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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모도티 ㅣ 삶과 전설 5
마거릿 훅스 지음, 윤길순 옮김 / 해냄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프리다 칼로를 읽을 때 티나 모도티를 알게 되었다. 불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에서 느끼는 신비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사진, 예술, 연애, 아름다움, (공산주의적) 활동가, 떠돌이... 내가 좋아하는 코드들이 그녀에게 있다.
무엇보다 나는 글과 도판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책들에 매료된다. 책이 너무 크긴 하지만 그 안에 흑백으로 여기저기 채워져 있는 사진 도판들도 좋았고 문장은 그다지 문학적이지 않지만 나름대로 충실한 글도 나쁘지 않았다. 두께에 비해 술술 읽히는 게 쉬운 문장 덕인지 종이가 두꺼운 덕인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티나처럼 '문란한', 게다가 진보적이라 자처하면서 문란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자유분방함과 성애적 이미지가 그녀의 활동들에 줄 수 있는 점수조차 깎아먹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마음도 있는 게 아닐까. '누군 그렇게 연애할 줄 몰라서 안 하니. 삶이란 게 그렇게 맘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있는 게야, 이사람아' 게다가 도덕률이 가장 앞서야 하는 활동가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아무리 내가 다양한 세상사에 마음을 열려 해도 잘 되지 않는 대목이다. 아무리 영화에서라도 무자비한 인명살상은 영화를 위한 장치로도 편히 봐줄 수 없는 것처럼, 이런 내 모습을 편협하다 해도 할 수 없다.
그녀는 떠돌면서 외롭지 않았을까. 한없는 외로움은 그녀의 예술적 감성과 아무래도 무슨 상관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책 속에서 그녀 삶 속에서 그런 외로움이 느껴졌다는 것은 아니다. 내 혼잣생각이다. 집을 떠나 홀로 강원도에서 자취할 때, 서울 가족에게 와서도 좌불안석, 강원도의 내 집에 가도 내 집이 아닌 듯한 어설픔에 오히려 고속도로 길바닥이 편안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한참을 살다 어느 날인가, 내게 그 '불안외롬증', '어디에도내집없는허무증'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이란 마음의 고향이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부모도 그것을 주진 못하는 것 같다. 내게 그런 고향같은 존재는 아이들이었나보다. 티나에겐 의미있는 고국도 오래 함께 살아온 배우자도 특히 아이도 없었다. 오직 예술과 사상, 그리고 동지들 뿐.
그래서, 티나는 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민족의식 핏줄의식 내나라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아니었겠지만 고국이 아닌 곳에서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그것은 끊임없는 외로움에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자기 사상을 위해 펼친 활동의 불안함과 더불어.
사상은 어떻게 예술과 만날까. 사상과 정치적 입장은 예술적 감성을 분명 제한한다. 그 둘 사이의 충돌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하던가. 티나만큼 자신의 '의식'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녀의 사진들은 메시지가 강하면서도 아름답다. 난 이런 게 좋다. 이래야 한다. 무뇌한 아름다움도 싫지만 의식을 내세우는 덜떨어진 예술 앞에서는 쩔쩔매게 된다. 당신의 고매한 사상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좀 아닌데요... 이렇게 말하기란 너무 미안해서... 그래서 티나 같은 사람은 고맙다. 게다가, 그 사람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배려와 따스함과 기분좋은 매력을 발휘한 사람 - 흔히 우리가 품성이 좋다고 말하는- 그런 인격 앞에서는 더욱 고마울 수밖에 없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비교적 고루 갖춘 사람, 고루 갖추려 평생 노력한 사람은 분명 있다. 체 게바라가 그랬고 언급하긴 뭣하지만 분명 우리 역사 속에도 있다. 내 주변의 범인 들 중에도 그렇게 전인(全人)적인 사람은 분명 있다. 가령 능력이나 외모 같은 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때론 그런 것조차 노력해서 더욱 갖추어 가는.. -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티나 모도티의 진정한 매력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20년 전쯤 케테 콜비츠를 처음 읽을 때 느꼈던 외로움 같은 게 좀 있다. 아직 사람들은 티나를 잘 모르나 싶어. 그렇지 않은 것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