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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학교는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니까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도록 만드는 게 선생의 임무가 맞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아이들이 공부를 다 잘할 수는 없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쁘게 태어난 아이도 있고 기질적으로 학교라는 규범적 틀 속에서는 자기의 재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 학교가 아무리 잘 해도 가정에서 이미 얼크러져 버린 실타래를 풀어주기엔 역부족인 경우도 무수히 많다. 그래서 학교는 그야말로 아이들의 기초학력을 받쳐주도록 하는 노력을 기본으로 하되, 저 바닥에서부터 못 쫓아오고 허덕이는 아이들까지도 다 품고 함께 가 주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동물들은 나약한 새끼를 버리고 강한 놈만 키우기도 한다지만 인간은 이성과 영혼으로 약하고 병들고 못나빠진 것들도 품는다. 특히 인간의 어미들은 그래서 더더욱 약하고 못난 것들을 연민한다. 인간의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것은 그의 재능이나 강함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으로서, 학교가 어머니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의무교육'에 대해 합의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아이큐가 75일지라도 중학교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합의가 아닐까. 아무리 문제아라도 아무리 전국 꼴찌라도 학교가 아이를 버리면 안 된다.
동구는 착한 아이이다. 좀더 깊게 말하면 영혼이 아름다운 아이이다. 사실은 매우 사려깊고 어른스러운 아이다. 따뜻한 아이이다. 인간이 갖춰야 할 최고의 가치를 지닌 동구는 그러나 지진아다. 난독증인지 아닌지 끝내 밝혀지진 않았지만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아이이다. 타고 난 것인지 가정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이의 지적 능력의 발달을 막았는지를 불명확하지만 동구는 '기초학력부진아'이다.
나는 늘 이런 상황에서 곤혼스러워했다. 아이는 너무 착하고 바른데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고, 지지리 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 그리하여 아이의 불행이 지금에 불행에 보태어져 미래까지 연장될 게 뻔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마냥 그 아이에게 근거없는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만도 없을 때 말이다. 그런 아이들을 너무 많이 만나왔다. 시군 단위 모의고사에 그 아이가 안 나와주면 고마운 그런 아이 말이다. 왜 그 아이를 붙잡고 부진아를 탈출하도록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묻지는 마시라. 그런 몸부림의 한계를 온 몸으로 겪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혹은 '창가의 토토' 같은 작품을 읽을 때의 감동과 비슷하면서도 조금더 토속적이고 현실적인 느낌으로 나는 동구네 식구들을 들여다 보았다. 어린 시절 자주 놀러갔던 달동네 친구네 같은 동구네 마을,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등장 초기부터 불길하고 불안했던 영주, 손끝이 야물면서도 성정이 우울한 것이 어쩐지 나의 어머니와 너무 닮아서 마음이 떨리던 동구의 엄마...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구의 3학년 담임 선생님을 보라. 이렇게 감동적인 선생님이 등장하는 성장소설 이야기가 대개 그러하듯이 박선생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똑똑하고, 결국은 신비롭고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소설 속 인물이라지만 현실 속에서도 그와 비슷한 교사들도 많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 주고 이야기하도록 만들어 주고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교사들 말이다.
동구가 3학년 때 학업성취에서 대성공을 이루고 말았다면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읽듯이 조금은 기분이 뻣뻣해졌을지도 모른다. 동구의 뜨거운 학구열과 선생님에 대한 사랑은 4학년 진급으로 지독하게 좌절되고 말기에 소설은 더욱 현실감이 느껴진다. 비록 사랑하는 박선생님이 너무 황망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려서 그 현실감이 조금 덜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 교사가 아이를 만나는 장면을 보게 되면 나는 나의 수업과 만남을 돌아보게 된다. 적당히 아이를 위해 노력하다 말다 하지는 않았는지,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끝까지 붙잡고 함께 가진 못하겠다고 스스로 변명하지는 않았는지...
'정원'은 동구의 유년기이다. 어른이 되어 혹 그 삼층집 정원을 보게 된다면 그 시시함에 한숨이 나올지도 모른다. 마치 나의 잃어버린 보물상자 속의 허섭쓰레기 같은 수첩, 목걸이, 껌, 볼펜 따위가 지금은 사라져 버렸기에 마냥 신비롭게 그립지, 정작 아직도 어느 구석에선가 발견된다면 그 초라함에 나의 유년기가 몹서 서러울지도 모를 일인 것처럼. 누구나 삶의 어느 계단에 서서 오르거나 내려야 할 때가 되면 버리고 이별해야 할 것이 있다. 가슴에 묻고, 대문을 걸어 잠그어야 하는 자기만의 정원이 있다. 삶의 길목마다 그런 정원, 그런 보물상자들이 문이 닫히고 버려지면서 나의 영혼을 성숙시켰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구는.비록 학교에서 지진아였을망정 자기 삶의 성장과정에서 자기가 간직해야 할 것과 이제 그만 접어야 할 것을 잘 아는 아주 성숙한 아이였다.
이 소설은 급격한 반전이나 과격한 충격으로 재미를 주기보다(사실 영주와 박선생의 죽음, 엄마의 정신병원 입원 등은 과격한 스토리임에 틀림없긴 하다.) 동구의 범상한 성장의 과정에 작은 켜켜들로 이야기들이 쌓이는 데 더 미덕이 있었던 것 같다. 동구는 결국 자신의 부진함을 극복하지도 못했고 가정에 쌓여있는 불운의 원인인 할머니와 엄마의 갈등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세상이 어떻든 잔인하든 무뚝뚝하든, 영혼이 맑은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자라나서 이별할 것들 다시 만날 것들을 잘 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책은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지만 이것을 읽으면서 교사인 나는 한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게도 동구같은 제자들이 많다. 아이들이 졸업할 때, 너, 정말 바르게 잘 자라서 잘 살아야 한다, 너처럼 착한 녀석들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란 걸 꼭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당부한다. 확신을 갖기 어려운 불안한 기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 아닌 가난과 무능력이 그들을 방외자로 만들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나는 오래오래, 사라지지 않고, 박영은 선생처럼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 마음을 읽어주는 선생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