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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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나와 비슷한 시기 혹은 조금 이전에 어린 시절을 보냈을 법한 작가의 정서는 매우매우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니, 헷갈리면 안되겠구나, 작가가 아니라 서술자.

어쨌든 '나'가 인천 어느 동네에서 어린 시절 자기가 살던 동두천의 비슷한 냄새를 감지하고 영혼을 넋을 풀어놓을 때의 기분을 나는 알 것만 같았다. 답십리 부근을 지날 때나 삼척시의 정라진 부근 마을을 거닐 때 느끼는 가슴 턱 막히는 이상한 정감과 슬픔 같고 전생 같은 추억.

사라져 버린 70년대의 어린 시절이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그립고도 시린 추억은 답십리의 야학과 삼척의 초임교사 시절의 자취방이겠지만,  어쩌면 매우 개인적이거나, 역사적이라 할지라도 조금은 빗겨 있는 무엇일 수도 있겠지만, '거대한 뿌리'가 말하는 그 쌉싸름한 정겨움은 조금 그 깊이가 다르다.

동두천은 어떤 이름인가. 대학시절, 자기 누나가 양공주라고 술자리마다 눈물바람을 하던 어떤 선배의 넋두리가 생각난다. 양공주라는 이름은 슬프고 더러운 그 무엇이었다.  기지촌 이야기를 리얼하게, 어른들의 삶으로 치열하게, 추저분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렇게 그린 소설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한국이 분단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입었던 상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 작품들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르다.

읽으면서 나는 청소년 소설이기에 약간의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던 나의 첫생각을 버렸다. 나는 어느 새 비슷한 시기의 정서는 같고 경험은 다른 나의 유년과 청소년기로 젖어 들었고 거기서 약간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사춘기인 내 아들에게 이 글을 읽히는 상상을 했다. 학교의 아이들과 어떻게 읽고 이야기를 나눌까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일이 신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재미를 떠나 그들은 이 이야기의 울림에 어떤 공감대를 가질지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서 더더욱 이 책을 권해야 한다. 이 책이 아니고 우리의 10대들과 미군의 주둔과 그것으로 인해 삶이 좌우된 사람들(심지어는 서술자처럼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은 관찰자의 인생에까지 말이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책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김중미의 글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이런 것이구나 알겠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지 않았는데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알겠다. 쉽고 재밌다. 너무 쉽게 술술 읽힌다 싶을 만큼. 기지촌 사람들의 삶과 아픔이 오늘 날의 이주노동자와 아픈 사랑을 나누는 '정아' 이야기로 올 때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시대적 문제제기가 된다.  무거운 과제를 쉬운 이야기로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시대의 작가의 임무라면 김중미가 그것을 제대로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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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오영욱 지음 / 샘터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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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황지우의 전시회가 열렸던 때가... 나는 부러웠다. 시인 황지우가 조소도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자기그림을 모아놓은 스케치북이 있다는 사실이.

나의 소원 중에 내 그림과 시가 모여있는 공책을 갖는 것이 있다. 그저 소원이 그치지 않을 만큼 큰 꿈이다.

"왜, 책으로 내게?"

누가 내게 그렇게 물었지만 책으로 낼 '작품'들이 아님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낙서처럼 아무 데나, 여행 다닐 때마다 여기저기 끄적여놓은 그림들과 시들을 잘 모으고 또 실력도 닦아서 더 잘 그려볼 날을 꿈꾼다.

"그럼 죽고 나서 그건 뭐하게?"

아니, 죽고 나면... 딸아이에게 물려줄까 아님 그냥 죽을 때 갖고 가지 뭐. 그래도 갖고 싶다구.

오영욱 씨 행복해 보인다. 그의 그림은 예쁘기도 하고 정교하기도 하다. 뭐랄까 정통예술(그런 게 있기는 한지 원~) 냄새는 안 나긴 하는데(건축전공이라니 그런 실용미술적 기능과 타고난 감성의 결합 같은... 그러니까 콘테가 아닌 로트링 펜으로 그린 스케치가 주는 기능성과 살짝 토핑된 에술가적 감성, 거기에 떠돌이 기질이 주는 자유로운 냄새...) 암튼 솜씨가 뛰어나다. 그림을 그리면서 혼자 여행을 할 수 있다니, 참 좋았겠다. 아, 부럽다....! 여행, 스케치, 스케치 여행, 여행 스케치....

나 대신 많이 다니시오. 대리만족이라도 느끼게. 혹은 나도 언젠가 가야지. 특히 스페인. 물론 두 책 중 내가 가 본 곳이 많은 이 책을 아직 안 가본 스페인 여행기 대신 샀지만., 나도 가우디의 나라 스페인에 언젠가 가 볼 것이다. 고 직전 혹은 직후에 그 책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도 사 보리라.  오기사, 그림 맘에 들어요~. 여행기는 뭐, 산뜻한 정도(그러고 보니 산뜻한 사람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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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읽어주는 남자 - 오페라 속에 숨어 있는 7가지 색깔의 사랑 이야기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2
김학민 지음 / 명진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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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뮤지컬을 더 좋아하지만, 그래서 무대 위의 오페라를 본 기억이 많진 않지만 언젠가 충분히 오페라도 즐기게 될 날이 오리라 믿으며 이 책을 펼쳐들었다.(사실은 글샘의 서평을 읽고 찜~)

비록 1만원 짜리,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 4층 꼭대기에서지만 라보엠의 기억이 오래도록 가시질 않는데 오페라 하우스가 아니라면,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이라면, 시간만 맞는다면, 남편이 같이 가주기만 한다면 가서 오페라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오페라 자체가 자주 열리지도 않거니와 다른 조건들을 다 충족시키지 못하니까.

그래서 대신 유명한 아리아들만을 녹음해 듣기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볼 수 있는 가벼운 작품을 찾아 다니기도 하는데 역시 뭐랄까, 뮤지컬 같은 재미는 없다. 뮤지컬에서 주인공이 절규하듯 내지르는 열창에 소름끼치는 감동을 얻기에 오페라는 너무 점잖은 면이 있다. 가끔은 너무 늙은 아이다한테 실망하여 그 노래솜씨에 차마 감탄하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외모는 그렇다치고 노래와 연기까지 삼박자를 맞출 수 있는 캐스팅이 어려워서인지 무표정한 얼굴로 사랑의 아리아를 부르는 배우, 아니 오페라 가수를 보면 역시 뮤지컬을 보고 싶어지곤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더더군다 뮤지컬을 매우매우 좋아하는 남편을 꼬시기는 더욱 어렵고 '나 혼자 보러간다~' 했다가도 그 돈 있으면 뮤지컬을 보자!고 윽박지름을 당하기도 해야 했던 것이다.

8년 전쯤, 귀수술을 해야 했을 때 동료가, 청력이 좋아지면 들으라고 '노르마'라는 오페라 녹음테잎을 선물한 일이 있었다. 나의 귀는 수술을 해도 청력이 회복되지 않는 심각한 상태였지만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그 테잎을 열심히 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거의(전혀?) 공연되지 않는다는 그 오페라는 언젠가 보고 싶다, 언젠가. 선율이 귀에 익으니 줄거리나 연기와 상관없이, 노르마가 뚱뚱한 할머니라 할지라도 열심히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책,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무대미술의 초안인 듯 싶은 그림들도 좋았다. 보통은 공연사진을 실을 법도 한테 지은이는 무대미술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보여준다. 그런 센스가 마음에 든다. 글은, 특별한 연출 비하인드 스토리나 조금은 전문적인 평이나 작곡가와 관련된 에피소드 등 다른 책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도 없이 그저 오페라의 줄거리만 쉽게 소개하는 정도이다. 거기에 대한 감상도 대단히 감각적이거나 독특하진 않다. 그래도 오페라를 쉽게 이해하게 해준다는 게 미덕인 듯 싶다.

음악하는 사람에게도 얼핏 이야기한 적도 있지만, 오페라의 줄거리만 추려보라. 3류 소설이 아닌가. 그런데 화려한 의상과 음폭이 넓은 가수들의 노래로 고급예술 취급을 받고 있다. 문학성 즉 '메시지'라는 면에서 오페라를 살피면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래면 노래, 혹은 무대미술 등 무언가 오페라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 요소들 무엇인가를 위하여 기꺼이 다른 비판적 감각을 잠재우고 갈 일이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눈도 귀와 함께 마음 더불어 함께 틔일 날이 오리라.아직 나는 오페라 초보 감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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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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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를 본격적으로 읽어봐야겠다고 늘 생각해 오다가 이 책을 구입했다. 사실은 시를 보려 했던 것인데 그림책을 산 느낌이랄까.

일어는 글자조차 모르는 입장이라 몇몇 한자를 빼고는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차피 외국 시는 그 감성을 100%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이리라. 그래도 이건 아니다. 나도 짧고 진한(?) 시들을 좋아한다. 단 한 줄이 아니라 한 귀절만을 위해서 그 시집을 사버린 기억도 많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는 그런 단 한줄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그게, 번역의 문제인지 정서의 차이인지를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감탄한 건 시와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그림들이었다. 바로 그 시를 위해 그린 그림들은 아니었을 듯한데 그렇게 시의 분위기와 비슷한 그림들을 잘 찾아냈을까 말이다. 그리고 그림들은, 인상파 화가들의 영감에 불꽃을 튀겨줄만큼 감각적이다. 지금의 일본이 애니메이션의 왕국으로서 상업적으로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성공하게 된 바탕이 여기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예술적으로 뛰어난 그림들이다, 라는 면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회화(특히 동양화의 점잖으리만치의 절제감)의 공식을 비교적 자유롭게 넘어선다는 느낌이 드는데 중국에서 멀어서(지리적으로가 아니라 통제나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일본인들 특유의 분방함이 거기 배어있는 듯도 싶다.

에도 시절 혹은 그 이후의 회화가 얼마나 많이 그려지고 남겨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조선시대 회화보다 다양하고 양적으로 풍부한 느낌이 드는 것은 시와의 조화에서 받은 느낌이다. 그 느낌이  맞다면 어디서 오는 차이일까 하는 생각이 또 든다. 일본 여행을 갈 때마다 내가 가장 부러운 것은 깨끗한 거리, 질서있고 친절한 사람들, 경제적인 성취가 아니라 아직도 곳곳에 (심지어 동경 뒷골목에까지) 남아있는 오래된 전통가옥들이었다.  저희들은 임진왜란때와 일제식민지 시절에 우리 땅에 들어와 수많은 유적을 파괴하고 가져가 놓고 운좋게도 저희것은 잘 지키고 있구나... 우리가 전통을 소홀히해서가 아니라 파괴 '당'하고 약탈'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회화는 단 느낌이 난다. 화과자와 같은 감성. 금방 애정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림 선들도 에도시대라 하는데도 매우 모던하다. 색채감도 그러하다. 불과 얼마 전에 그린 듯 선명한 저 색들의 비밀은 무엇인가 싶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우리 회화들은 원 채색의 빛이 살짝 바래져 있기 일쑤인데...  내가 서양인이라도 금방 혹할 수 있는 매력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왜 일까, 내가 우리 옛 회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그 기분, 조금 심심한 듯 하고 너무 고요한 듯하나 깊은 정신 세계로 들어가 명상에 빠지듯한 그 기분은, 일본인들도 일본의 회화를 사랑하는 서양인들도 그 맛을 잘 알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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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뜰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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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의 리뷰를 읽고 또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국어선생이 여태 오정희를 안 읽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고

나에게 오정희는 최승자의 시에 나타나는 이름이었다. 시에게는 마음을 열어도 소설에게는 냉담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최승자에게 '귀신같은 눈빛'만 남기는 이 소설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강은교는 얼굴도 시도 예뻤지만 처절했었는데, 오정희에게 그에게 있는 처연함과 비슷한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오정희를 읽지 않았다. 어쩌면, 읽다가 너무 아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멋모르고 최승자에 빠져 그녀의 시집과 번역집을 다 찾아 읽으며, 아픈데,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듯이 오정희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어.

그래서 번번히 들었던 책을 놓곤 했던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이 책을 들어 읽을 수 있는 건, 이제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아서, 혹은 뻔뻔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첫 기억이라는 건 너무 강렬한 것이어서 오정희에게 계속 최승자가 오버랩 되는 게 묘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역시 최승자는 정확한 느낌으로 이 사람을 읽었다 싶다.

신경숙이나 은희경이나 공지영에서 그랬을 것 같다. 그 작가들에게(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끊임없이 몸을 제기면서도 밑줄 긋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문구들을 발견하고 했던 것. 그런데 왜 안 그러는 걸까, 책을 거의 덮을 무렵 발견했다. 밑줄 긋고 싶을 만큼 베껴놓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문구는 없다. 그럼 뭔가. 남는 것은, 그녀의 낡고 오래된 집, 그것이 과거의 얼굴이든 미래의 얼굴이든 홀로 남은 집에서 문든문득 스치는 귀기같은, 그 분위기일까 오정희는....

나는 최승자를 읽을 때, 내가 살던 바닷가의  새벽에 홀로 흰옷을 흩날리며 춤을 추며 바다 속으로 스미는 여인을 자주 꿈으로 보았다. 분명 그건 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시 속의 그 여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시인이었거나 소설가였을지도 모른다. 바닷가에 살던 때로부터 거의 13년이 넘어가건만 별 재미도 없었건만 이 소설은 내게 그때 나를 보게 하는 묘한 힘을 지녔다. 추억이나 감상보다 더 원초적인 어떤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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