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 - 개그와 함께하는 3일간의 논리 여행 청소년 인문학 캠프 시리즈 3
김성우.송진완 지음 / 알렙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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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때 논리학 수업을 들었는데 듣기 전에 선배들이 무지하게 어렵다는 말로 겁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논리학이라는 게 묘하게 매력이 있다. 실제로 논쟁을 벌일 때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가와는 좀 다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논리학을 공부하면 보다 유리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중학생들도 수업 중에 논리학을 살짝 공부한다. 물론 교사가 어떻게 수업을 하느냐에 따라 연역법, 귀납법, 그런 게 있다고 말로 설명하고 넘어가면 10분 안에 끝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약 2시간 이상을 할애해 논리학 용어와 오류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토론을 해 보는 수업으로 연결시킨다. 4명이 한 두레를 짜서 22 찬반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직접 토론할 때 연역법과 귀납법, 각종 논증 방법이나 오류들을 정확히 토론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토론을 직접 해보면 논증법이 더 피부에 와 닿는다. 물론 논증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론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다양한 논리학 이론을 접할 수 있기에 학교 수업 시간에 잠시 스쳐가듯 배워 헷갈렸던 논리학적 용어들을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논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미덕은 올바른 토론의 태도로써 필요한 논리적 태도이다.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한 사람에 대해 당신들 말대로라면 도대체 누가 군대에 가겠어요?”라고 말한다면 이 논쟁의 핵심은 자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근대에 가야 하는 현행 병역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임에도 모든 사람이 병역을 거부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가정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 이야기(대제국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 왕은 텔포이 무녀로부터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에 출병을 하면 대제국을 멸망케 하리라는 내용의 신탁을 받음. 결과적으로 망한 것은 리디아대제국이었음)를 들어 정확하지 않은 언어적 표현이 불러오는 오류와 오해에 대해 경계하기도 한다.

흔한 토론 프로그램에서 많이 보는 엉뚱한 논객의 공격에 대해서도 그 비논리를 비판한다. 군가산점에 대한 토론을 할 때 등 당신이 여자였어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식의 태도는 원천봉쇄의 오류로써, 범하지 말하야 할 논리적 오류이며, 바르지 않은 토론 태도라는 것이다.

 

저자가 굳이 웃음코드를 논리학에 접목시킨 것은 물론 청소년들에게 논리학을 쉽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서 그러하기도 했겠지만 그는 웃음지성과 지성의 연결되어야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상대방이 기가 막혀 말문을 막히게 하는 쌈꾼 같은 논객이 아니라 웃음으로써 논리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민주주의 문화를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논리와 더불어 웃음둘 다가 필요하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저자는 프로이트와 니체, 베르그송과 에코,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넘나든다.

그는 유머에는 위대한, 고양하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개의 유머는 타자든 자기자신이든 객관화시키는 여유가 있어야 발생한다. 그런 여유가 있어야 다양함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도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나 역시 많은 시간은 아니지만 나의 학생들과 토론 수업을 할 때, 올바른 자세와 논리로 토론을 해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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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 생태계
이혁규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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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혁규 교수를 좋아한다. 중등 교사였다가 연구자가 된 분인데, 많은 교사출신 연구자들이 자신이 서 있던 초증등교에 넌더리를 내고 떠난 후에는 높은 자리에서 학교를 내려다 보거나 외면하는 데 비해 이혁규는 그렇지 않다. 자신이 학교 현장에서 느꼈던 가장 큰 아쉬움 - ‘수업에 중점을 두지 않는-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변함없이 노력한다. 교사 출신 연구자의 가장 큰 강점이 무엇일까? 현장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진정 이 땅의 초중등 교육에서 걸림돌이 되는 게 무언인지 잘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해야 한다. 그런데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학교에서 좀 똑똑하다 싶은 교사들은 다 못 견디고 학교를 떠나고 대학으로 가면 곧 학교 현장을 버린다. 언제 내가 교사였느냐는 태도로 돌변하기도 한다. 이혁규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나는 그가 참 좋다.

 

교사 출신 연구자인 필자

이혁규는 자신의 역량 대부분을 학교 현장에서 수업을 개선하고 싶어 하는 교사들을 돕는 데 쓴다. 그래서 그의 주요한 활동이 바로 수업 비평이다. 나 역시 수업 비평이 좀 더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교수들이 교사들의 수업을 보면 일방적인 피드백이나 가르침을 주는 자리가 되는 비평은 교사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어떤 교사나 자기 수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데 흔한 연구수업이나 수업공개에서는 교사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장면이 연출된다. 그런 피드백은 교사나 수업의 발전을 부르지 못한다.

교사들은 수업에 있어 그야말로 전문가이지만 자기 수업이 학문적으로 어떤 강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 못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그런 면을 보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하나의 수업 장면을 놓고 당사자와 동료, 연구자와 실천가가 머리를 맞대고 입체적으로 수업을 연구해야 한다. 이게 바로 올바른 수업 비평이다. 그런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이가 바로 이혁규이다.

 

그의 강의는 현학적이지 않다. 무슨 강연이란 걸 하면 꼭 중간에 청중으로 하여금 저걸 적어야 하나? 싶은 이론들 한둘이 나온다. 대개는 외국의 무슨 교수가 말했다는 이론의 정리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런 용어들이 나와야 그 시간이 공부를 했다 싶은 기분을 맛보는지, 청중도 그걸 원하고 강연자도 그런 것을 해야 자신이 알찬 강의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돌아보면 헛것이다. 그런 건 책을 읽어 얻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강연을 직접 들으러 가는 이유는 강연자와 청중 사이의 교감을 통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 절박함을 나누고자 함이 아닌가 싶다. 그런 면에서 이혁규의 강연은 교사들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만 이야기한다. 쓸데없이 현학적이지 않으면서 알차다. 기회가 있으면 그의 강의를 꼭 들어보시라 권한다.

 

교사는 전문직인가?

이 책은 학교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면서도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잘 보였다. 교사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면서도 종합적으로 조망해준 이와 같은 글을 만나기 쉽지 않았기에, 읽고 나면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가령 현장에 여교사가 많은 현상에 대해서도 그래서 아이들 지도가 어렵다느니’, ‘학교가 여성화되어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느냐느니하는 비합리적인 문제 지적밖에 들어본 적이 없는데 비해 비록 미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여교사가 많아진 이유를 합리적으로 분석해 놓은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원인도, 그 현상도 명료해진다.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사회진출에 벽이 많은 고급여성인력이 학교로 몰리는 현상에 대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학교의 여교사가 많아지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혁규는 또한 경제논리가 어떠하든 간에 도덕적이고 돌봄에 적합한 특성을 가진 여교사들의 장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그게 저하되는 공교육 이미지와 부합되는 단점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만약 남교사가 보다 많이 필요하다면 여성고급인력이 학교 아닌 다른 전문직종에도 문제없이 진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해결방안일지도 모른다.

 

이혁규는 교사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그러나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몇 개의 키워드들에 대해서도 날서지 않으면서도 명료한 분석과 대안들을 제시한다. 가령 나 자신 가장 많이 고민하는 어떻게 하면 교사는 전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라는 화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교사는 전문직인가?

우리나라 교원의 직업적 위상 강화를 위한 노력이 교직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노력과 유기적 관련성 없이 주로 경제적 처우 개선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문직이란 높은 윤리의식 자율적인 판단, 협력적인 문화, 봉사적인 태도, 고도의 실천적 지식 등을 갖추어야 한다. 교사의 처우 개선 문제를 넘어서서 교사의 양성, 교사의 책무, 교사의 윤리, 교사의 승진 체계 전반에 걸쳐서 우리 사회에 적합한 교사의 전문직화를 위한 논의와 노력이 새롭게 경주되어야 한다. 물론 이런 전문직화를 위한 노력이 교사를 특권적 직업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 공교육 교원들은 자신의 직업적 지위 강화 못지않게 자신의 제자들이 종사하게 될 우리 사회의 모든 직업이 나름의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있고 존중을 받을 수 잇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도 남다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좋은 교사는 좋은 교장이 될 수 있을까?

이혁규의 글 중에는 좋은 교사는 곧 좋은 교장이 될 수 있을까?’라는 문단이 있다.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좋은 교사가 곧 교장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 그리고 교장 자리에 너무 많은 권한이 주어져 본인도 힘겹고 학교를 망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교장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은 교장이 되는 경로의 불투명성과 좋은 교사 = 좋은 교장의 등치가 성립되지 않는 실제의 수많은 사례들을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경험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 현장에서 보면, 심지어 나쁘지 않은 평교사였던 이도 교장이 되면 이상한 행태를 보이는 일마저 자주 일어나는데 그 원인을 잘 파헤치고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민주화나 교육의 개선은 요원하다.

 

이혁규는 교사들이 교장직에 매력을 느끼는 요인을 외재적 요인 경제적 보상, 근무 여건, 이차적 혜택, 조직 구조 및 권한, 내재적 요인 개인적, 전문적, 성장, 존경과지지, 학교 변화 및 영향력으로 본다. 교장직이 허용하는 근무시간의 융통성, 시간 여유, 수업의 면제, 독립된 교장실 등을 교사들이 교장이 되고 싶어하게끔 만드는 매력요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학교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교육적 열정이 교장이 되고 싶게 하는 동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장직이 어렵고 까다롭지만 보상이 적은 직업이라는 외국 교사들의 인식과 달리 우리나라 교사들은 상대적으로 교장직에 매력을 느끼고 교장이 되어서 얻는 지위와 명예의 상승에 관심을 갖는다. 교장들의 주관적 만족도는 높은 편(직업만족도 1위 초등교장, 49위 중등교장)이지만 교장들에 대한 사회적 만족도는 낮은 편이다. 교장 개개인의 역량이나 평판과 별개로 교장 승진 제도 자체가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교장이 되는 것 자체가 교직 사회에서 그다지 영예롭지 않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다.

좋은 교사는 좋은 교장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교장에게는 잘 가르치기는 능력 이상의 능력이 필요하다. 리더십, 조직 관리 능력, 의사 소통 및 갈등 관리 능력, 장학 및 컨설팅 능력, 학습자의 교수 학습 신장을 돋는 프로그램 개발과 실행 능력 등 ... 단순히 교사를 오랫동안 하고 성실하고 훌륭하게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해서 그런 능력이 부수적으로 습득되지 않는다.

 

맞다. 교장은 교육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행정가이기도 해야 한다. 현장 교사들은 교장이 교육자로서 충실하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학교행정에서 해야 할 일도 많다. 현실의 교장들은 둘 다 잘 하지 못하고 특히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며 비교육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게 교사들이 교장들을 존경하지 않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분명 이는 교육현장에 불행한 일이다. 좋은 교장이 있어야 학교가 발전하고 교사와 학생들이 행복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장에게 주어진 지나친 권한들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 교장을 혜택을 누리고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닌 고단하지만 학교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진정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혁신을 가로막는 세력은 바로 교사들

이혁규는 교사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뼈있는 조언을 한다.

 

기존의 입시 교육을 넘어서서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구성원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입시는 현실임을 힘주어 강조하는 교사들의 핏대 올리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가? 퇴근 시간쯤 우습게 여기며 혁신의 에너지로 무장하여 학생을 돌보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그 모든 것이 노동자로서 교사를 착취하는 나쁜 관습이라고 투덜거리며 탈주를 감행하는 교사의 모습도 보인다. 교장이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내려놓고 수평적인 의사결정을 강조하면서 생겨난 공간을 자율로 채우려는 교사가 있는 반면 그런 수평적 리더십으로 인해서 생겨난 느슨함을 사적 이익을 위해서 활용하는 교사들도 있다. 그리고 학교를 공동체로 상정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혁신 주체들 한편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이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학교 구성원들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사 일반이 혁신학교 운동이 좋고 따라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천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모방하고 싶은 문화적 밈이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교육현장의 개혁을 가로막는 주범 중에는 안이한 교원들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교사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위의 유형 중 자신이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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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 동네서점의 유쾌한 반란
백창화.김병록 지음 / 남해의봄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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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남편은 마당이 있는 집을 찾느라 바쁘다. 농사를 짓겠단다. 나는 교외로 나갈 생각이 없지만 남편은 얼른 농사를 짓고 싶어서 안달이다. 남편이 외아들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어른들을 모셔야 하는데 몇 년 전 시아버님이 뇌출혈로 잠시 입원해 계실 때 함께 살아야 하는 날이 한 걸음 다가오고 있음을 우리도 절감했다. 다행히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셔서 같이 살 준비를 하자는 우리의 제안에 어머니, 아버님이 손사래를 치시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혼자되신 나의 어머니도 늘 당신이 살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하고 늙은 것을 아쉬워하셔서 언젠가 마당 있는 집으로 가면 우리 시어머니와 함께 세 가구가 살자고 이야기했다.

 

남편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니 노인들의 동선이 걱정된다. 나 또한 퇴직이 아직 멀었는데 서울 아닌 곳에서 직장생활이면 내가 하고 있는 활동들을 할 수 있을까? 또한 퇴직하고 나서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는 나는 전원생활을 잘 견딜 수 있을까?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지금은 그저 모색 중이다. 그래도 목표가 있어 즐겁기는 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집을 보러 다니는데, 없는 돈에 여러 식구의 요구를 다 반영할 주거공간을 마련하려는 모색이 아직은 그저 즐겁다. 먼 훗날의 일이라 생각해서 막연히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남편의 희망사항에 마음을 맞추기는 했으나 농사를 짓고 싶은 게 아니라면 시골로 가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글을 쓰고 수를 놓고 해금을 켜고... 그렇게 살 수도 있겠지만 그 생활양식이 나에게도 의미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내 마음에 작은 등불이 켜졌다. 한겨레신문에 난, 이 책의 저자들 이야기를 읽고서였다. 아니, 어여쁜 이 집 사진을 보고서였다고,가 맞을 것이다. 괴산에서 서점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내가 단순히 남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공존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찾아 시골로 가게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래, 어차피 돈 벌러 가는 거 아닌데, 가서 서점이나 도서관을 열자~!

 

안 그래도 올 여름 한 작은 마을 어린이 도서관에 초청 강연을 다녀와서 어린이 도서관에 관심이 생겼던 차였다. 허름한 2층 양옥집 하나를 동네 어머니들이 돈을 모아 어린이 도서관으로 꾸민 은행나무 도서관에 다녀왔다. 강연은 내가 했지만 오히려 배우고 온 게 더 많은 방문이었다. 방방이 아이들 그림책과 어린이 책으로 도서관을 만들고 마당에도 예쁜 의자를 놓아둔 소박한 도서관에서 받은 감동으로 돌아와 그 도서관을 흉내낸 느티나무 어린이 도서관이야기를 동화로 써내려갔을 정도이다.

 

사실 우리 집은 오래도록 서점을 했었다. 우리 아버지 스물두 살 때 시골마을에서 작은 서점을 열어 거기서 우리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늘 근학서점 맏딸이라 불렸다. 장사하는 부모님 모습이 힘겨워 보여 서점을 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지만 돈을 벌 요량이 아니라면, 책을 나누기 위해서라면 서점이나 도서관이 싫을 리 없다.

 

책을 읽고 꿈을 갖게 되는 일은 참 행복한 일이다. 책 속에 문제 해결의 길이 있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도 언젠가 다른 나라의 서점들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꿈, 마을의 어린이 도서관이나 책방을 구려보고 싶다는 꿈을 가져 본다. 집에 쌓여만 가는 책들은 이제 얼른 치워야 하는 무게가 아니라 꿈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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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의류 수거함 - 제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0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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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착한 소설이다. 완득이가 처음 나왔을 때 재미있는데 착하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소설을 발견했다고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오즈>에서도 재미있고 착한주제의식을 발견한다. 백화점식으로 아이들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사회적 이슈를 담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아서 작가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자의 고단한 삶과 북한 인권문제, 빈곤층의 안타까운 사연과 빈부격차 문제, 그리고 노인 노동, 학교폭력과 자살, 구제역 살처분으로 인한 인간 존재의 회의, 그리고 그 과정을 겪은 이들의 트라우마, 노숙자 문제, 유학생의 부적응, 폭식과 우울, 그리고 세 건의 자살 이야기...그 하나하나만 다루어도 훌륭한 소설이 될 많은 이야기들은 여기 다 담아내려 한다. 건강한 주인공이긴 하지만 도로시라는 여고생은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듣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해결사 혹은 관찰자로 등장하는 건강한 소녀이미지는 한편 현실에 없기도 하고 한편 어딘가에 있기도 하다. 그맘때 여자아이들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한편 배려와 헤아림의 능력이 뛰어나기도 하다. 어리바리한 소년들보다 명민하게 사회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는 영리함도 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작가 말대로 누천년 내려온 모성성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여고생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많은 이웃의 아픔이라니...

 

결국 이 소설은 많은 아픔을 건강하게 이겨낼 에너지를 보여주는 착한 소설이다. 비참한 이야기들이지만 사실 전혀 과장되지 않은 현실들 그대로인데 그 해결 과정이 너무 순조로워서 이 현실적인 소설은 그만 판타지처럼 느껴지고 만다.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반드시 대안을 이야기해야 함이 아닐 수 있다. 현실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게 희망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하는 게 오히려 희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대안이 없을지라도 희망의 에너지를 그 작은 빛을 잃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될 수 있다. 요즘 많은 사회학자들이 절대절망을 흔히 말하지만 지나친 희망도 희망이 아니다. 좋은 발상과 좋은 소재, 좋은 문장과 좋은 인물들, 좋은 주제의식이었음에 감사드리고, 작가는 앞으로 이 안에 담았던 많은 문제들을 좀 더 세밀하게 담아내면서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에너지의 섬세하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방법적 대안들을 담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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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비행 - 이경화 소설집, 가짜 같은 진짜 십 대 이야기 탐 청소년 문학 15
이경화 지음 / 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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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교사연수용 자료로 좋은 작품을 발견했다 <가해자>가 그것이다.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반전이 대단하다. 얼핏 보면 피해자처럼 보이던 아이가 사실은 교묘하고 악랄한 가해자일 수 있음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늘 접하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 매우 공감이 된다. 소설 속에서야 진짜 가해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끝나지만 사실 학교폭력의 먹이사슬은 복잡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은 모두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일 수도 있다. 또한 아이들 관계만 보면 가해-피해가 명확할지라도 가해자인 아이가 살아온, 살고 있는 환경을 살펴보면 또 다른 원인들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면 가해자라는 명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작품이 학생들 생활지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거리를 많이 제공하기 때문에 교사연수 자료로 좋다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 안에는 학생들 말고도 담임교사, 학생주임,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어머니들 등 여러 어른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정체(이해관계와 상처, 배경 등)가 갑자기 확 드러나지 않고 반전이 거듭된다는 면, 즉 뻔한 인물들(알고 보면야 뻔한 인물들이지만 처음에는 아닌 듯 보이고 인물의 행동이 의아하게 보이는 것이 이경화 작품의 매력이다)이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다. 교사들은 이 중 학생주임과 담임교사의 행동, 특히 담임의 행동에 자신을 비추어볼 것이 가능하다. 또한 화자의 어머니를 보면서 요즘 흔히 만날 수 있는 진상 학부모의 모습을 발견하며 교사들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가. 아이들의 심리는 더욱 복잡하다. 학교에서 사안이 생겼을 때 만나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결코 천사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성선설따위 개나 줘버리라고 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이 사악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하지만 또 뒤집어 보면 아이들이 사악하고 교활해서라기보다 자기방어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의 태도가 달라진다. 교사들 중에서도 아이들이 아주 무섭고 나쁘(그런 아이들도 있다고, 혹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좀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나의 경우는, 어른도 그렇지만 사악하다기보다 미성숙해서, 교활하다기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혹은 자신의 행동이 미칠 영향을 미처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자꾸 원인을 헤아리게 되고 극단적인 악한 행동이 아니면 개선의 여지를 대체로 발견한다. 이런 교사들은 허용적이고 설득적이다. 이 두 가지 유형 사이에서 동료교사들은 갈등을 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나 자신은 합리적으로 대처한다고 생각하지, 지나치게 엄격하다거나 지나치게 느슨하게 아이들을 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과 반대의 태도를 취하는 교사에 대해 비난하는 심정이 있기 때문이다.

답은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교사들이 많이 나누어볼 필요는 있다. 사실 학교에는 극단적이고 부도덕하지만 않으면 다양한 생활지도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 교사들마다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가치도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다양한 것이 좋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과 방식이 다른 교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해보기에 딱 좋은 교재가 되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작가는 나라꽃을 피우기 위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게임이라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놀이를 재해석 했다. 그리고 이것을 세월호의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에 연결했다. 단순한 사고로 선장이나 선박회사의 잘못에 불과하다고 믿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사고라고 생각하는 이들조차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지도자를 옹호하기 위해 애써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탈색시키려 노력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많은 이들은 세월호를 우리 사회, 우리 정치의 상징이자 비유이자 묵시록으로 읽는다.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이것은 교육적 담론으로, 정치적 담론으로, 시대의 비유로, 위선자들에 대한 비아냥으로 해석될 것이다. 사람들은 세월호로 비극과 절망을 읽었지만 이경화는 가만히 있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학생들, 의경들로 뒤집어보려 애쓴다. 마침, 허무하기 짝이 없는 세월호 청문회를 목격한 직후에 이 소설을 읽었다. 600일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아무런 극복의 대안도 생기지 않은, 21세기 민주주의, 선진국을 향해가는 나라에서 일어난 무고하고 엄청나고 무도한 이 사건.... 삶은 불합리할 때 가장 공포스럽다. 평화를 가장한 현실에서 더욱 그렇다.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뒤집은 <GD 240>

이 소설은 <이갈리아의 딸들>을 떠올리게 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및 사회적 지위가 전복되었던 소설. 그 소설의 영향은 그러니까 결국 남자들이 자신들이 1이어야 할 이유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비합리적인 것인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여성들에게는 쾌감을 느끼게 했을지 몰라도 남성들에게 남녀차별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동지애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여자들끼리 여자들 안의 남녀차별주의를 극복하고 패배적 사고를 벗어나는 데에는 좋은 텍스트였을지 모르지만 남성 동지들을 끌어오지 못하는, 오히려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책이었다는 뜻이다.

 

동성애자를 마이너리티로 바라보는 사고를 전복하는 <GD 240> 역시 읽고 나면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불합리하게 소수자,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 작품 역시 그러니까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의 폭력을 극복하게 할지에 대해서는 좀 부족한 점이 느껴진다. 물론 작가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저 한 번 비틀어 풍자를 하고 싶었을 뿐,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면서, 어때, 이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메이저라고 너무 잘난 척하지 말자고, 이렇게 쿨하게말이다.

작가가 무거운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런 비판도 무의미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런 전복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좀 이야기해보려 한다. 남녀차별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대상이었고 차별하는 남성을 적, 혹은 공격의 대상으로 삼으면 남녀차별이 극복되지 않는 것처럼 동성애에 대한 폭력을 이성애를 소수자로 만듦으로써 극복하려 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전복적 사고가 요즘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남성역차별에 대한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여성혐오로도 나아간다. 물론 요즘 나타나는 여혐에는 사회의 극우화가 일조한 면이 크지, 이것을 페미니즘 운동의 잘못으로 보면 안 된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여성가족부라든가 정치적 이유로 악용되고 활성화된 일베로 인한 기형화된 사회현상으로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참에 건강한 페미니즘과 남녀평등의 방향을 새로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경화의 작품은 일반적인 청소년 소설과 많이 달랐다. 학생들이 읽어도 교사가 읽어도 학부모가 읽어도 될, 읽어야 할 논쟁의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좋은 소설이란 게 때로는 좋은 가치를 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작품이 좋은 소설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흥미로웠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었다. 청소년 소설 중에서 청소년이란 이름이 붙는 바람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작품이 꽤 많다. 어른들이 읽어보시라고 권하는 바이다. 특히 교사들께서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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