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아이 여자아이 -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레너드 삭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 교사나 학부모, 특히 자기와 성(性)이 다른 자녀를 둔 학부모는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내가 있는 학교에서는 이 책으로 교사들이 독서토론 겸 연수를 했다. 이 책을 교재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그 책이 그렇게 좋은 책이냐고.

좋은 책? 감동을 주거나 유용하거나 재미있거나 의미있거나... 그런 책들을 좋은 책이라고 부르는데, 임상 보고서인  이 책이 과연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옳다'라고 단정하며 꼭 필요한 책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좀 있다. 남녀차별의 골이 메워지려면 아직도 천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 시대에, 남녀 아이들을 똑같이 가르치자 외쳐도 모자랄 판에, 제국주의의 유물인 남자고등학교 여자중학교를 벗어나 남녀 공학 속에서 올바른 성정체의식을 가르쳐도 모자랄 판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매우 다르니 다르게 교육하자'라고 주장하는 이 책은 오해의 여지도 많이 가지고 있고 위험할 수도 있고 선정적일 수도 있다. 그런 혐의가 들수록 이 책을 읽어 보시라고 권한다.

나는 남자 중학생들만 18년째 가르치고 있는 여교사이다. 집에는 중3짜리 남자 아이와 5학년짜리 여자 아이가 있다. 아직도 학교 아이들이 이쁘기 짝이 없지만 최근 몇 년, 남자 아이들의 수성(獸性)에 회의가 들곤 한다. 서열적 질서, 폭력성, 무배려... 그리고 내 아들이 점점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만하게 커가면서 아들에게서도 학교 아이들에게 넌더리냈던 면면들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싸잡아 '남자들은 애나 어른이나 다 그런 건가' 하는 회의가 들면서 사랑이 식는 느낌(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권태감이 드는 중이었다.

가령, 강압적 명령과 체벌보다는 대화와 설득을 방법으로 택하는 여교사들을 남학생들은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 때 교사가 느끼는 감정은 배신감, 그리고 남자의 비열함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감정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은 남자 아이들에게 교육적 의사소통 방법으로 적절한 것은 조곤조곤하고 섬세한 타이름이라기보다(그들은 대개 그것을 잔소리라고 여긴다) 짧고 강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의 행동의 수정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아이들이 대화와 상담, 인격적 존중 대신 폭력과 강압, 수직관계를 더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방법과 기법적인 면에서 그런 경향이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남자아이들이 '대체로' 그렇다고 하여 '모든' 남자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교사라면 아이들 하나하나의 개별적 특성을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는 능력과 노력이 있어야 하고 아이들이 40명이면 40명이 다 너무나도 다른, 빛나는 소우주임을 알아야 한다.  남자아이들은 이러이러하니 이렇게 다뤄야 해, 라는 교훈을 이 책에서 얻어가자는 뜻이 아니라, 가령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반응을 보일 때 도대체 저 녀석이 왜 저러지?가 아니라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과 달리 대체로 이러이러하다더라, 그러므로 저 행동은 교사인 나를 무시해서나 이 자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남자아이들의 일반적인 특성일 뿐이다, 이렇게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들의 여러가지 행동들, 부르면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 딸에 비해 책읽기를 싫어하는 것, 자기 아빠가 회사에서 하듯 회의식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시간을 못견뎌하는 것 따위들이 많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딸아이는 논리적이고 지적인데 아들 녀석은 그에  못 미치는구나, 가 아니라 일반적인 남자아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교사나 부모가 아이를 잘 가르치는 길의 제 1과 1항은 사랑하라, 그리고 이해하라, 이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교수법도 안 통한다. 여고 아이들을 가르치다 우리 남중으로 온 한 여선생님은, 자기 수업에 눈 반짝이는 여고생들의 반응은 거의 예술이었지만 남중 아이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며 한숨을 쉰다. 우리가 아이들의 특성을 잘 이해하면 아이들마다에 다른 수업방식, 교육방식을 개발하고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좋은 책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모든 주장과 증거들에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읽으면서 끊임없이 아, 그랬던 거구나! 아니, 정말 그렇단 말인가? 이게 정말 사실일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고 문제들을 만났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그리고 결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차별하라는 내용이 아니다. 흔히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말라, 고 말하는데 이 책은 바로 '차이'에 따른 교육방법에 대해 고민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5-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이를 인정하고, 제대로 알고 대하는 것이 중요하군요. 전 딸만 키우다보니
남자아이들의 성향(더군다나 사춘기 남자아이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짧고 강하게 지적하고 수정방향을 안내하는 방식, 이걸 모르고 저처럼 조근조근
말하고 있으면 잔소리만 되는군요. 좋은 책에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logos678 2007-05-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저도 중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있어요. 저에게 꼭 필요한 책인 것 같네요~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으로도 윤대녕이 좋아졌다라고 말하긴 어렵다. 여자 작가들은 자기를 대신함에 틀림없는 소설속 '여자'한테 너무 함몰되고 남자 작가들에게는 너무나 대상화된다. 오직 사랑의 대상. 윤대녕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늘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화자의 성적 대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별다르지 않다.  다만 이 책에서 이전 소설들의 자의식의 늪에서 오만한 눈빛에서 조금은 빠져나오려 애쓴, 그래서 이전에 자신의 '근원'에 대해 고민했던 그가 이제 사람들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게 된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말하자면 그도 늙어가는지 혹은 성숙하는지, 그런 인상이다.

하긴, 나에게,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리워하던 시절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만 그런 줄 알았다가, 남들은 생각도 환상도 없이 생활만 있는 줄 알았다가 사실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러한 아지 못할 그리움들이 있음을 나이들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해이다. 공감이겠지.

윤대녕의 공감이 서늘하다. 영영 다시는 돌아나오지 않을 대숲(나에게는 비오는 바닷가이다), 뭔가를 찾아헤매다니는, 바다를 바라보는 여행, 먼 곳을 다녀온 흔적 또는 추억,  집...그 이유가 어머니 혹은 아버지 혹은 생살 베어내듯 헤어진 정인이든, 무엇이든 사람들은 아득한 그 무엇을 하나씩 가지고 그걸 찾으려 애쓰거나 집착하거나 아예 거기로 가서 묻혀버린다. 차라리 행복해 보인다, 차라리 행복해 보인다...

하긴, 내가 소설을 쓴대도 남자의 존재를 이해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로부터 받은 사랑, 받고 싶었던 사랑을 소설에 녹여내기만도 바쁘고 달콤하고, 그 이상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이해를 해놓고도 윤대녕이 이 부분을 조금 극복해 주면 나는 그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 학교 - 달콤한 육아, 편안한 교육, 행복한 삶을 배우는
서형숙 지음 / 큰솔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째, 글쓴 이의 의도는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겠지만 결국 '좋은 대학 가기'가 오늘날 교육의 궁극적 목표임을 이 책이 오히려 부추기지는 않는지?

지은이가 존경스러웠고 교육방식도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어미로서의 자부심이 덧붙여진 것일지라도 그집 아이들, 한 번쯤 보고 싶을 만큼 괜찮은 아이들일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책이 출판이 될 수 있었고 뜰 수 있었던 결정타는 역시 그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갔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 떨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게 잘 키워진 아이들,  대학을 가지 않았거나 소위 말하는 별볼일 없는 대학을 갔더라도 그 아이들의 품성이며 자질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여러 갖춰야 할 바탕 중 일부이고 대학 입학에 자신의 실력만이 아닌 부수적인 것들이 작용한다 전제한다면 그집 아이들도 좋은 대학을 못 갔을 수도 있는데, 만약 그랬더라도 이 책이 이토록 칭송을 받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결국 오늘 날 대한민국에서 자녀 교육의 성공 여부는 좋은 대학을 갔나 못 갔나이고 이 책도 그런 열망에 사로잡힌 어미들 가슴에 호기심의 불을 지폈다고 본다.

둘째, 저자는 '사랑으로'라고 말하지만 과연 단지 '사랑만으로' 교육이 되는 것 맞는지.

서형숙 씨에 비하면 나는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 이의 정력, 열성, 인격 모두가 부럽다. 하지만 한 편, 나 역시 그이 못지않게 우리 아이들을 간절히 사랑하며 그이가 했던 방식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방식들로 교육을 해왔다. 교육이란 게 들이붓는 것(정성)과 반드시 상관관계가 있지만은 않음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확인하고, 다만 기대의 눈높이를 너무 높이지 말라고,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지금 힘겨워하고 빌빌거리는 저 아이들이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여전히 불행해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어보자고,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다독인다.

내 아이들(집과 학교의)은 어쩌면 좋은 대학을 못 갈지도 모른다. 아주 평범한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것이 '덜 성취한 것'이라 해도 그렇게 되게 된 데에 작용한 것들은 유전적인 것, 천성적인 것, 경제적인 것, 등등 많은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어미인 나의 부족함도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사교육에 휘둘리는 불행한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억지 학원 보내기 따위는 하지 않았고 다만 기회를 많이 만나게 해주려 시간 날 때마다 연극을 보고 캠프를 보내고, 집 마루를 온통 어지럽히고 창문 가득 그림을 그리게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런 내 아이들은 내세울 것도 무엇도 없고 학원도 학습지도 해 본 적이 없기에 공부도 잘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서형숙씨가 자녀들을 학원으로 내몰지 않아서 공부를 잘 하게 된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학원을 보내지 않아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라 믿는다. 나는 본질에 있어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집 아이들과 우리집 아이들을 달리 볼 것이다. 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니까. 좋은 대학을 간 아이들과 (어쩌면) 아닌 아이들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순수한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면서도 이 책을 읽으며 조금은 슬펐다, 고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수영 평전
최하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김수영 시가 내 감성과 잘 맞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금 준엄하게 고개를 숙이고, 그의 시를 받아들인다. 나는 좀 감성적인 편이고 그의 시는, 때로 격정적일 망정  감성적이라기보다 지성적이다. 그런 메마름은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좋아하진 않는다.

평전을 사면서 설Ž던 것은, 제대로 총괄적으로 읽어보지 못했던 그의 시를 모두 만나보리라는 야심과, 대개의  평전들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인간 냄새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동료 중에 김수영 시인의 인척이 있다. 나는 그의 친근한 반응을 기대하며 내가 김수영 평전을 샀으며 이제 막 읽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렸는데 그는 의외의 소릴 한다. 그 평전은 말이 많았단다. 고소를 할까도 생각했다 한다. 다시 말하면 평전의 내용에 대해 그 가족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단다.

아주 느린 속도로 평전을 읽어나가며, 나는 차라리 시 전집만 읽고 말 것을 하고 후회했다. 평전 속의 김수영은 내가 이름으도 받아들이던 그 김수영이 아니었다.  가족에게 함부로 대하고 매우 고집이 세고 세상살이에 서툴고 때로는 비겁하고 소심한 남자일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서 그런 시가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인간적 일상과 삶은 그렇다치고, 김수영 시에 대한 흥미진진한 비평을 기대했던 나자신도 우스워졌다. 평론은 없다. 거의 없다. 후기를 쓴 교수는 속상하지도 모르겠지만 시에 대한 비평은 없다시피 하다. 도대체 뭘 읽으란 말인가.

아니, 평전 때문은 아니지만 '오래된 정원' 영화를 보면서 가장 선명한 지적 세계를 가진 사람들의 엄청난 인력 낭비의 그 시대를 생각하면서, 그것이 단지 7,80년대만의 문제가 아님을 생각하면서,어쩌면 우리에게 김수영은(그가 위대한 시인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대가 낭비한 수많은 인재들, 그 속에 겨우 살아남은 얼마 안되는 인재들 중 그 하나가 아닐까 하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 보았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돌아온 침대 머리맡의 김수영 평전은 더욱 그를 초라하게 만든다. 뭐랄까, 시인은 시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런 마음 갖는 일은 쓰라리다. 차라리 시만 읽을 것을 왜 그의 인간적 향기를 맡아보려 했던가 하는 후회... 거기에 작가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나는 내내, 김수영 시 하나하나에 대한 평가도 없이, 별로 남지도 않았을 기록들을 역추적하며 김수영의 행적을 시시콜콜 '재건'해 놓은 최하림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다는데, 김수영을 매우 흠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그는 왜 이런 방대한 작업에 착수했을까 그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오죽했으면 평전을 다 읽고 최하림 이름을 검색해 보았을까. 그의 시집은 또 어떨까 궁금해졌을까? 시집을 사서 읽으며 글은 사람을 말해준다는데, 사람을 말해주는 글은 시인가 잡문인가, 어디까지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가슴 쓰린 독서였다. 김수영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평전은 읽지 말라고 하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3-26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시인으로만 .. 영화배우는 배우로만 그럴때가 편할때가 많아요 .. 글을 읽다가 .. 그냥 그런 느낌은 매일매일 너무 많은지라 .. 분노하고 화나는 건 때론 .. 따뜻한 감성을 기대하는 이들이 지불해야할 댓가일지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들이 주는 배신감이랄지...

아무 데나 펼쳐, 단 한 귀절이라도 마음을 건드리면 시집을 산다. 그렇게 모은 기백 권의 시들은 저마다 사연을 나의 사연을, 안고 있고 접혀 있고 뭔가가 적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시들이 날 배신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 서점에 서 있어도 사고픈 시가 없다. 사고 싶은 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시를 팔아먹겠다고 모아놓았단 말인가 싶은 괘씸한 생각이 드는 책들이 왜 이리 많은지.

젊은 시인들이 그런 시집을 내놓으면 그 건방짐이 한심하다. 그런데 이미 명망을 얻었고 내 마음에도 들어와 있는 시인이 또 그런 시집을 내놓으면, 뭐랄까 이름이 알려졌기에 그저 일기장에 끄적거린 글들도 모아서 시집이랍시고 내놓으면 팔릴줄 아는가 싶어 또 한심하다.  시정신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가장 순열해야 할 것 같은 그 무엇. 돈 되기 위해 재미나게 쓰는 시 따위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시인들조차 그러해서 읽을 시가 없는 세상이 되었는가 싶어 번번이 돌아나오곤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랫만에 어, 괜찮은 걸 싶은 사람을 보았다. 나이가 많다 할 사람도 아닌 듯한데.. 마음은 맑고 표현은 정갈하고, 건방지지도 않고 위악을 떨지도 않는다. 외로우면서도 세상일에 초연한 척하지도 않는다. 시를 잘썼다, 아니다, 진실되다 아니다를 평할 능력은 내게 없다.  세상 시들의 진심을 읽을 능력이 내게 있다는 오만은 부리고 싶지 않다. 그저 나는 내 마음을 건드리는 시를 '좋아한다.' '좋은''잘 쓴' 시인지는 난 모른다.

이병률의 쓸쓸하고 조금 겸손한 어깨가  좋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여 다른 시와 여행기도 한꺼번에 샀다. 가끔 누군가가 좋아지면 그 사람한테 감정도 정성도 몰아준다. 그렇게 몰아서 나는 그의 책들은 한 동안 만났다. 김선우, 세상 시들이 오만해졌다고 느낄 때도 김선우가 있다, 위안이 되듯이. 그런 위안의 이름에 이병률을 넣어볼까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팽이 2007-01-21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으로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