면 우리에게는 정말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려나? 살인적인 분량의 공부를 하는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우리나라 정치경제를 짊어질 조만간의 미래는 엄청난 역동성을 가질 것인가? 이에 대해 막연하게라도 긍정적인 예감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교단에 서서 교육이란 것을 담당한 장본인으로서, 교육의 힘이 곧 국가의 힘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교육받은 인력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경제적인 개념으로, ‘효율적으로’ 그것을 경제 동력으로 만드느냐 못하느냐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인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직’과 ‘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한국 경제는 암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엊그제 신문에서 한 미국인이, 한국에는 고학력 실업여성이 많아서 (사)교육 열풍이 뜨겁다고 쓴 글을 보았는데, 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부정할 수만도 없는 현상인 것 같다.

선진국에서는 (정부와 기업이) 노동조합을 임금, 생산 강도, 불량률 등의 표준을 정하고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중추적 협의기관으로 인정한다는 부분도 매우 공감이 된다. 소위 ‘자본가’가 이득도 없이 자비심이나 도덕률 때문에 노조를 인정하거나 대우해 주지는 않는다. 완벽하게 경제논리만으로 계산을 해보았을 때도 노조와 공존공생하는 것이 이득임을 잘 알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그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많은 아픔들을 겪었다.  노동자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과정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해야겠는데, 우리나라가 서구 선진국들의 근대화를 어설프게나마 집약적으로 짧은 시간에 (시행착오가 있었든 어쨌든지 간에) 받아들였지만 유독 노동조합에 대한 부분은 더 더딘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념적인 집단공포증이 여기 작용하고 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지혜로운 기업인이라면 그들이 서구선진국 사람들을 흉내내듯 아침에 우아하게 헬쓰를 하고 우아한 자동차를 타고 우아하게 고급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타고난 듯 자연스레 누리듯 노조에 대한 품위있는 대응도 불가능하진 않을 터인데 어째서 ‘노조’라는 말만 나오면 공황증 환자 같은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양비론은 옳지 않다고 본다. 우리나라 노조운동과 관련된 문제의 근본 원인과 책임은 기업과 정부 쪽에서 더 많이 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칼자루를 그들이 쥐고 있다는 뜻이다.)   

쌍용차 사태의 전후사정을 잘은 모르나 식수와 의약품 반입도, 의료진의 출입도 불허한다는 뉴스를 듣고, 전쟁통에도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치료와 생명살리기의 미담은 있었건만, 21세기 민주사회가 2차세계대전 당시의 전장만도 못한가 싶어 한숨이 났다. 이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수준이라기보다 정치의 수준이고 문화의 수준이기도 하다. 고도의 경제적 효율을 구축하는 삼성의 무노조 정책은 치밀하고 영악한 조직운영 방식이 아니라 문화적 수준의 미성숙을 나타내는 현상이다.

엄마형 조직의 발전성 

또 하나, 아빠형 사회, 엄마형 사회, 형제형 사회라는 비유가 참 재미있었다. 한국은 군대나 학교,  정당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진보단체조차 수직적이고 마초적인 ‘아빠형 사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서의 공동체적인 ‘엄마형 사회’가 얼핏 보면 느려 보이고 규율(군기?) 없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요, 경제적 효율을 지닌 사회일 것이나, 우리 사회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조직구조이기도 하다는 지적이다. 여초현상이 두드러진 학교조차, 여선생님들이 많아져서 어머니 품처럼 이해력이 큰 공동체의 모습을 띄지는 못한다. 관리자의 자리에 진출한 많은 여선생님들은 고스란히 ‘가부장’적인 태도를 학습하여 기존 사회에 순종한다. 왜, 따뜻하고도 엄격한 모성적 지도라는 것은 불가능한가?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계사회의 우월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고민하자는 뜻이다. 좀더 창의적으로 생각하자는 뜻이다. 하긴, 80년대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도 창의력의 회색지대를 통과해 왔지만 오늘날의 청소년들이라고 해서 과연 창의적 사고의 세례를 받고 있다 할 수 있을까. 가장 창의적인 녀석들은 그들이 받은 사교육의 분량과 반비례하는 그들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주변에서 온통 걱정을 들으며 사춘기를 거쳐 가느라 온몸에 가시 상처 투성이다. 이것을 잘 통과하는 몇 안 되는 녀석들에게 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걸기에는 그들이 너무 소수라는 것도 참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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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을 위한 심리학
정의석 지음 / 시그마프레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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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 때, 평소 관심있었던 심리학을 꼭 듣고 싶어서 불문과 학생들의 심리학을 수강했던 기억이 난다. 꽤 열심히 공부했는데 어쩐 일인지 형편없는 성적을 받았다. 왜 심리학이 공부하고 싶었을까? 나는 어쩌면 고등학교 때 읽은 데미안에 나오는 ‘독심술’ 이런 것을 심리학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학교에 가면 꼭 심리학을 들어보리라 결심했던 것 같다. 독심술과 심리학은 전혀 다른 것이란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가 누구이며 내 마음은 어떠한가,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춘기에서 한발도 더 발전하지 못한 미성숙한 영혼인지도 모른다.

작년의 독서치료에 이어 올해는 미술치료 연수를 받고 있다. 수년 전, 전문상담교사 과정을 공부했지만 나의 심리학적 지식은 매우 일천하고 중구난방이라는 생각을 새삼 한다. 학교 도서관에서 ‘대학생을 위한 심리학’을 빌려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뭔가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주워들고 읽었는데, 머릿속에 많은 용어들이 난무하는데, 정리는 잘 안 된다. 그리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예의 그러하듯이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여러 가지 행동과 증세들에 대해 소화되지 않은 용어들로 해석하려 들곤 했었다.

반성은 실천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은 더 많이 공부하는 것뿐이다. 물론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한 모색이 있어야 한다. 혼자만의 공부가 아니라 세미나나 어떤 집단을 통해 혹은 대학원에 진학하는 방법 등을 고민해야겠다. 


어쨌든, 반성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는 고백이다.
이 책은 아마도 저자의 교양 심리학 강의록인 듯싶다. 흔히 심리학 책들이 개론과 역사에서 시작되어 앞부분만 닳도록 외우게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구성이다. 일단 개념이 아주 쉽게 정리가 되어 있다. 물론 깊이는 없다. 그런데, 쉽게 설명하기의 어려움에 대해 혹시 생각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 탁월한 교수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청중의 수준에 맞춰 쉽게 설명하고 가르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책을 칭찬해 주고 싶은 첫 번째 이유이다.
 

많은 통계 자료와 그림들이 쓰였는데, 아주 적절하고 재미있게 활용되고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칭찬할 요소이다. 강의 준비를 정말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을수록 심리학에 대한 공부를 더 (깊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선생은 오늘 배울 분량을 잘 이해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혼자서 더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저자 정의석 씨도 그런 선생일 듯싶다.

얇은 공책 한 권에 필기를 해가면서 책을 읽고 그 공책을 버렸다. 아마 이 책에 나온 많은 용어들(이미 전에 들었거나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을 다른 곳에서 발견하면 아, 들어봤는데 뭐였지, 하고 또 헛갈릴 것이 뻔하다. 하지만 공책을 다시 펼쳐보기보다 새로운 책을 찾아 또 읽을 것이다.  교단 20년차 교사이지만 새학기마다 아이들 앞에서 새내기 선생처럼 긴장을 한다. 그렇듯 늘 심리학을 처음 대하는 대학생같은 그런 마음으로 상담공부를 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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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기억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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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고 싶어 한다. 떠나 살고 싶어도 하고, 공부하러 나가고 싶어 하기도 하고, 여행을 한 번 다녀온 사람은 해마다 몸살을 하곤 한다. 한 번도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도 늘 꿈을 꾼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누구는 이것을 집단적 허영이라고 욕했지만 한 번도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 없던 그도 짧은 필리핀 여행과 신혼여행 이후로 달라졌다. 허영의 대열에 동참한 것일까?
  

해외여행을 허영의 산물이라고만 보기에는... 

물론 한국에서 외국경험은 그의 경제적 지위와 문화적 세련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과시하려고 외국을 꿈꾸는 면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뭔가가 더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억눌림에 대한 반증이라고 생각하고 일종의 백일몽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꿈을 꾸고 싶은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걸어다니면서 꿈들을 꾸고 있는 것이다. 꿈을 잠시나마 실현해 본 사람은 더욱,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간절히.

외국여행을 가면 모두 와인잔을 기울이며 상젤리제 거리의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가? 근사한 궁궐 뜨락을 거니는가? 굽 낮은 샌들을 끌고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피곤에 절어 배고픔에 치여, 백인들의 무심과 경멸에 속상해 하루 예산의 계산에 골머리 아파하며 그렇게들 다니지 않는가? 유학을 가서 이민을 가서는 또 안 그런가? 다녀와서 추억으로 남거나 내 삶이 어땠는지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똥폼을 잡을지언정, 그들 앞에서 폼 잡으려고 외국에 다녀오고 싶어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여행은, 이곳 아닌 다른 곳에 대한 갈망은, 사람들 속에 숨은 일종의 집단 무의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수천 년 동안 억눌린 원형적인 어떤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최근에 급격히 터진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갑자기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갑자기 잊혀졌던 꿈에서 각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현실을 이겨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으면 갑자기 드넓은 세상으로 열리는 이 가슴, 가슴들을 설명하기란 참 어렵다.
  

나도 그런 갈망의 하나로 여행기를 즐겨 읽는다. 요즘 많이 나오는 가비얍은 여행기도 좋고 사진 혹은 스케치 식의 그것들도 좋다. ‘도시의 기억’도 그 맥락에서 손에 쥔 책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덧붙여, 고종석이란 이름 때문에 샀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라면 좀 다른 여행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런 기대와, 고종석의 필력과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를 함께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함께.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여행을 맞는다

맞다. 예술가는 예술가다운 여행을 할 것이고 나 같은 선생들은 선생의 시각으로 세상을 읽을 것이다. 김석철 씨가 건축물을 찾아다닌 책을 읽으면서 어차피 세상 모두를 다 볼 수 없을 때, 자기만의 프리즘을 갖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생각했었다. 기자가 본 세상은 어떨까. 고종석 씨는 기자로서 넘나들었던 ‘도시’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다. 취재를 위해 다녔던 (대개는 선진국의) 도시들은 분명 범부들의 여행기와 달리 읽힌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보고 들은 것 이외에 그 지역에 대한 이러저런 지식들을 더 찾아내 곁들이곤 하는 것이야 비슷비슷하지만(일종에 독자들에 대한 노력의 모습이겠지) 기자로서 돌아본 세상 이야기는 좀더 지적이고 깊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기 담긴 경험은 주로 다른 나라 기자들과 취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글은, 묘하게 감성적이면서 묘하게 객관적인 냄새를 풍긴다. 놀라운 것은 정치성이 거의 거세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주 그런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겨레 신문에서 고종석을 알게 된 나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배제된 정치적 발언이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굉장히 개인적이고 ‘몽환적’(저자가 좋아하는 단어다)이고 예술적인 글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감성은 좋지만 예술적이라기엔 역시 기자였다. 저자는 일종의 ‘자유영혼’ 파임에는 분명한데 (그가 일 때문에 도시를 전전했다 하더라도 소위 역마살이 끼지 않고서야 그렇다 다닐 운명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이기에는 지나치게 소심하기도 (혹시 겸손한 것일까) 또 안정적이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만히 보면 참 기자스럽다. 아, 물론 기자스럽다고 하기에는 그는 참 겸손한 사람이다. 아는 것이 많고 가진 능력(글솜씨나 여러 개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 그리고 글에 언급되지 않은 기자로서의 취재능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시하는 자세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묘하게 감성적이지만 묘하게 객관적인 

내가 다녀 본 곳에 대한 부분은 반갑게 읽었지만 사실 관광객으로서 나의 기억과 취재기자로서의 기억의 접점은 별로 없다. 몽환의 여행기를 읽는다기보다 살짝 공부 무게를 실어 읽었다. 그러나 저자 자신에게는 자신의 열정적 시대의 일기장을 다시 읽듯 새삼스러울지는 모르겠으나 독자인 나에게 충분한 ‘사유’들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의도적으로 그 도시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많이 유보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랬을까.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할 부분들(홀로코스트처럼, 거의 고전이 된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빼고는 언급을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보통 여행기보다 무게감도 있고 가비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 여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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