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 열림원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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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호승의 시를 거의 다 좋아한다. 그야말로 시인이란 생각이 든다.말 몇 마디 짧게 줄여놓은 것 한 80편쯤 모아 책 한 권 내놓고 자족하는 어떤 시인들과는 다르다. 어쩌면 이 사람이 내뱉는 말들이 다 시가 될 것만 같은, 앞과 뒤가 다 시일것만 같은, 그런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 속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시를 읽으며 그의 시인다운 운율적 감각보다 그의 통찰력에 가슴이 멍했다. 무지하게 공감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밝고 행복하게 살자 하고 어린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잘 웃고 사교적이고 밝고 명랑하라고 한다. 물론 그래야 대체로 행복하더라는 것이겠지만 난 늘 묻고 싶다. 대체로 명랑하기보다 가라앉아 있는 편이지만 늘 행복하게 사는 나는? 그리고 대체로 활기차게 잘 웃는 사람보다 내리깐 눈동자 속에 그늘이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는 나는? 말없고 더러 어둡지만 정말 맑게 사는 사람을 많이 알고 사는 나의 '사람 판단의 기준'은 틀렸단 말인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나는 너희들의 아픔을 소중히 하라고 말해준다. 구김살없는 아이보다 자기도 모르는 자기 세계를 무거워하며 쩔쩔매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그늘을 발견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사람을 사랑한다. 그가 노래를 잘 하기 때문도 아니요, 그가 아름답기 때문도 아니요, 그가 잘 웃기 때문만도 아니요, 그가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는 자기 그늘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것까지, 그늘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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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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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자신의 여행을 학문적으로 분석했다면, 그리하여 국제 정세와 정치와 문화에 대해 남의 말들을 잔뜩 인용하며 잘난 척을 했다면, 그 사람이 통속적인 관점으로 일도 가정도 연애도 완전히 성공한 여자였다면, 그 사람이 무지하게 미녀라서 짙은 화장을 하고 자기 책들의 광고사진에 등장했다면, 기똥차게 좋은 머리를 타고난 수재였다면, 아니, 그 사람이 보수주의자였거나 특정한 종교의 아집에서 헤매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 이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리 입담이 좋은 재미있는 책을 썼더라도 그 사람이 쓴 책을 다 찾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부심과 자만심을 헷갈리지 않고 있는 그 사람은 글과 생활이 따로 놀지 않는 사람 같다. 사는 모습을 고스란히 글로 보여주어, 억지로 겸손을 떨지도 않고 다소곳이 순하게 사는 척 하며 온갖 비열과 교만을 다 떠는 글쟁이들과도 다른 것 같다. 그러나 벌써 꽤 여러 권 나온 책에서 본 모습 말고도 더, 또, 다른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 그의 글을 읽는 사람, 주변의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까 너도 나를 따라하라, 그런 이끎이나 교육이 아닌, 힘을 주는 사람.

나는 교단에서 종종 그 사람의 글을 수업의 자료로 쓴다. 세상을 바라보는, 문화와 정치와 사회를 재고 판단하는 그 사람의 시각은 일관성이 있고 건강하다. 여행을 많이 다녀서 살아있는 체험으로 얻은 성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자기 생활을 관리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모습에서 내가 닮고 싶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전인적인 모습을 본다. 뛰어나기 때문이 아닌, 어느 한 구석이 뛰어나지만 어느 한 구석이 이지러진 그런 모습이 아닌 둥글고 온전한, 전인간적인 모습.

93년에 다녀온 베이징의 기억을 되살이면서 이 책이 좋았고 여행 혹은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에 기름부은 듯한 같이 달뜨는 그 기분도 좋았고 외국어를 공부하는 실질적인 방법론도 좋았다. 어쨌거나 그 사람의 책을 읽은 직후에는 내가 하고 있던 외국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게 되더라니.

그리고 그가 읽은 책들 가운데 헬렌 니어링, 체 게바라, 내 주변에서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해 혼자 애인으로 삼던 '책 속 애인들'을 공유하는 기쁨도 있다. 부디 건승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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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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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주인공 작은나무가 고아원에서 매를 맞을 때,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몸의 고통을 겪어야만 할 때, 영혼을 띄워 자기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면 고통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동양에서는 사람이 이 거대한 우주의 작은 한 부분임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써 삶의 무게도 덜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종교적인 인식론과는 조금 다를지 모르나 양철북의 오스카는 자기 자신의 삶을 잘도 객관화시켜 본다, 산다.

실상 이 책에 빠져 길고 긴 책을 일부러 오래오래 아껴 본 이유는 그 어떤 '주제' 때문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스카가 왜 자기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냉소적이었는지,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는지, 그 모순의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를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사실은 영화보다 더 아름다운 소설의 장면장면이 만드는 이미지를 즐겼다. 또 그 말잔치를 트럼펫을 부는 사나이와 그가 키우는 고양이 이야기는 같은 스토리를 여러가지 버전으로 길게 반복한다. 그걸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다. 산문시를 읽는 느낌.

삶이 무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이는 그 트럼펫 부는 마약중독자인 듯 싶다던 오스카의 생각은, 그러니까 그 세상에서 삶이 무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오만이겠지만 (어차피 누구나 자신만이 삶을 이해하고 있다고들 오해하며 사는 거지만) 오스카의 오만이 아니라, 그 트럼펫 주자에 대한 오스카의 이해에 대해 조금 공감했다.

삶이 허무한 것과 열심히 사는 것이 모순되지는 않는다. 자기 삶을 들여다 보는 오스카가 추할 정도로 몸부림친 삶...

폴란드에 가 보고 싶다. 동유럽에 가보고 싶다. 모자이크처럼 마구 떠돌아다니는 양철북의 파편들을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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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 2 (반양장) - 고독의 나날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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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는 세속의 인정과 즐거움도 인품도 인덕도 어느 정도 가졌다. 그러나 심사정이나 이인상이나 최북은 그 반대였다. 인품이 배어나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 내 기억의 궤적을 모아놓고자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하고 바라는 나의 가치관과 참으로 닿아있다. 하늘 끝까지 닿아 고적한 바위 산에 그 저 아래 보일 듯 말 듯 우주의 한 점으로의 자기 자신을 놓아두는 화가의 '허'하고도 맑은 기운까지는 아니더라도 참으로 한 번 살아볼 만한 가치있는 삶일 듯 싶다.

내가 문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글 지어먹고 사는 사람들을 따르고 싶지 않은 까닭이, 세상에 백명의 작가가 있으면 그 중 아흔 아홉명이 삶과 다른 글을 쓰는 까닭이다. 아니 뒤집어, 삶과 똑같은 문학, 인격을 그대로 닮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너무나 어려운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라 해서 천재적 '기능'으로 '작품'을 만들어 놓고 제멋대로 세속의 삶을 사는 이들을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문을 보다가 책에서 보았던 이인상의 그림을 알아보았을 때 공부한 내용이 시험에 나왔을 때처럼 기뻤다. 애초에 작품 제목을 외우고 연보를 외우는 따위의 공부를 염두에 두고 읽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또 하나, 그림이고 글씨고 문외한이면서 그림 속 세계에 들락날락거리는 재미, 정말 맑게 살다간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로 천천히 이 책을 읽다가 까막눈인 주제에도 이인상의 글씨를 보면서 머리털이 곤두서는 충격적인 감동을 받는 재미도 있었다.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사심없이 가질 수 있는 기쁨이다.

하지만 아직도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말년의 이인상의 뜨락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가 조금만 더, '덜' 쓸쓸했더라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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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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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인생에 파우스트를 세번째 읽다.

고등학교 때야 책읽을 욕심에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두 번을 읽었다. 다시 읽으니 그 어린 날 무슨 재주로 그렇게 읽어댔을까 싶다. 고전은 어린 날 한 번 읽고 나이 들어 또 읽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내가 단 반나절,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괴테가 거닐었다는 공원 기슭에서 그럼, 파우스트를 다시 읽어볼까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내게 파우스트는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독서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0년 전의 기억에 가물가물 매달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파우스트 이야기를(대개는 서사시 양식에 대해 공부할 때) 들려주곤 했다. 마치 그 이야기를 잘 아는 양. 나의 말만 듣고 이 책을 과감히 구입했다 울상을 지은 중학생들 기하더뇨. 그러고 보면 어떤 후배가 던진 제발 선생들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 그럴 듯하게 떠들어대는 죄를 범하지 말라던 일갈이 참 의미있는 말인 듯하다.

다시 읽으면서도 여전히 넘나드는 줄거리의 전개가 생소하긴 했지만 적어도 첫째, 번역의 아름다움, 말하자면 말 뜻을 모르고도 줄줄 읽으며 즐거워하는 '말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마치 말 처음 배우는 아기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른 말을 따라하며 재미있어 하듯이. 물론 독어 원전으로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독어는 전혀 모른다.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즐거움이 컸다는 것은 그만큼 번역이 우수하다는 뜻이리라. 이렇게 가끔 아주 번역이 잘된 책을 만나면 좋은 창작품을 만난 것 못지 않은 기쁨을 느낀다.

둘째, 애니메이션, 영화, 만화, 광고 등 깊고 얕은 온갖 서양 문화의 뿌리가 여기 닿아 있음을 확인했다. 물론 파우스트도 그리스 신화와 독일의 전설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괴테의 '파우스트' 자체가 서양문화의 근원은 아니겠으나 원조나 '헹님' 격에 해당하는. 특히 근현대 문학의 멀지 않은 근원, 비론 곁가지는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이나 상업적 광고 따위로 가벼이 나타날지라도 그 많은 문화적 현상, 형상, 작업들에 수분을 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발푸르기스의 축제 장면을 읽으면서 머릿 속의 수 초 간격으로 휙휙 지나가는 많은 비슷한 영화와 소설과 만화의 장면들을 만났다. 단연코 그 뿌리에 괴테의 파우스트가 있더란 말이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없지야 않다. 그것은 문화적 차이와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파우스트의 행적을 오로지 새로운 세계와 앎을 추구하는 지고한 갈망으로, 악마에게 피를 팔고도 용서받을 수 있는 순수한 욕망으로 여길 수 있는지, 나에게는 그의 욕심은 불손하기도 하고 오만하게도 여겨졌다. 너무 많은 것을 - 심지어는 신의 자리까지, 온갖 지식의 결정체를, 게다가 현실적인 사랑까지 그 모든 것을 - 탐하는 그를 단 한 순간에 지옥에서 천상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인지. 그가 마지막 순간에 많은 사람을 위해 옥토를 구현하려 애썼던 점도 지고지순한 목적의 신념의 실천이라기보다 삶에 의욕이 너무 넘쳤던 정치적인 행동으로도 보인다.

그의 행위 중 가장 (처음엔 욕심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순수했던 그레트헨과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일, 악마의 피보다 더 강력한 것은 누군가를 열렬히 순수히 사랑하는 일. 그래, 거기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쩐지 구원받는 파우스트의 모습에는 열정 그 자체로 90 평생을 휘몰아치듯이 살아냈던 천재 괴테의 자기 변명 같은 모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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