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 추억을 잃어버린 모든 이에게 우리시대 대표 문인들이 전하는 특별한 수업 이야기
김용택.도종환.양귀자.이순원 외 지음 / 황소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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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이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가 다른 선생들은 어떻게 수업을 할까 궁금해서였다. 김용택 도종환의 이름을 보고 급히 그런 책일 거라고 생각한 건 나의 속단이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하긴, 수업이란, 수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수업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도 수업이다. 같은 음 두 뜻. 나 역시 가르치는 사람이 되기 이전에 수업을 받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도 기억에 남는 수업을 딛고 스승들의 가르침을 딛고, 미흡하나마 좋은 선생이 되려는 몸부림으로 지난 20년을 살아왔다. 이 책에서 수업을 하는 자의 고민과 고충, 부족한 자기자신에 대한 극복의 이야기를 찾으려 애썼던 나는 참 편협한 사람이다. 

수업이 교실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가출한 여고시절의 어느 성당의 장례식은 준엄하고 서늘하면서도 아름다운 인생의 수업이다. 오직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수업은 학교수업이 아닐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수업'이 아니라 '작가수업' 혹은 '작가성장기'가 맞다. 

그래서 아쉬웠다.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아이들과 펑펑 울고 웃고 실패해서 창피하고 열정을 다해 100%로 합일이 되는 그런 수업 이야기를 원했으니까. 기획된 이야기, 너무 빨리 읽히는 이야기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이스크림을 먹고 난 뒤처럼 허무하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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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에디터 - 고경태 기자의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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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겨레 신문 창간부터 독자요, 소액이긴 하지만 주주이기까지 한 사람이나, ESC를 빼면 신문이 참 재미없다고 느끼고 있다. 의리로 읽는다. 하긴, 다른 두껍기 짝이 없는 신문들도  대부분은 버릴 것 투성인데, 상대적으로 양이 많으니까 그중 건질 게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기사 하나하나가 다 읽고 싶은, 그런 신문이나 잡지를 만들 수는 없겠지 싶다. 

하지만 한때, 한겨레 21이나 씨네 21을 재미있게 정기구독해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 뒤에 고경태 기자가 있었나보다. 내가 재미있네, 참신하네(때론 뭐야 이거..까지) 생각했던 기획 뒤에 그가 있었나 보다. 인생, 즐기자, 재밌는 것만 해도 다 못하고 간다, 혹은 힘들 때조차, 재밌잖아, 이렇게 어거지 긍정의 미학을 펼치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기획은 잡지가 뭐, 신문이 왜, 재밌으면 안 되냐고,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되냐고, 주장하는 목소리로서 공감+공감이었다. 

나도 수업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 20년 전에 야외수업할 때도 그랬다. 왜, 소설은 교실에서만 읽어야 해? 운동장 느티나무 밑에서 친구 배를 베고 둥글게 누워 헷세의 '나비' 를 읽었고 학교 옥상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을 보면서 두레 수업을 했다가 '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한때 누군가 욕들어먹던 그 수업들이 이제 젊은 선생님들 사이에선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학교는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참신한 발상을 하는 교사들이 죽은 듯한 교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단지 재미만이 아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기도 한다. 참신발랄한 한겨레가 바꾼 세상이 분명 있고, 왜 안돼? 재밌잖아~! 를 외친 고경태 편집부장의 노력이 분명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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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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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이 책의 끝자락을 읽었다. 나는 내리고 누군가는 타는, 옥수인지 회기역인지에서 어떤 여대생이 노란 책을 들고 있는 걸 봤다. 설마, 했는데 그녀도 이 책을 읽고 있었다..(뭐ㅡ 베스트셀러니깐) 마치 정윤이 20년 후쯤 강단에서 자신보다 20년쯤 어린 젊음들과 크리스토퍼 이야기를 공유하듯, 나는 나보다 스무 살은 어려보이는 여인과 그렇게 스쳐지나갔다. 

자꾸 '깊은 슬픔' 생각이 났다. 참 좋아했는데... 지금의 신경숙이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느낌은 결코 좋지가 않다. 감성의 과잉, 변함없는 문체, 기록이나 화분, 고양이 같은 소소한  따위들로 감성을 읽게 하는 방법 등.. 하지만 이건 초중반까지의 생각이었다.(문체가, 감성이 다른 방식으로 펼쳐졌으면 더 좋았겠다는 바람은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지금의 젊은 친구들은 '깊은 슬픔'을 읽을 기회가 별로 없을테니 신경숙 문체가 새삼스럽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도 문체미학의 축복을!) 

그래, 이렇게 많은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파괴를 주인공들에게 둘러씌우다니, 신경숙, 그 순한 사람이 잔인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정말 그랬다'. 소설이기에 집약이 되긴 했겠으나...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의문사를 당했고 군에서 죽었다. 너무 많은 분신과 투신들이 하루하루 학교가는 길을 두렵고 슬프게 했다. 내게도 아주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어디론가 사라져 아직 돌아오지 않은 밑 학번 후배가 있다. 80년대 후반 어느 겨울날, 지금의 남편과 손을 잡고 어느 거리를 걷다가 온몸이 멍투성이 변사체로 발견된 어느 운동권 학생의 사진을 붙여놓은 포스터를 보았다. 경찰은 떼어버리고 우리는 몰래 그 포스터의 테잎을 단단히 고정시키면서 눈물을 삼키던 그날, 참 추웠다. 

내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교사서명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학교장의 경고장을  받았던 강경대 군의 죽음 한참 뒤에, 강경대가 사실 내 남동생과 고등학교 친구였다는 사실, 내가 강원도에 근무할 때이지만 어느 날 하루 남동생 방에서 자고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졸업해 버린 대학, 80년대에 끝나버렸기를 바랐던 분신과 사망은 이후로도 우리 학교 후배 김귀정으로, 또 많은 젊은이들로 계속되었다.  

오늘 아침 스쳐갔던 그 여대생은 이런 옛날이야기들이 지독하다고,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 가슴이 먹먹했던 것과 좀 달라도 좋으니 그녀도 이 책을 읽고 가슴이 오래, 먹먹했으면 좋겠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세상이 아니어서(과연 그런가...) 그게 공감이나 실감되진 않을지라도, 고작 20년 전 젊은이들이 그렇게, 사랑도 이루지 못해 망가져갔던 것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덧붙임 - 서평을 쓰고 나서 작가의 말을 읽었다. 거기 이런 귀절이 있다.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랬구나.. 먼저 나온 '엄마를 부탁해'에서 달라졌다고 생각되던 신경숙이 왜 다시 과거로(문체에 집착한다고 느꼈다.. 미안..) 거슬러가고 있는가 했던 의문은.... 사라진다. 공감한다, 진심으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있는 청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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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10-11-18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풀꽃선생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풀꽃선생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리플 남기고가네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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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읽고, 접힌 부분, 밑줄친 부분을 정리하고 있다. 마침 아이들에게는 문학의 사회성을 가르치느라 국어시간임에도 우리 역사(물론 주로 근대사이긴 하지만)를 살짝 훑어주고 있다. 다음은  태조 이성계에 대해, 그가 나라를 세운 것에 대해  평하는 부분이다.

덕 없이 임금이 되었다면 그 백성의 뜻이 떨어졌다는 말이요, 야심가가 통치자가 되었다면 그 사회 양심이 그만큼 마비되었다는 말이다.  

이성계에 대한 전설이 여러 가지지만 우리는 그의 덕을 찬양한 것은 별로 듣지 못한다, (공이나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동명왕, 혁거세, 온조, 왕건까지도 관인대도(寬仁大度 마음이 관대하고 인자하여 도량이 큼)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태조에게는 그것을 볼 수 없다. 최영이 죽으매 촌여자나 소먹이 아이들까지도 슬퍼하였다는 것을 보면 그 민중이 태조의 반란에 대해 그리 찬성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나라세움은 폭력으로 된 것이요, 꾀와 수단으로 된 것이다. 
  

이토록 주관적인 역사서를 읽은 적이 있던가. 함석헌 선생을 살아 생전 뵌 적은 없지만 마치 강연회에 가서 그분의 피 토하는 말씀을 듣는 기분으로 읽었다. 우리 역사를 몰라서 책을 읽었겠는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본다. 기독교도로서, 민족주의자로서 선생의 사상은 나와 다를 수 있다. 고구려 잃음을 통탄하고 우리에게 북방의 기개가 사라져 버림을 안타까워한다. 평화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이 보기에 지나친 민족주의일 수도 있고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기준으로 해석하는 우리 역사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선생이 강조하는 '정신'은 그 함의가 너무 크고 막연하다 할지라도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여태 많은 역사서들이 비판없이 서술했던 이성계의 건국과 세종의 정치에 대해서도 그 덕 없음과, 그 뿌리없는 성과에 대해 예리하게 지적한다.  

감성과 넘치는 의기가 냉철한 이성의 힘을 때로는 뛰어넘는다. 역사는 의기로만 이끌어내거나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 위기를 이겨낼 땐 더더욱. 하염없이 쿨한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와 동시에 읽어나간 선생의 일갈, 두 전혀 다른 역사서는 묘하게도 '민중의 역사'로 접점을 찾았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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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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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나 빅터 프랭클의 ‘수용소에서’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수용소 이야기를 ‘고발’하는 많은 문학작품이 더럽고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정치적 고발, 인간성의 승리, 등등과 같은 가치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숨그네’에는 고발도 없고 의도한 계몽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이 작품이 수용소 이야기를 아름다운 문체 하나로 버텨내려 했다면, 그것은 노벨문학상 감이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할 일이었을 것이다. 짐승같은 치졸한 배고픈 고통스러운 비참한... 이런 단어들이 은빛 달과 아름다운 향기와 여러 가지 비유와 조어(造語)들로 승화된 이 작품이 폐허를 덮어버린 눈처럼 현실을 외면하는 이야기였다면, 아름다운 문장만큼 쓰레기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얼까, 언급하지 않는데도 피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그래서 결국은 바로 눈 앞에 그 비참을 마주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이 힘은.

수용소에서 배고파 흘리는 레오의 눈물은(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조차 궁극은 배고픔 때문이다) 너무 맑아서 다이아몬드 같다. 아니, 다이아몬드일 리가 없다. 아픔에서 벗어나려는, 피곤함에서 벗어나려는, 더러움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몸부림보다 더 깊은(사실은 더 바닥인) 배고픔에서 벗어나려는 눈물이 어찌 다이아몬드일 것인가.

불순물 하나 없이 순정하게 증류된 수증기가 얼음이 되었다. 지나치게 맑다. 너무 맑은 얼음은 분노하지 않는다. 저항도 없고 동료에 대해 잔인을 떨어댈 여지조차 없다. ‘숨그네’는 그렇게 바닥으로 내려가서 수용소의 아픔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한 마디의 고발도 없이 수용소가 닥닥 긁어 보여준 인간성의 맨바닥을 읽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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