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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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 사람들은 기형도를 잘 모른다. 어쩌다 저 사람, 기형도를 한 줄이라도 가슴에 받아들일 것 같아 그의 시를 선물하면, 너무 어렵다, 혹은, 어두워, 라고 말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그런데 기형도는 벌써 상징이 되었다고?

그의 시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서구, 중세적 분위기, 혹은 어두운 석조건물의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걷는 것 같은 묵중하고 암울한, 내가 유령이 되고도 유령이 될락말락한 인간존재들을 조금 시니컬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한 오후 4시의 밝은 햇살 아래서의 무지근한 공포의 분위기...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는 누구를 흉내낸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그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그의 시를 가슴에 품는 이들이 그토록 많았을 리 없다. 나의 낡디낡은 기형도 시집 속표지에는 '지금 나는 기형도와 연애중이다' 어쩌구 하는 귀절이 있다. 물론 바람끼 많은 나는 수도 없이 랭보와도 연애중이고 윤도현과도 그러하고 .... 그렇게 자주 앓지만 어쩐지 남은 사진이 빅토르 최와 닮은 듯한, 추운 한겨울 빈방과 바람에 우는 문풍지의 추억을 가진, 그러면서도 저 푸른 숲으로 사라지는 환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는 도대체 어떤 영혼을 가진 사내였기에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기고 서러운 연인처럼 그렇게 떠났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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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보고 크는 아이들 - 그림책으로 시작하는 아이교육
이상금 지음 / 사계절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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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가 조금 더 있으면 더이상 그림책을 볼 수 없게 되기 직전 무렵 어느 방학, 맘 먹고 그림책 공부를 했었다. 그림책에 관한 지도서나 평론집을 읽고 거기 등장하는 제목들을 모으고 그 목록을 들고 두 아이 손을 잡고 서점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한 두어 번에 걸쳐 그림책 몇 덩어리를 사서 아이들과 함게 읽었다.

노자풍으로 이야기한다면, 아이들을 이끈 어머니인 나는 그 그림책을 꼼꼼히 읽고 평가하고 더 좋아하게 되었지만 정작 아이들은 심상히 그저 재미나게 읽고 던져놓고, 또 몇 달 후 다시 읽고, 책장 정리하다 읽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도 읽고 그런다. 나는 그 책 삽화의 예술적 깊이를 평할 능력이 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고 나는 지은이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의 깊이를 알지만 아이들은 단순유치찬란하게, 혹은 전혀 주제 따위를 의식하지 않고 읽는다. 어떠랴, 그림만 바라보아도 좋고, 인물과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만 하다면 된다.

이 책은 좋은 길잡이였다. 내 아이보다 좀 어린 아이를 둔 동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엄청난 감사의 말을 들었다. 우리나라 그림책에도 많은 비중을 둔, 어머니들이 심혈을 다해 골라읽힐 그림책의 길잡이로서의 성의가 보인다. 다만, 이 책이 나온 후 시간이 많이 흘러 너무가 곱고도 좋은, 혹은 그 반대의 숱한 그림책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 책만큼 친절하고도 관점이 좋은 안내서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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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아니다 - 프란츠 파농 평전
패트릭 엘렌 지음, 곽명단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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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뛰어난 능력과 품성을 가진 사람이 태어났다. 그것으로도 충분했지만 그것을 자신이 행복하게 사는 데에, 적당한 명망을 얻는 데에 사회적 적대세력을 만들지 않는 데에 써먹지 않았다. 세상과 맞설지라도 부릅뜬 눈으로 자신이 통렬하게 깨달았던 비참한 현실과, 그 현실에 함께 뿌리가 닿아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자의식은 너무나 강했고, 그것은 재능있는 자신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재능이고 품성이고 나발이고, 적당히 타협해 주지 않는 인간에게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백인의, 식민의자들의 우월의식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그것을 깨뜨리고 싶어하는 혁명적 의식이었다.

종종 체 게바라와 프란츠 파농을 비교한다. 엊그제 신문에서인가는 백인과 흑인으로서의 두 혁명가를 비교하는 글을 읽었다. 이제는 자본주의자들의 상품이 된 하얀 공산주의자와 아직도 악마라는 평을 벗지 못하는 흑인 지성이라고. 그러나 내게 두 사람은, 모두 의사 출신이었고 자신의 땅이나 동족들 가운데서도 충분히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건강하고 왕성한 지적 능력과 지도력 추진력을 가진 공통점을 가졌으되 사람을 융화하며 앞으로 나가가는 사람과 옳은 것이 아니면 용서하지 않던 돌파력을 가진 사람으로 비교된다.

나에게 파농은 대학 시절 읽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저자였다. 그 책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야학을 다니던 무렵 읽었던 그 책이 참으로 처절하고 뿌리깊은 것이었다는 느낌은 남아있다. 문맹인, 환자, 민중들이 단순히 계몽과 지도의 대상만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루어야 할 세상은 저 만큼 있고 함께 이길을 이끌어갈 동지는 적고 적들은 너무나 강고할 때 손잡아 이끌어 비참에서 구해내고 싶은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의 손을 억지로라도 잡아당기고 싶었던 파농의 마음 말이다. 책 표지에서 파농은 그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있다. 어쩐지 산 속으로 들어서 소리없이 최후를 맞이한 게바라에게서 권력도 등진 仙人의 모습 같은 것이 있다면 파농에게는 죽어도 그 눈을 감지 못했을 것같은 처연함이 있다. 처연함은 분노로, 악으로 절규로, 그렇게 오래오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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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ue Day Book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 블루 데이 북 The Blue Day Book 시리즈
브래들리 트레버 그리브 지음, 신현림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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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이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을 산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동물들의 저 오묘한 표정이 말이 통하고도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나의 사랑하는 이, 나의 어린 아들, 나의 악동들, 밉고 싫은 동료나 상사... 들과 어찌나 닮았는지 싶어진다. 그래, 말을 나눌 수 있거나 없거나 영혼과 생명을 가진 것들은 '알 수 없는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말을 뛰어넘는 표정과 몸짓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작년 내 반에 한 아이가 전학 왔다. 곱상하게 생겼지만 길고 고운 손가락에서 담배냄새가 나던 아이. 나중에 안 것이지만 오토바이 절도와 사회봉사의 전과(?)가 있던 아이. 그 아이에게 전학 온 초기에 이 책을 주었다. 마음 속으로는 주문을 외웠다. 난 널 꼭 졸업시킨다. 꼭... 그 아이에게 이건, 비밀인데, 그 책으로 독후감 수행평가를 해도 좋아. 이렇게 말하자 여자아이처럼 예쁜 글씨로 독후감을 써왔다. 난 우울할 때 자주 이 책을 읽는다, 아니 본다, 라고..

우여곡절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그 아이는 통학 시간만 한 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를 마다 않고 1년 잘 다니고 졸업을 하였다. 하필 그 아이가 전학 왔을 때 내 책꽂이에 꽂혀 있어 준 이 책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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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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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셀러를 무조건 미워하지는 말자고 애써 마음 잡은 후 이제는 좀 잘 팔리는 것들 중에서도 좋은 것을 가려낼 수 있게 되어 얻은 책 중에 <나무>도 들어간다.

일단 재미있다. 그러나 가볍지만은 않다. 기발한 상상력과 만만찮은 지적 토대 위에서 출발하는 재미이다. 게다가 메시지가 있다. 여기 실린 단편들은 한결같이 이 드넓은 우주 속에서, 지식과 진리의 광활함 속에서, 인간이 쉽게 되돌릴 수 없는 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한낱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일깨운다.

가령,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온 우주생성 장난감이나 어린신들이 자기가 맡은 세상을 조작하는 이야기에서는 이 지구를 이 우주를 비웃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일필휘지, 종횡무진, 어찌 보면 참 잘난 척하는 듯이 보이는 작가 베르베르가 그 자신이 속한 인간이라는 종을 비웃는 것이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읽는 발걸음마다 생각할 거리가 있다.

미약한 한 존재, 때로는 누군가로부터 '애완동물'이라는 시선을 받을지도 모르고 겨우 10을 알고 천하의 지식을 가진 듯 오만한 우스운 존재인지도 모를 우리 인간,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인간이란 존재라서 이 삶이 비천하고 허약하다고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비록 생성과정에서 실패해 버린 버려진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아름답지 않은 신의 지배하에 살지라도 아직도 무궁무진 생각하고 깨닫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즐거운 삶이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유쾌한 낙천주의자이다.

가벼운 재생지, 너무 예술적이지도 않은 삽화, 빨리 읽을 수 있는 속도감... 내 어린 친구들에게 권할 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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