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일련의 사회현상을 심층 분석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5
에리히 프롬 지음, 원창화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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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이 책을 읽기 직전 마침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을 막 끝냈다. 그리고 동시에 대여섯 권의 책을 읽는 습관 탓에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함께 읽고 있기도 했다. 어떤 책을 읽은 후 관련된 다른 책이나 자료, 영화, 공연물로 승화된 작품을 찾아보면 책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책에서 받은 감명도 길고 깊어지지만 이렇게 우연히도 같은 주제로 관통하는 책을 보게 되는 일도 드물다.

<윤리21>는 칸트 철학을 바탕으로 일본의 근대를 돌아본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서구의 근대화에 나타난 심리적 문제를 조망한다. 엄기호는 21세기 대한민국을 다루고 있지만 서구적 의미의 근대화가 아직 진행중인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세 책은 모두 진정한 근대는 무엇이고 근대를 맞으며 인간들이 잃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사회학적, 심리학적 관점에서 던지고 있다. 궤를 같이 하는 주장들을 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세 사람 모두 비교적 진보적인 학자들로서 근대화라는 이름의 자본주의화에 경계심을 표하고 있는 바도 비슷하다.

 

물론 에리히 프롬은 근대의 가장 큰 문제점을 과연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졌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얼핏 보면 민중은 들은 중세의 농노적 상태에서는 벗어나 자유의지로 직업과 거주와 정치적 입장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이 아니라 나아갈 길이라고는 오직 자본주의하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들은 자유라는 이름의 강요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자유와 복종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경험으로서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인간 본성에 고유한 것인가?

그 갈망은 문화와 관계없이 누구나 똑같이 경험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와 개인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자유란 외부의 압박이 없는 것만을 의미하는가? 또는 무언가의 존재도 의미하는가? 그 존재는 무엇인가?

사회에서 자유를 갈망하게 만드는 사회, 경제적 요인들은 무엇인가?

자유가 인간에게 견디기 어려울 만큼,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쓸 만큼 무거운 부담이 될 수 있는가?

자유는 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목표인 동시에 또 다른 사람에게는 무서운 위협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유에 대한 타고난 갈망 외에 복종에 대한 본능적인 원망(願望)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데 그렇게 강력한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복종은 항상 겉으로 명백하게 드러나 권위에 대한 복종인가, 아니면 의무나 양심 같은 내면화한 권위와 내적 강요 또는 여론 같은 익명적 권위에 대한 복종도 의미하는가?

복종에는 숨겨진 만족감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 속에 지칠 줄 모르는 권력욕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에너지의 힘인가 또는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삶을 경험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나약함이 그런 권력욕을 낳는 것인가?

권력을 추구하는 이 같은 노력을 강화하는 심리적 조건은 무엇인가? 이런 심리적 조건의 바탕이 되는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가?

복종에 대한 원망(願望)도 존재하지 않을까? 복종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권위에 대한 것뿐 아닌 의무나 양심 같은 내면화한 권위와 내적 강요 또는 여론 같은 익명적 권위에 대한 복종도 의미하는가? 복종에는 숨겨진 만족감이 존재하는가? 권력욕에 얽힌 심리는?

 

에리히 프롬은 심리학자로서 사회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심리 변화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조명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사랑의 기술>과 <소유냐 삶이냐>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비교적 쉬운(에리히 프롬의 문체는 대체로 쉽고 편안하지만) 책이라 선생님들이 권했는지도 모르겠다.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의 상호관계와 진정한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을 주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꽤 진보적인 주장들을 담고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파시즘에 관한 규정이다. 파시즘 탄생의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파시즘이 합리주의 탄생 이후발전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무지에 의한 것도 이기심에 의한 악마성도 아닌 듯 보이는데 과연 정체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문제를 인간이나 권력의 구조적인 심리로 해설을 하게 되면 우리는 영원한 나락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좀더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 글이 쓰여진 1940년대가 아니더라도 21세기 초반에도 세계 곳곳에는 우경화와 파시즘의 부활 조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프롬은 근대적 합리주의의의 근거 없는 낙관을 흔든 사람으로 막스와 프로이트를 평가한다.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와 편견 혹은 몰이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프롬의 말대로 프로이트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반사회적이라고 생각, 사회가 개인을 억합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이 심리학의 중요한 줄기를 잡고 있었던 데에 대한 건강한 대안으로 프롬은 사람의 좋은 성향이 사회적 과정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 스스로 답정너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처드 도킨스의 에서도 그러했듯이 개개인의 고민과 국지적인 문제들이 결국은 사회적인 문제에 기인할 뿐 아니라 해결점도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관점을 만나면 안도하게 된다. 프롬 역시 문화적 샘줄은 역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심리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을 평가할 때, 심리학에서 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지금에야 사회적 요인으로 인한 개개인들의 심리적 영향을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전에는 그저 개인의 병증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의 전환도 대단하지만 근대적 인간들이 겪을 사회심리적인 고독과 비인간화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프롬은 동료연대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흔히 근대는 중세의 무지와 어둠으로부터 탈출한 시기로 여기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근대화자본주의화’, ‘산업화를 의미하며, 다른 대안 없이 그렇게 근대를 맞이해 버린 사회의 문제를 공동체의 파괴’, ‘인간이 가져야할 본질적 세계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화라는 것이 식민주의와 함께 왔고 숙고의 과정도 없이 바로 가장 집약적인 형태의 자본주의화가 이루어졌기에 문제들 역시 급격하게 나타났지만 프롬의 지적대로 이것은 우리와 같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근대에는) 타인들의 기대에 순응하고 남들과 다르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에 대한 이 회의는 잠잠해지고, 어느 정도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대신 대가는 비싸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고 삶을 방해하게 된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죽은 존재다... 익명의 권위에 순응하고 자신의 자아가 아닌 자아를 받아들인다. 그럴수록 무력감은 더욱 심해지고 더욱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근대인은 겉보기에는 낙관적이고 창의적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무력감에 압도되어 있다....

 

이것이 프롬이 보기에 현대인들이 고독한 이유이다. 그런 고독으로부터 도망치는 길은 자본주의 사회에 깊숙이 동화되는 것이다. 엄기호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여기 나온다.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들이 스스로 나만의 감정과 판단을 버리고 전체가 같이 선택한 데에 동의하는 삶을 선택한다. 에리히 프롬은 그것을 자발적 복종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공동체나 유대의 문제가 아니다. 나만의 영혼을 버리고 기계적인 자동인형과 같은 삶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기계화, 몰영혼화되는 인간 존재는 가라타니 고진도 똑같이 지적한다. 물론 봉건시대까지의 삶도 정말 한 개인으로서 충만한 삶이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류의 역사 중에 과연 그런 시대가 있기는 했는지, 앞으로 오기는 하려는지도 부정적이긴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나 아니게살아가야만 하는 삶이 바로 자본주의적 삶이 아닌가 싶다. 문제를 지적하는 철학자들은 많은데 대안은 없다는 게 더 큰 비극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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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8-0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꽃선생님 오랜만에 진지하고 깊이있는 리뷰 반갑습니다. 담아갑니다. 무더위에 의미있는 독서로 더위도 잊으실 듯해요.

풀꽃선생 2015-08-10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안녕하세요. 알라딘에 자주 못 오지만 가끔 들어오면 늘 프레이야님은 잘 계시는지 궁금하답니다. 사실은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저 자신도 저의 서평을 올려놓고도 잊은 듯이 사는데, 늘 관심 가져 주심에 감사드려요.
위 서평은 급히 올려 오타와 비문이 많아서 수정했는데 담아갔다 하시니 부끄럽습니다. (__)
 
윤태영의 글쓰기 노트 - 대통령의 필사가 전하는 글쓰기 노하우 75
윤태영 지음 / 책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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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글쓰기는 매뉴얼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만 같다.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휘몰아치는 글쓰기..여야만 멋진 글이 되지 않을까. 멋진 글과 잘 쓴 글은 다르지 않을까... 문학을 꿈꾸는 이들은 그렇게 가슴에서 퍼올린 글을 쓰는 자신을 열망한다. 그런데 갈고 다듬은, 심지어는 학원 같은 데서 학습된 글쓰기라니.... 내가 요즘 글쓰기 책들을 집어들게 된 계기는 그런 건 아니었다. 정희진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정희진처럼 쓰기>라는 책을 준비한다고 해서 솔깃했다. 그의 글이야말로 요즘 보기 드문 깊은 사색의 명문들인데, 그것도 매뉴얼화가 된단 말인가? 하긴 한참 전에 <고종석의 문장>도 사서 보긴 했다. 그 이유 역시 고종석의 글을 좋아하다 보니 자기 글 쓰기를 어떻게 가르침으로 구성했는지 궁금해서 그랬나 보다. 하지만 분명 신문이나 주간지의 칼럼 중에서도 글 잘 쓰는 이들을 보면 이름을 기억했다가 그의 글을 찾아 읽게 된다. 요즘은 정말 글 잘 쓰는 이도 많다. 명문가가 드물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잘 쓰는 사람들은 있다.

 

글쓰기가 열풍이란다.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가 늘어서 그러나? 아니면 인터넷 신문 같은 데에서 전문가가 아니어도 글 쓸 기회가 많아져서 그런가. 혹은 자기 위안이나 자가 치유를 위한 글쓰기도 확장되는 건가. 위 두 책과는 달리 <윤태영의 글쓰기 노트>는 순전히 이런 나도 내가 쓰는 글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 건지 검증하고프다.’는 열망에서 선택했다. 노무현에 대한 추념은 덤이고.

일단 이 책은 글쓰기의 핵심이 간결하게 군더더기없이 잘 정리되어 있는 좋은 책이다. 목차만 정리하고 염두에 두어도 자기 글에 대해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정리한 것만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 문장을 두 번은 짧게 한 번은 길게(3,3,7) 식으로 리듬을 준다. 시작은 가급적 짧게,

쉼표는 가능한 없다고 생각하고 안 쓴다.

쉽고 간결한 문장 쓰기.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쓴다.

시작은 강렬하거나 친숙하게

대구법을 활용한다.

대화체를 중간에 적극 활용

한 문장이나 한 줄에 같은 단어 쓰지 말 것.

영어식 문장 쓰지 말자.

화려한 수식은 짧게

주어와 서술어는 가까이 둔다.

비슷한 말, 반대말... 사전으로 어휘력 기르기.

하나의 장면을 하나의 꼭지에

가급적이면 객관적 시점으로 (나는.. 쓰지 말기)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

욕심내서 지루하게 쓰기 없기.

핵심 키워드 하나

한 편에 글에는 하나의 메시지만

워딩은 생생하게 따옴표로 옮길 것.

다 아는 이야기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할 것.

반문하기.

주장 글에는 예화를 활용

삭제는 과감히

독자를 의식하고 쓸 것.

 

어떤 것은 새로웠고 어떤 것은 몰랐지만 나 역시 그렇게 쓰고 있는 것도 있었다(가령 주어와 서술어를 가까이 쓰라는 주문이 있다. 문장 배열 순서로는 정확한 문법적 문장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입말에 가까운 글쓰기를 지향하는 내가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 경망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 읽히는 관건이 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 글쓰기의 단점이라고 생각한 쉼표 쓰지 말 것지적도 유용하다. 글쓰기 초보들이 쉽게 접근하도록 책 자체가 간결하면서도 요점만 나와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쓴 글들의 예시가 적절해서 책이 가볍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굳이 단점을 지적하자면, 마치 시의 행 나누기처럼 글을 써놓았는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점이 거슬린다. 읽기 쉬우라고 그렇게 썼을 테지만 글 좀 써보겠다고 이 책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시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산문이 시 흉내내기를 한 것 같아서 불편한 마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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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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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는 우리나라 혁신학교의 중요한 교육철학적, 방법론적 기반이 된 이론이다. 도움이 될 만 한 좋은 이론이자 실천의 생산물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배움의 공동체를 접하면서 씁쓸했던 점이 있다. 89, 전교조가 결성되었고 그 전신인 전교협의 활동은 이미 그 이전부터 계속되었다. 전교협, 전교조 초기 시절 많은 교사들이 꿈꾸었던 학교 현장의 변화그 첫 번째가 바로 교실에서 구현되는 공동체였다. 그것이 수업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 두레 수업이었다. 오늘날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게 된 모둠수업의 뿌리이다. 배움의 공동체와 두레수업은 결국 같은 이야기이다. 아이들의 활동을 중심에 놓고, 서로 도와가며 공부하게 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20년도 더 된 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동체 수업은 그 이론적 성과를 공고히 하지 못하고 허공에 떠도는 신세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아직도 전교조에서는 참교육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방학마다 현장에서 굳건히 뿌리내린 수업방식이나 학급운영 방식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교육적 이론도 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 잇는 전교조의 근간 정신도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 역시 전교조 조합원이지만 전교조의 큰 과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집단은 되었는지 몰라도 학교 현장을 개혁시키지는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아니, 보이지 않은 많은 변화를 이루었음에도 그것이 이후에 더 큰 발전의 역량이 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 놓고 뒤늦게 일본에서 배움의 공동체이론이 들어오자 다들 거기에 열광한다. 우리가 지고 있던 더 좋은 열매를 내던져버리고 남의 것을 좇는다.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다들 수업 정말 잘해볼 열정과 의지가 있는 좋은 교사들인데도 말이다.

 

우치다 열풍도 그렇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 땅에서 교육혁신을 꿈꾼다 하는 젊은 교사들이 솔깃해 하는 이름이다. 우리에겐 그만큼 꼭지가 될 만한 수장이, 이론이, 지도자가 없다는 뜻이다. 나 역시 그 이름에 혹해 책을 펼쳐 보았다. 솔직히 그 이름을 언급하여 열풍에 어떤 식으로든 가세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는 실제보다 큰 옷을 입은 명망가들이 참 많다. 적어도 그런 허세에 바람을 더 넣어주고 싶지는 않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치다는 허세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거나 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추앙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진단한 일본, 특히 일본의 교육은 우리의 것과 많이 닮은 듯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교육현장을 진단하는 데 우치다를 많이 언급한다. 그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닮은 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약 20년의 간격을 두고 경제 문화, 사회, 정치, 교육의 여러 가지 현상에서 일본가 걸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교육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하고 예견이 되는 것도 많다. 그러니 일본을 진단하는 일이 우리에게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정확한 진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치다의 일본 진단은 정확한가? 일단 그의 시각은 올바른가? 즉 그가 올바른 시각으로 일본을 정확히 진단했는가와 그런 일본 사회 진단과 분석이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게 적용되는가, 이 조건들을 다 충족시킨다면 그의 글과 말은 주목받을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바로는 아니다.

  

일단 우치다의 해석은 올바르지 않다. 가장 거슬렸던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물론 사회학이라는 게 정량적 분석이 불가능하긴 하다. 경험들이 모여 분석의 근거가 되므로 100프로 완벽한 해석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학자나 언론인들은 자기가 경험한 것 이상의 자료를 모으려 애쓴다. 우치다의 예시들은 그런 노력이 없다.

 

또 우치다의 시선은 올바르지 않다.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느냐가 중요한데 그의 눈높이는 매우 보수적이다. 일본 전통사회가 요구하는 바른생활 사나이의 시각으로 바라보다 보니 흔히 말하는 루저들, 학교와 교육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올바르게 보지 않는다. 고작 유의미한 시선으로 꼽아보자면 그들이 학교 수업을 거부하는 것은 무기력하고 나타하고 도태된 인간들이라서가 아니라 일부러그리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 정도다. 일부러 그러는 게 맞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 주목하고 우치다의 혜안을 칭송한다. 그럼 왜? 왜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한 해석은 없다. 대안도 없다.

가끔 일본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허망한 지점이 있다. 주인공들은 매우 시크하게 자기자신을 객체화 시켜 현실의 아픔에 젖어들지 않는다. 딱 거기까지. 그래서 현실을 어떻게 극복했다거나 나아갔다는 이야기는 없다. 냉소로 끝. 심지어는 자기자신까지 냉소함. 오벼 파이는 것은 나의 내장일지라도 나는 마취제를 맞고 누워있으므로 얼마든지 고통 받는 나의 내장을 냉소할 수 있다. 멋지지? 이렇게 끝나는 수많은 일본소설들처럼 우치다의 거부자들에 대한 시선 역시 그러하다. 우치다는 그들이 왜 학교와 수업을 거부하는지, 그래서 그런 이들을 학교는 어떻게 품어야 하는지, 혹은 일본 사회가 앞으로 그들이 일으킬 수 있는 문제를 무엇으로 보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고작 일부러 거부하는 거라고, 이거 내가 알아낸 거라고, 그러면 쓰겠어? ?! 하고 야단도 친다. 사회학자연하는 사람이 호통을 치고 가르치려 드는 건 또 뭔가? 지나친 냉소적 거부에 대한 지나친 열정적 개입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 이래 다같이 사이좋게 도우면서 살자라는 가치를 버렸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과거의 그와 같은 기치는 유교적이고 봉건적인공동체(비록 그것이 건전한 것일지라도) 아래 가능했던 것이고 그와 같은 공동체의 가치는 마르크스의 노동자의 단결과는 무관한 것이다. 지금은 자본의 기치 아래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끼리는 단결이 가능하겠지. 마치 두 가치가 하나의 뿌리인 양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오류는 범한다. 그리고 그것을 일본인의 민족성 같은 것으로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게다가 그런 개별화와 분열에 대해 참견하는 수밖에 없다는 대안을 대안이랍시고 내놓고 있다.

니트족에 대한 사회의 책임에 대해서도 방치하면 노숙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교에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쳐봐야 소용없단다. 가정에서 가르치지 않으면 이미 늦는다고. 그런데 니트가 나오는 가정은 대체로 소득이 낮다는 분석은 하면서 그 사회적 구조나 상관관계는 염두에 두지 않는가? 가난한 가정에서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는 분석하지 않나? 원인을 빈곤가정에서 찾았다면 사회에서 빈부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며 빈곤가정에서 가정교육도 못 받고 방치되는 아이들을 어떻게 돌보아 니트족이 되지 않도록 방지할 것인가와 같은 대안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닌지. 그런데 대안이랍시고 주제넘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라’, 체험교육을 하라,종교적 인간을 길러라... 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답답했던 것은 우치다가 아니다. 그렇게 분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름 그 책만큼의 무게로 유의미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 열광하는 한국의 교육관련 종사자들이다. 그것도 꽤나 진보적이고 꽤나 괜찮은 사람들이 말이다.

우치다의 모든 담론이 다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과열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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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5-05-10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 ^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주셨네요 ^ ^

박상희 2016-04-2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생각지 못한 얘기들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양의계곡 2021-07-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짜 너무 속시원한 리뷰!!!
대체 왜 이런 구닥다리 책에 열광하는 건지 원...
한국에도 그만큼 꼰대가 많다는 방증이겠죠.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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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은 묘하게 매력적이고 묘하게 힘든 일인 것 같다. 광고와 여성지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다. 더러는 대학 때 누구보다 멋진 시를 쓰던 이들... 만약 시인이 되었다면 한없이 드높은 곳에 빛났을지도 모를 그 무엇을, 아니 빛나지 않았더라고 고귀함을 간직했을 그들이 자본주의의 네온사인 앞에 자신의 빛을 보탬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거기에 녹여 없애버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기도 하다.

 

박웅현에게는 드높은 무언가가 있다. 시적 감성도 있고 인문학적 소양도 있다.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진정성도, 예술성도 있다. 그런데 그는 시인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고 광고인이 되었다. 광고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적인 가치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술적이어야 함에도 상업성이 예술성에 승하는 분야인 것도 사실이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했던가. 어차피 광고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아무리 의식있고 철학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본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웅현이 만든 삼성 광고를 보면서 그의 인문학적 소양의 범위를 가늠해 본다. 아무리 아니라고는 해도 세상은 일등만을 기억한다는 광고의 파장은 컸다. 그것이 이끌어낸 성장 제일주의의 폐해를 예측하지도 못했고 의도하지도 못했다고 한다면 박웅현답지 않다. 그렇게 영민한 사람이 그걸 몰랐을까?

그러고 보니 김정운 이후 나는 요즘 좀 까칠한 것 같다. 재능은 분명 세상을 위한 축복인데 재능이 무의식을 만나면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낳는지 아는 까닭에 좀 까칠해지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박웅현이 공동체에 해악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아까워서 하는 소리다.

 

이 책에서 새삼스레 발견한 도종환의 시가 좋았다.  또 수험생 광고를 보다가 울컥했다. 지금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이 책을 읽던 시점 둘째가 고3이었고 수시에 떨어져 정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라는 멘션은 수험생 자신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이라면 참 성숙한 녀석이겠지만 기실은 어른들이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어차피 누군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수험의 세계가 비장하다. 그 한 복판에 내 새끼가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영웅입니다같은 광고는 (남 비교해서 좀 미안하지만) 이제현의 광고를 보았을 때의 감동이 있다. 인문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사회적 의미, 정치적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이다. 때로 정치색을 빼고 무색무취한 인문학 공부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껍질 직전의 속살만 알겨먹()자는 의도로 매우 얍삽한 자세라 생각한다. 박웅현이 감히 인문학 광고를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그와 같은 사회적 의식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좋은 광고 99개를 두고도 사람들이 삼성의 1등 광고를 자꾸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나머지 광고들의 의식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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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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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파우스트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잘 모르는 남의 문화에 기반한 책들을 읽을 때는 늘 이질감을 느낀다내가 읽는 이 입장이 아니라면 누군가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할 때 아마도 책을 모두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조언할 것이다. 모르는 이야기는 모르는 이야기대로, 분위기는 분위기대로 즐기면 될 것이다. <신곡> 같은 책은 알알이 박힌 주석을 찾아 읽는 것이 쏠쏠한 재미일 수도 있다. 독서에 정석이 어디 있으랴.

 

의외로 단테는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둔 지옥론을 펼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테는 통찰력 있는 저자였지만 그의 견해가 전적으로 객관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터이니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 때문에 영원히 지옥에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도 있겠다 싶어 웃음도 좀 나온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글 쓰는 이는 글로써 세상에 빛을 주기도 하고, 못다 한 고백도 할 수 있다. 기도의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고 글로써 복수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가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이나 인간관계에서 다 못한 말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다. 단테의 신곡에도 그런 요소가 더러 보여 재미있었다.

 

물론 그런 개인적 경험이 전부였다면 신곡이 고전이 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철저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당시 서구 기독교 사회의 보편성에서 인정받을 만한 가치관이 저변에 깔려 있고 풍부한 상식과 역사적 고찰, 도덕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문학적 섬세함으로 그려낸 상상의 세계는 얼마나 정교한가. 나는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아니다. 어디를 가도 성소에 들르면 알 수 없는 존재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기도와 독백을 올리며 나를 돌아볼 뿐이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사랑하지만 그를 종교적 존재로 만나지 않고 붓다를 존경하지만 역시 신앙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불경 속에 그려진 상상의 세계와 예수가 설파한 레토릭에 감탄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매주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 독송을 하면서 아미타경 속에 그려진 극락세계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문학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곳이 정녕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으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행복하게도 만들고 돌아보게도 만드는 것이다.

 

단테가 그린 지옥은 참 섬세하다. <파우스트>가 그랬듯이, 단테 이후 그의 지옥도나 천국도에 빚진 예술가들이 참 많을 것이다. 이중 눈에 띄는 지옥행자들이 있다. 3곡에는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지옥이 펼쳐진다. 하느님께 반항도 복종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천사들의 지옥이기도 하다. 죽음의 희망조차 없이 다른 운명만을 부러워하는 자들에게 문 앞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써있다 한다. 희망 없는 지옥이다. 행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 때가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부른 배를 만지면서 아, 행복해~’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바쁘게 일을 하다가 허기질 때, 이 일이 끝나고 곧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 행복하다. 간절히 읽고 싶은 책을 기다릴 때, 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아이들과의 즐거운 수업을 구상할 때 행복하다. 행복은 만족이 아니라 희망이다. 그래서 희망 없는 지옥이야말로 진짜 지옥인 것이다.

 

<신곡>은 대체로 기독교적 가치에 준해 그려졌으므로 11곡에는 나와 같은 무신론자가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나로 말하자면 한때 자발적 기독교 신자였으나 또한 자발적으로 교회를 뛰쳐나온 사람이기도 하다. 교회가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무언지조차 몰랐던 나의 할머니나 우리 조상들은 다 지옥에 가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교회가 해준 답은 네가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라.”였다. 논리적이지 않으면 납득을 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6학년의 가슴에 불신을 심어준 교회가 싫었다. 예수님이라면 다르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나왔다. 지금은 한국 개신교 교회의 타락상이 싫어 거의 반기독교인이 되다시피 했지만 나의 신앙 역사는 그러했다. 지옥에 가고 싶지야 않지만 그렇다고 교회를 다니고 싶지도 않으니 어쩐다?

 

이간질한 자들의 지옥도 재미있다. 자기 머리를 들고 다닌다고 한다. 부끄러워 하라는 뜻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피에 삶아지는 지옥에 들어야 하는 폭군들에게 신곡을 읽히고 싶다. 어느 정치인도 자신이 폭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히틀러를 경배하지 말라, 그는 악마다, 라고 말하는 독일인을 보면서 우리의 박정희를 떠올리면서 어디까지를 폭군으로 규정해야 할까를 생각해 본적이 있다. 대개 박정희를 경배하는 이들 중 히틀러를 추앙하는 자가 나온다. 물론 박정희를 좋아하지만 히틀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 둘은 정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맞다. 수백만을 죽인 자와 박정희는 다르겠지. 그러나 정도는 다를지언정 독재자는 독재자, 폭군은 폭군이다. 미화는 금물이다.

 

무엇보다 가장 지옥스러운지옥은 34곡에 등장하는 배신의 지옥이다. 가끔 고민한다. 사랑이 더 중한가, 믿음이 더 중한가? 모든 이가 모든 이를 사랑하며 살 수는 없다. 내가 한 생을 잘 살아내고 싶어 몸부림을 쳐도 모든 이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그러나 믿음은?  그저 한 개인에 대한 믿음이든, 그것이 사랑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을 어찌 용납할까 싶다. 그래서 그것은 배신(背信)이다. 사랑보다 뿌리 깊은 믿음을 저버리는 일.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추며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이를 배신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것이 유대 민족을 살리는 일이라고. 그것이 스스로 의식한 것이든 아니든, 잘못된 인식이든 결국은 배신이다. 가장 멀고도 깊은 지옥에는 배신자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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