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재발견 - 한국 자본주의와 기업이 빠진 조직의 덫, 개정판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2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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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잠시, 전공과 매우매우 거리가 멀지만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한경전’이니 ‘자구발’이니 하는 책들을 꽤 열심히 읽었던 이래, 경제 관련 서적을 멀리 하고 산 지 오래 되었다.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정도였으려나? 나는 ‘경제’와는 정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의외로  이 조직의 재발견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앞부분의, 개론서처럼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별 친절한 용어 정리 없이 소개하는 부분(그들 대부분이 미국계였던 것 같다)이 좀 지루했지만 거기를 지나자 곧바로 한국 경제와 특히나 한국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각종 조직(군대나 학교, 민노당이 언급되는 참신한 사태라니!)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해간다.  자기 입장을 잘 드러내지 않고(아, 뒤로 가면  입장과 감정이 좀 드러난다. 냉소적이었다가 비판적이었다가 살짝 격앙된 어조였다가, 등등).
 

삼성과 민노당에 대한 언급이 특히 재미있었고 끝부분에서 우리나라 조직(주로 기업을 언급한 것이지만 다른 조직에도 얼핏 적용이 되는)들의 특성(대략 기억하건대, 이기적이고 마초적이고 군대와 흡사하고.. 등등, 시스템의 문제라기보다 거의 문화적인 문제에 가까운 특성들)에 매우 공감이 가기도 했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이다.(내가 여자이고 자녀를 둔 엄마이기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를)

우선, ‘우리나라는 대학진학률이 80%이고 연기금 수백조원을 지니고 있으며 교육을 잘 받은 여성 노동자와 이십대, 그리고 숙련된 고령 노동자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경제가 발전하지 않거나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이와 같은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경제적 조건이 나쁜 게 아니라 위기대처법을 모르는 게 한국경제의 위기이다.’ 대략 이런 내용.

문제는 시스템? 위기대처법? 

내가 어렸을 때는 나라가 발전(경제적 발전이겠지)하려면 국민이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안창호 선생이, 나라를 빼앗긴 것은 국민이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 청년 교육을 강조했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일 수 있는데, 실제로 주변에서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므로 어린 마음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더랬다. 이후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뜨거웠고 그 뜨거운 교육열의 열기를 거쳐온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이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나라 7,80년대의 경제성장이 그런 교육열과 비례하는 듯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기도 했다.(여기서 잠깐, 샛길로 잠시 비껴가 본다. 어느 때보다도(사)교육 열풍이 그야말로 폭풍과 다름없는 21세기 초반의 한국을 거치고 나면 우리에게는 정말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려나? 살인적인 분량의 공부를 하는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우리나라 정치경제를 짊어질 조만간의 미래는 엄청난 역동성을 가질 것인가? 이에 대해 막연하게라도 긍정적인 예감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교단에 서서 교육이란 것을 담당한 장본인으로서, 교육의 힘이 곧 국가의 힘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교육받은 인력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경제적인 개념으로, ‘효율적으로’ 그것을 경제 동력으로 만드느냐 못하느냐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인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직’과 ‘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한국 경제는 암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엊그제 신문에서 한 미국인이, 한국에는 고학력 실업여성이 많아서 (사)교육 열풍이 뜨겁다고 쓴 글을 보았는데, 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부정할 수만도 없는 현상인 것 같다.

선진국에서는 (정부와 기업이) 노동조합을 임금, 생산 강도, 불량률 등의 표준을 정하고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중추적 협의기관으로 인정한다는 부분도 매우 공감이 된다. 소위 ‘자본가’가 이득도 없이 자비심이나 도덕률 때문에 노조를 인정하거나 대우해 주지는 않는다. 완벽하게 경제논리만으로 계산을 해보았을 때도 노조와 공존공생하는 것이 이득임을 잘 알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그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많은 아픔들을 겪었다.  노동자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과정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해야겠는데, 우리나라가 서구 선진국들의 근대화를 어설프게나마 집약적으로 짧은 시간에 (시행착오가 있었든 어쨌든지 간에) 받아들였지만 유독 노동조합에 대한 부분은 더 더딘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념적인 집단공포증이 여기 작용하고 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지혜로운 기업인이라면 그들이 서구선진국 사람들을 흉내내듯 아침에 우아하게 헬쓰를 하고 우아한 자동차를 타고 우아하게 고급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타고난 듯 자연스레 누리듯 노조에 대한 품위있는 대응도 불가능하진 않을 터인데 어째서 ‘노조’라는 말만 나오면 공황증 환자 같은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양비론은 옳지 않다고 본다. 우리나라 노조운동과 관련된 문제의 근본 원인과 책임은 기업과 정부 쪽에서 더 많이 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칼자루를 그들이 쥐고 있다는 뜻이다.)   

쌍용차 사태의 전후사정을 잘은 모르나 식수와 의약품 반입도, 의료진의 출입도 불허한다는 뉴스를 듣고, 전쟁통에도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치료와 생명살리기의 미담은 있었건만, 21세기 민주사회가 2차세계대전 당시의 전장만도 못한가 싶어 한숨이 났다. 이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수준이라기보다 정치의 수준이고 문화의 수준이기도 하다. 고도의 경제적 효율을 구축하는 삼성의 무노조 정책은 치밀하고 영악한 조직운영 방식이 아니라 문화적 수준의 미성숙을 나타내는 현상이다.

엄마형 조직의 발전성 

또 하나, 아빠형 사회, 엄마형 사회, 형제형 사회라는 비유가 참 재미있었다. 한국은 군대나 학교,  정당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진보단체조차 수직적이고 마초적인 ‘아빠형 사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서의 공동체적인 ‘엄마형 사회’가 얼핏 보면 느려 보이고 규율(군기?) 없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요, 경제적 효율을 지닌 사회일 것이나, 우리 사회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조직구조이기도 하다는 지적이다. 여초현상이 두드러진 학교조차, 여선생님들이 많아져서 어머니 품처럼 이해력이 큰 공동체의 모습을 띄지는 못한다. 관리자의 자리에 진출한 많은 여선생님들은 고스란히 ‘가부장’적인 태도를 학습하여 기존 사회에 순종한다. 왜, 따뜻하고도 엄격한 모성적 지도라는 것은 불가능한가?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계사회의 우월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고민하자는 뜻이다. 좀더 창의적으로 생각하자는 뜻이다. 하긴, 80년대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도 창의력의 회색지대를 통과해 왔지만 오늘날의 청소년들이라고 해서 과연 창의적 사고의 세례를 받고 있다 할 수 있을까. 가장 창의적인 녀석들은 그들이 받은 사교육의 분량과 반비례하는 그들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주변에서 온통 걱정을 들으며 사춘기를 거쳐 가느라 온몸에 가시 상처 투성이다. 이것을 잘 통과하는 몇 안 되는 녀석들에게 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걸기에는 그들이 너무 소수라는 것도 참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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