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숲 1
이시키 마코토 지음, 유은영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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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이야기는 질색이다. 천재와 미인은 날벼락 맞은 사람이나 어쩌다 비참한 가정에 태어난 아이와 다를 바 없는데도 자신의 노력에 상관없이 주어진 운명을 놓고도 잘난 체를 하기 때문에.

단, 천재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거리를 두고 초연할 수 있는, 재능은 재능으로 받아들여 겸손한 이. 그런 천재는 드물긴 했지만, 천재이기에 세상에 끼칠 수 있는 영향과 더불어 인간적 귀감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다.

이 만화 속에도 엄청난 천재가 나온다. 그에게 재능은 반드시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천부적 재능은 피아노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이 만화 속 주인공 카이를 난 미워할 수 없다.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만화를 읽은 나의 아들은 2년 정도 배우던 피아노를 그만 둔 상태였다. 그런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나도 피아노를 다시 배울까? 그렇게 1년의 휴지기를 거쳐 다시 시작한 피아노, 이제 그는 아무 불평이 없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에. 그리고 한 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은 쉽게 그 길을 접거나 잊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난 내 아들의 단단해진 음악적 영혼이 어여쁘다. 그리고 저 어린 영혼을 다시 피아노 앞으로 불러준 이 작품을 단지 만화라고 홀대하고 싶지 않다. 고맙다. 이런 것을 '작품'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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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 비룡소의 그림동화 77
클로드 부종 글 그림, 최윤정 옮김 / 비룡소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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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정말 쓸모가 있다. 그 안에 재미난 이야기로 상상의 세계를 넓혀준다면 책으로 인해 세상의 문을 닫고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정신병자야말로 정작은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정신병자나 문을 닫고 책에 빠져 사는 사람이나 어쩌면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러나, 이 '아름다운 책'이 선언한 책의 쓸모는 딱딱한 표지로 늑대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었다. 단지 자기 방에 갇혀 읽는 책의 공상만으로는 책은 아름다울 수 없다. 책으로 인해 얻은 지혜와 말빨과 논리적인 생각의 능력 따위로 인해 우리는 방문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 돈도 벌고 사람들도 만나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좀더 나은 세상을 경영할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책은 진정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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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커트니 비룡소의 그림동화 29
존 버닝햄 글.그림, 고승희 옮김 / 비룡소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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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여기 등장하는 커트니는 '그 개가 온다'의 '개'와 많이 닮았다. 여유있고 재주 많고 아이들을 사랑한다.

둘째, 여기 등장하는 커트니는 그러고 보면 늙어가는 우리 부모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그렇구나. 그 세월이 다 인격에 반영되기만 하진 않을지 몰라도 나이듦이 대체로 사람을 지혜롭고 여유있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냄새나고 늙어 쓸모없다고 뒷전 취급받기 일쑤이다. 그 늙은 모습을 경제성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린 아이들, 아무리 멸시와 구박을 받아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할 수도, 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길 줄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우리 어버이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하고 쉬운 글 속에서 진정 삶을 깊이 바라보는 눈을 발견하듯이 남들은 그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고 부르는 책 속에 이러저러한 삶의 통찰을 담은 존 버닝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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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날 한 마리 개는
가브리엘 벵상 지음 / 홍성사 / 199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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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이미지도 안 뜨고 작가 이름도 안 나오는 이유가 뭘까? 이 책은 모니끄 마르땡이라는 벨기에 작가가 그린 크로키 북이다. 엄밀히 말하면 무작위적인 크로키 작품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여정을 따라 노출을 길게 하여 한컷 한컷 찍어 모은 듯한 이야기가 있는 스케치북이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하듯 그림을 함께 보며 공감의 감탄을 불러야 할 터인데 글로는 그 재미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 책의 그림의 마구 급히 그은 듯한 선 중 단 하나라도 허투루 쓰인 것이 없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고즈넉한 그 한 장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좋아하겠으나 이 사람의 작품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영화적 속도감과 선의 예술성과 버려지고 달려가야만 하는 개의 움직임과 표정 속에서 배어나오는 감성까지 다 즐길 수 있다.

단지 연필로만으로도 이렇게 그릴 수 있다니. 색채가 없어도 좋으니 평생 무채색으로만 그려도 좋으니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줄 수 없어도 좋으니 나도 이런 스케치북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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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루스 노부스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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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루스 노부스 - 그 근대적인 절망적인 무력한 천사의 모습. 한없이 고매한 영혼을 지녔으며 지적으로 성숙하고 감성적이기까지 하나 어딘가 멜랑꼴리한 그 천사, 머리가 유난히 큰 그 천사의 모습... 그 순하디 순한 모습에 우리의 독설가 진중권의 모습이 겹쳐지는 이유가 뭘까...

그는 팔팔하고 독설적이고 그리 비감해 보이지 않는데도 유순하기 짝이 없고 오히려 아름다움에서 멀어 보이는 이 천사의 모습이 진중권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혹시 몸이나 날개에 비해 큰 그 머리 때문이 아닌지...

이런 말들이 저자를 비웃는 말처럼 들릴 것 같지만 사실 진중권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이다. 그의 미덕은, 남들이 폼잡고 강단에서나 나불거리려 하는 '미학'을 거품 빼고 사람들한테 낮은 상에 먹음직하게 차려 주었다는 것. 미학 오딧세이를 읽으면서 그 전 숱한 미학 어쩌구 하는 개론서들에게서 느꼈던 배신감, 자괴감 들에게 통쾌하게 엿먹였던 기억이 난다.

그의 쉬운 미학은 열심히 모순들과 맞서려 드는 그의 열성과 맞물려 하나의 모델이 된다. 주류를 형성하진 않지만 그런 모습이 어떤 역할을 하고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뭐랄까, 미학 오딧세이가 대학 시절 입맛과 영양에 딱 맞았던 너무 맛난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그새 또 내 머릿속에 어설픈 미학 어쩌구 들이 들어와 입맛이 나름대로 다양해져서 그런가, 아니면(이것이 진실이 아닐까?) 그가 마감에 쫓기거나 글을 빨리 쓸 욕심에 이전에 생각해 둔 혹은 메모해 둔 이러저러한 생각거리들을 모양이 되는대로 주제별로 엮어 썼기 때문일까(그가 아니라고, 책 읽은 당신이 내가 한 소릴 알아듣고 정리할 기본교양이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준다면 뭐 그냥 받아들이지 뭐), 그의 글들은 도대체 어떤 줄기를 가지고 모아지고 엮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대 순인가? 그 중 언급할(하고 싶은) 주제들을 모아 보았나?.... 내가 보기엔 신들린 듯 공부하던 시절에 그의 머릿 속에 떠오르던 수많은 의문과 정리된 바들의 집약이 아닌지.... 그림들, 그리고 양장본의 특이한 판형... 들고다니면 폼나는 이 책, 게다가 제목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으면 뭔 뜻인지 알 수 없는 '앙겔루스 노부스'....

나는 그림 보는 재미로 끝까지 읽었다. 물론 디오게네스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다. 역시 진중권 말빨은 참 '쥑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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