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하라 -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지음, 차미례 옮김 / 삼천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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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운동의 경계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정치는 나쁘다, 정치는 권모술수의 집합체이다, 라고 말한다. 그 사람은 정치할 사람이 아니야, 참 정치적인 사람이야, 라는 말들도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를 반영한 말들이다. 

제자 중에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아이가 있다. 참 맑고 순수한 녀석이다. 의외이기도 하고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 좋은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사람들은 그가 '운동' 혹은 '투쟁'을 한다고 하지 정치를 한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아이는 노통의 죽음을 겪으면서 자기가 뛰어들려는 정치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를 맛보았다. 정치를 하기에 녀석은 뻔뻔스러운 사람이 못되는 걸까. 

빅토르 하라는 예술인이었다. 그에게 여러 면모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그를 칠레 아옌데 정부의 문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공산주의자라고 기억하기보다 비극적으로 죽어간 가수라고 기억을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어떤 직함을 지닐 수도 있지만 시인은 끝내 시인이고 교사는 끝내 교사인 것이다.  

전에 빅토르 하라의 시 몇 편과 그의 행적을 짧게 어디선가 보았었다. 그 짧은 시들에서도 전율을 느꼈다. 대개 그렇게 신비감을 느끼는 경우 구체적인 행적을 찾게 읽게 되면, 생각보다 치졸했거나 생각보다 적이 많았거나 생각보다 정치적(!)이었거나.. 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두꺼운 하라의 전기문을 읽고 나서 잠깐의 그의 이미지는 더욱 상향 증폭되어 내 가슴에 남는다. 이 전기문이 르포 작가나 글쟁이가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인 조안 하라가 쓴 것이라서 남편을 미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을 읽어 보면 조안 하라는 글을 꾸미거나 가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빅토르 하라는 분명 출중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노래, 시, 연극, 문화운동의 기획자, 정치활동가로서, 대중운동가로서. 그러나 왠지 그가 대단한 천재나 뛰어난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는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연극 연출을 할 때나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권위를 내세우거나 지시하기보다 자기보다 낮은 권위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동기를 유발시켰다 하니 이야말로 진정한 리더쉽이 아닐까 싶다. 교사로서도 아이들을 대할 때 폭력이나 권위나 두려움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의 요구와 자신감이에서 학습의 동기가 추동되도록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이가 진정 유능한 교사라 할 수 있다. 

빅토르가 5000여 명의 민주화 인사, 학생들과 함께  에스타디오 칠레에서 학살되던 그 일주일, 열흘의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의 최후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로 옆에서 예감하고 겪어나갔던 그 아내의 심경을 너무나 생생하게 읽으면서, 좀처럼, 책 속의 그 사람들과 거리두기를 할 수 없어서 가슴이 먹먹했다. 조안 하라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진실했다. 읽는 내내 그녀의 문장력에 감탄했는데 이것은 또한 번역을 맡은 차미례의 미덕인지도 모르겠다. 소설도 아닌데 지루할 틈이 없는 이 글솜씨의 정체가 무얼까 궁금하다. 

그래서 이 책을 마치고 난 뒤, 슬픔과 아쉬움과 궁금증을 모아 역자후기까지 다 읽었다. 마침 5공 청문회가 열리던 당시 극적으로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라는 영화가 kbs에서 방영되게 된 사연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영화 자막 번역으로 밤을 새는 차미례의 아름다운 열정이 읽혔다. 이 사람은  돈을 위해 번역하는 사람이 아니다. 때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마 자기 손에 들어온 작품에는 늘 열정과 몰입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 같다. 번역가를 돌아보지 않는 우리 독서풍토에서도 이 책 꽤 괜찮네, 하면서 역자가 누군지 살펴보면 거기 차미례가 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나는 보지 못한 영화이지만 그녀마저 그 영화 번역을 고사했다면 사람들의 뇌리에 광주와 함께 오버랩되던 칠레 항쟁의 영화는 불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꼭 그 프랑스 영화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를 보고 싶었으나 구입을 할 수도 대여를 할 수도 없다. 언젠가 꼭 보고 싶다. 잠깐이나마 빅토르를  의미하는 그 가수도 영화속에서나마 만나도 싶다.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낙관의 노래를 불러주던 진정한 민중가수, 그러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참으로 정치적이었던 하라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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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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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이상과 안 읽은 작품이 더 많은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이 흥미있었던 부분은 이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째서 이상은 이리도 신비화가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설령 그가 데드마스크를 떴다 하더라도 혹은 그게 유실됐다 하더라도 혹은 그게 조작됐다 하더라도, 그가 죽을 때 레몬 냄새가 맡고 싶었든지 멜론을 먹고 싶었든지, 하, 그게 뭐 어쨌다고... 

어쩌면 일본 문인의 문투를 흉내내서 지멋대로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뒤섞는 장난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해석하면서 후손들은 이마에 심각한 주름을 짓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무식한 생각도 해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이상은 충분히 재미난 소설의 소재가 된다는 점, 남긴 것이 적기에 추리적 기법에는 더더군다나 딱 어울리는 멋진 소재라는 것, 개인적으로 이상의 작품에서 답답했던 논리성, 합리성을 오히려 김연수 소설에서 명쾌하게 발견하게 된 이 아이러니가 재미있다는 것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성수의 말대로, 문인들(뿐 아니라 어떠한 문화적 성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의 흔적에 대해 너무 배려가 없는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정서의 궁핍함과, 자료라 할 것들도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우리의 역사적 조건의 궁핍함이 또한 소설 읽는 내내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지 못하는 것들은 신비화된다. 무한 추측을 낳는다. 영화로 만들어지고 소설로 쓰이고, 소설 속에서 위작이 나올 만큼 이상은 신비화되었다. 

김연수는 달콤하지 않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소설보다도 작가후기가 달콤하다. 가끔 예술가들에게 꿈이 작품을 현몽한다더니 그에게 이 소설은 그렇게 다가왔다는 것 아닌가. 꿈에서 본 헌책방에서 읽은, 아직 세상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소설들, 그 중 하나 '꾿빠이 이상'... 만약 이 작가후기가 '소설'이 아니라면 김연수는 분명 타고난 축복받은 소설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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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방 - 아나운서 김지은, 현대미술작가 10인의 작업실을 열다
김지은 지음, 김수자 그림 / 서해문집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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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 보인다, 이 사람. 

직접 강좌에 등록해 돌을 쪼아대던 김지은 아나운서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아름다운 건 외모가 아름답거나 똑똑하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열정이 있을 때 사람은 아름답다. 열정은 그 사람에게 길을 열어준다. 눈도 열어준다. 내게도 미친듯이 바라는 일에 열망을 가지고 몸을 움직였을 때 길이 열리던 경험이 있다. 아직은 내게 멀게 느껴지는 일들도 그렇게 열리리라. 

독특한 예술적 시도들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우선 안목을 열어주는 것이리라. 이건 도대체 뭐야, 하는 마음은, 미술을 빙자하여 창의를 들먹이며 이상한 (사실 그것들도 무의미한 시도들만은 아닐 것이나) '작업'들을 하는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실망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이한 실험을 벌이는 젊은 시인들의 쓰레기더미에서 진정한 시를 찾는 일이 피곤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김지은 씨는 나처럼 삐닥하게 비판적으로 보기보다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에 오호~? 재미있는데? 하면서 다가가 준다. 그런 눈이 보석을 발견할 수 있다. 열린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아주 중요한 자세임을 새삼 깨닫는다. 

여기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한결같이 신화적인 재능들이 있다. 얼마나 무수하게, 손으로 기능을 익혔으되 천재적이지는 않은 미술학도들이 있는가 말이다. 그러나 운좋게 미술적 재능을 타고났다고만 말하기에는 여기 등장하는 이들의 열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뜨겁다. 나는 김동범과 손동현에 끌린다. 그리고 언젠가 다른 책에서(미안하게도 전시는 아닌) 접하고 감동했던 윤석남 씨의 작업에도 마음이 간다. 이 책은 전문서나 학술적 성격의 책은 아니지만 문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좋은 책이다. 아트 센터나 작은 갤러리에 가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앨리스의 문을 만난 것 같은 희열을 맛볼 때가 있는데 책 한 권으로 그런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다만, 여기 소개된 사람들이 이미 너무 유명해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이전 책 '서늘한 미인'에 못미치는 점이긴 하다. 그거야 내가 책에 바라는 바와 책을 만든 이들의 목표가 달라서 그런 거지 저자나 기획자의 잘못은 아니다. 

김지은 씨,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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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곰브리치 세계사 1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이내금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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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곰브리치를 좋아한다. 그의 '서양미술사'를 너무 달게 읽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인용을 할 수는 없지만 문학적인 글솜씨로 미술사를 행간을 읽어주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 두꺼운 책을 읽는 겨울방학 내내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사회'에 젬병인 우리 아이들을 위해 이 책을 샀다. 리뷰 쓴 것을 보니 중학생에게 권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고 실제로 곰브리치도 자기 손주를 위해 이 글을 썼다던가 하지만 일반적인 중학생들이 과연 쉽게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회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면 문제 없겠지만. 

이 책은 요즘 흔히 나오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사회사 세계사 국사 경제 따위의 책들과는 좀 다르다. 대부분의 책들이 우리 중고등학교 사회에서 사루고 있는 영역을 좀 재밌게 접근하려고 노력한 책들이지만 곰브리치야 물론 당연히 21세기 대한민국의 사회교과를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므로 다루고 있는 영역도 다가가는 방식도 다르다. 국가로 분화되기 전 혹은 그 과정상의 유럽 여러 나라들의 분쟁과 연합은 우리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프랑스의 왕이 오스트리아를 다스리기도 하는 따위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교과서에서 생략되기도 하고 정리되기도 한 부분을 곰브리치는 비교적 자세히 다루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읽힐까 싶어 술술 읽어나갔지만 그래도 내가 밑줄친 부분이 있다. 특히 학교 다닐 때 늘 잘 풀리지 않는 문제처럼 가슴에 묵직히 얹혀 있던 단어 '계몽주의'에 관한 부분이다. 

아이들은 매질을 해야한다. 여자들은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농부는 일하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불평해서는 안 된다....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생각을 하던 시대에 '관용과 이성'으로서 모든 인간의 똑같은 권리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세상이 온다. 이것이 바로 18세기초에 등장한 계몽사상이다.  계몽주의를 배우면서 그게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아니, 그 말뜻- 남을 가르치고 깨우친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 되고 그저 달달 외워서 그 시기를 극복했던 내게 이토록 계몽주의를 명쾌하게 설명한 책이 없었다. 사회 시간엔 왜 이게 안 됐을까? 아니, 분명 나의 몇 분 사회선생님 중에는 이와 같이 쉽게 설명한 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교실의 어떤 공기가 그것이 내 뇌 속으로 쏙 들어오는 걸 막았겠지 ㅋ 

곰브리치의 시각이 완전히 새롭거나 진보적이거나 창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 주류의 역사 서술 방법과는 조금 다르다. 전공이 아니어서 좀더 자유로웠는지도 모른다. 예술사를 썼던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의 학급문고 목록에 이것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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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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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니까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도록 만드는 게 선생의 임무가 맞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아이들이 공부를 다 잘할 수는 없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쁘게 태어난 아이도 있고 기질적으로 학교라는 규범적 틀 속에서는 자기의 재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 학교가 아무리 잘 해도 가정에서 이미 얼크러져 버린 실타래를 풀어주기엔 역부족인 경우도 무수히 많다. 그래서 학교는 그야말로 아이들의 기초학력을 받쳐주도록 하는 노력을 기본으로 하되, 저 바닥에서부터 못 쫓아오고 허덕이는 아이들까지도 다 품고 함께 가 주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동물들은 나약한 새끼를 버리고 강한 놈만 키우기도 한다지만 인간은 이성과 영혼으로 약하고 병들고 못나빠진 것들도 품는다. 특히 인간의 어미들은 그래서 더더욱 약하고 못난 것들을 연민한다. 인간의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것은 그의 재능이나 강함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으로서, 학교가 어머니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의무교육'에 대해 합의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아이큐가 75일지라도 중학교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합의가 아닐까. 아무리 문제아라도 아무리 전국 꼴찌라도 학교가 아이를 버리면 안 된다. 

동구는 착한 아이이다. 좀더 깊게 말하면 영혼이 아름다운 아이이다. 사실은 매우 사려깊고 어른스러운 아이다. 따뜻한 아이이다. 인간이 갖춰야 할 최고의 가치를 지닌 동구는 그러나 지진아다. 난독증인지 아닌지 끝내 밝혀지진 않았지만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아이이다. 타고 난 것인지 가정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이의 지적 능력의 발달을 막았는지를 불명확하지만 동구는 '기초학력부진아'이다. 

나는 늘 이런 상황에서 곤혼스러워했다. 아이는 너무 착하고 바른데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고, 지지리 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 그리하여 아이의 불행이 지금에 불행에 보태어져 미래까지 연장될 게 뻔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마냥 그 아이에게 근거없는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만도 없을 때 말이다. 그런 아이들을 너무 많이 만나왔다. 시군 단위 모의고사에 그 아이가 안 나와주면 고마운 그런 아이 말이다. 왜 그 아이를 붙잡고 부진아를 탈출하도록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묻지는 마시라. 그런 몸부림의 한계를 온 몸으로 겪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혹은 '창가의 토토' 같은 작품을 읽을 때의 감동과 비슷하면서도 조금더 토속적이고 현실적인 느낌으로 나는 동구네 식구들을 들여다 보았다. 어린 시절 자주 놀러갔던 달동네 친구네 같은 동구네 마을,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등장 초기부터 불길하고 불안했던 영주, 손끝이 야물면서도 성정이 우울한 것이 어쩐지 나의 어머니와 너무 닮아서 마음이 떨리던 동구의 엄마...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구의 3학년 담임 선생님을 보라. 이렇게 감동적인 선생님이 등장하는 성장소설 이야기가 대개 그러하듯이 박선생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똑똑하고, 결국은 신비롭고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소설 속 인물이라지만 현실 속에서도 그와 비슷한 교사들도 많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 주고 이야기하도록 만들어 주고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교사들 말이다. 

동구가 3학년 때 학업성취에서 대성공을 이루고 말았다면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읽듯이 조금은 기분이 뻣뻣해졌을지도 모른다. 동구의 뜨거운 학구열과 선생님에 대한 사랑은 4학년 진급으로 지독하게 좌절되고 말기에 소설은 더욱 현실감이 느껴진다. 비록 사랑하는 박선생님이 너무 황망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려서 그 현실감이 조금 덜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 교사가 아이를 만나는 장면을 보게 되면 나는 나의 수업과 만남을 돌아보게 된다. 적당히 아이를 위해 노력하다 말다 하지는 않았는지,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끝까지 붙잡고 함께 가진 못하겠다고 스스로 변명하지는 않았는지... 

'정원'은 동구의 유년기이다. 어른이 되어 혹 그 삼층집 정원을 보게 된다면 그 시시함에 한숨이 나올지도 모른다. 마치 나의 잃어버린 보물상자 속의 허섭쓰레기 같은 수첩, 목걸이, 껌, 볼펜 따위가 지금은 사라져 버렸기에 마냥 신비롭게 그립지, 정작 아직도 어느 구석에선가 발견된다면 그 초라함에 나의 유년기가 몹서 서러울지도 모를 일인 것처럼. 누구나 삶의 어느 계단에 서서 오르거나 내려야 할 때가 되면 버리고 이별해야 할 것이 있다. 가슴에 묻고, 대문을 걸어 잠그어야 하는 자기만의 정원이 있다. 삶의 길목마다 그런 정원, 그런 보물상자들이 문이 닫히고 버려지면서 나의 영혼을 성숙시켰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구는.비록 학교에서 지진아였을망정 자기 삶의 성장과정에서 자기가 간직해야 할 것과 이제 그만 접어야 할 것을 잘 아는 아주 성숙한 아이였다.

이 소설은 급격한 반전이나 과격한 충격으로 재미를 주기보다(사실 영주와 박선생의 죽음, 엄마의 정신병원 입원 등은 과격한 스토리임에 틀림없긴 하다.) 동구의 범상한 성장의 과정에 작은 켜켜들로 이야기들이 쌓이는 데 더 미덕이 있었던 것 같다. 동구는 결국 자신의 부진함을 극복하지도 못했고 가정에 쌓여있는 불운의 원인인 할머니와 엄마의 갈등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세상이 어떻든 잔인하든 무뚝뚝하든, 영혼이 맑은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자라나서 이별할 것들 다시 만날 것들을 잘 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책은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지만 이것을 읽으면서 교사인 나는 한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게도 동구같은 제자들이 많다. 아이들이 졸업할 때, 너, 정말 바르게 잘 자라서 잘 살아야 한다, 너처럼 착한 녀석들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란 걸 꼭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당부한다. 확신을 갖기 어려운 불안한 기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 아닌 가난과 무능력이 그들을 방외자로 만들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나는 오래오래, 사라지지 않고, 박영은 선생처럼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 마음을 읽어주는 선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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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2-26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도 동구같은 아이들에게 따사로운 손 한번 내밀 줄 아는 선생이면 좋겠습니다.
그치만, 저는 얼마나 그런 아이들에게 귀찮다는 표시를 확확 내는 부족한 인간인지요. ㅠㅜ
오랜만에 선생님 글 읽으니 좋네요. ^^ 자주 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