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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희망 ㅣ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보고 싶다.
전부터 쿠바는 가보고 싶은 나라 중 하나였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속의 체 게바라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어쩐지 관광으로 가기엔 미안하고 다니더라도 내 마음이 먼저 경건해질지도 모르는 그 나라.
학교 다닐 때, 내 눈에 멋져보이는 친구나 선배들은 공부를 잘 하고 글을 잘 쓰고 얼굴이 잘나고 선생님들께 사랑을 받는 부잣집 아이들이 아니었다. 공부는 그저 그런 것 같은데 잘 쓰는 글씨로 어려운 한문을 적어 매일 내게 편지를 전하던 나의 마니또, 영특한 머리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한 염세를 몇 줄의 글로 나타내며 선생들의 걱정을 받던 문예반 선배. 남들이 뭐라거나 말거나 성적이 나오거나 말거나 책에 코를 박고 살던 급우, 남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무심하던, 자기만의 정신세계에서 드높이 살던 그녀들... 이었다.
어쩌면 그 때가 사춘기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누군가에게 내가 꼭 그렇게, 남들 생각하는 가치로부터 자유로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남들 앞에서 무심하던 내 눈길 속에 살아남아야 한다고 고통스럽게 들끓던 생존의 욕구를 지우려 애쓰며 다른 세계를 바라보려 했을 뿐 사실은 남들과 똑같은 욕심에 시달리며 사는 나약한 여고생이 내 모습의 진실이듯이 그들도 사실은 그러했을 것이다.
어쩌면 쿠바의 실체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들에게는 한심할 정도로 꽉 막힌 못 사는 나라에 불과할 그 나라가 내게 한 없이 도도한 줏대의, 게다가 홀연 '모든 권력화를 지양'하며 세속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숲으로 간 게바라의, 그런 나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느린 희망'의 저자는 쿠바야말로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하나 남은 희망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낭만적으로만 여행을 떠나기에 그에게는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이 현실을 바라보는 감각이 있는 것 같다. 다만 그는, 완벽한 희망이 아닐지라도 이 미쳐 돌아가는 전지구 앞에 진정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 살아가야 할 태도에 대해 지구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그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거의 얼마 남지 않은 생각의 실마리로서 쿠바가 있다고, 사람들이 열심히 살고 있다고, 구호가 아닌 실천하는, 억압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혁명을 계속하고 또 계속하는 나라가 아직 어딘가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쿠바의 태도는 태연하고, 처연하다. 지구 사람들 모두가 꿈꾸는 것 - 뽀대나게 잘 먹고 잘 살기 -이 아니라 함께 잘 먹고 인간답게 잘 살기를 꿈꾸다 보니 어쩐지 다른 세상 사람들의 것 같은 눈빛을 가진 이 나라는 그래서 꿀리지도 않고 남을 부러워하지도 않는 듯이 보인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데, 난 어떻게 안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