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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비행 - 이경화 소설집, 가짜 같은 진짜 십 대 이야기 ㅣ 탐 청소년 문학 15
이경화 지음 / 탐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다가 교사연수용 자료로 좋은 작품을 발견했다 <가해자>가 그것이다.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반전이 대단하다. 얼핏 보면 피해자처럼 보이던 아이가 사실은 교묘하고 악랄한 가해자일 수 있음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늘 접하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 매우 공감이 된다. 소설 속에서야 진짜 가해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끝나지만 사실 학교폭력의 먹이사슬은 복잡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은 모두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일 수도 있다. 또한 아이들 관계만 보면 가해-피해가 명확할지라도 가해자인 아이가 살아온, 살고 있는 환경을 살펴보면 또 다른 원인들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면 ‘가해자’라는 명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작품이 학생들 생활지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거리를 많이 제공하기 때문에 교사연수 자료로 좋다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 안에는 학생들 말고도 담임교사, 학생주임,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어머니들 등 여러 어른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정체(이해관계와 상처, 배경 등)가 갑자기 확 드러나지 않고 반전이 거듭된다는 면, 즉 뻔한 인물들(알고 보면야 뻔한 인물들이지만 처음에는 아닌 듯 보이고 인물의 행동이 의아하게 보이는 것이 이경화 작품의 매력이다)이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다. 교사들은 이 중 ‘학생주임과 담임교사의 행동, 특히 담임의 행동에 자신을 비추어볼 것’이 가능하다. 또한 화자의 어머니를 보면서 요즘 흔히 만날 수 있는 ‘진상 학부모’의 모습을 발견하며 교사들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가. 아이들의 심리는 더욱 복잡하다. 학교에서 사안이 생겼을 때 만나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결코 천사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성선설’따위 개나 줘버리라고 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이 사악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하지만 또 뒤집어 보면 아이들이 사악하고 교활해서라기보다 자기방어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의 태도가 달라진다. 교사들 중에서도 아이들이 아주 무섭고 나쁘(그런 아이들도 있다고, 혹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좀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나의 경우는, 어른도 그렇지만 사악하다기보다 미성숙해서, 교활하다기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혹은 자신의 행동이 미칠 영향을 미처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자꾸 원인을 헤아리게 되고 극단적인 악한 행동이 아니면 개선의 여지를 대체로 발견한다. 이런 교사들은 허용적이고 설득적이다. 이 두 가지 유형 사이에서 동료교사들은 갈등을 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나 자신은 합리적으로 대처한다고 생각하지, 지나치게 엄격하다거나 지나치게 느슨하게 아이들을 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과 반대의 태도를 취하는 교사에 대해 비난하는 심정이 있기 때문이다.
답은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교사들이 많이 나누어볼 필요는 있다. 사실 학교에는 극단적이고 부도덕하지만 않으면 다양한 생활지도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 교사들마다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가치도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다양한 것이 좋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과 방식이 다른 교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해보기에 딱 좋은 교재가 되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작가는 ‘나라꽃을 피우기 위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게임’이라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재해석 했다. 그리고 이것을 세월호의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에 연결했다. 단순한 사고로 선장이나 선박회사의 잘못에 불과하다고 믿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사고라고 생각하는 이들조차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지도자를 옹호하기 위해 애써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탈색시키려 노력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많은 이들은 세월호를 우리 사회, 우리 정치의 상징이자 비유이자 묵시록으로 읽는다.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이것은 교육적 담론으로, 정치적 담론으로, 시대의 비유로, 위선자들에 대한 비아냥으로 해석될 것이다. 사람들은 세월호로 비극과 절망을 읽었지만 이경화는 ‘가만히 있’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학생들, 의경들로 뒤집어보려 애쓴다. 마침, 허무하기 짝이 없는 세월호 청문회를 목격한 직후에 이 소설을 읽었다. 600일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아무런 극복의 대안도 생기지 않은, 21세기 민주주의, 선진국을 향해가는 나라에서 일어난 무고하고 엄청나고 무도한 이 사건.... 삶은 불합리할 때 가장 공포스럽다. 평화를 가장한 현실에서 더욱 그렇다.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뒤집은 <GD 240>
이 소설은 <이갈리아의 딸들>을 떠올리게 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및 사회적 지위가 ‘전복’되었던 소설. 그 소설의 영향은 그러니까 결국 남자들이 자신들이 ‘제 1성’이어야 할 이유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비합리적인 것인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여성들에게는 쾌감을 느끼게 했을지 몰라도 남성들에게 ‘남녀차별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동지애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여자들끼리 여자들 안의 남녀차별주의를 극복하고 패배적 사고를 벗어나는 데에는 좋은 텍스트였을지 모르지만 남성 동지들을 끌어오지 못하는, 오히려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책이었다는 뜻이다.
동성애자를 마이너리티로 바라보는 사고를 전복하는 <GD 240> 역시 읽고 나면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불합리하게 소수자,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 작품 역시 그러니까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의 폭력을 극복하게 할지에 대해서는 좀 부족한 점이 느껴진다. 물론 작가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저 한 번 비틀어 풍자를 하고 싶었을 뿐,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면서, 어때, 이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메이저라고 너무 잘난 척하지 말자고, 이렇게 ‘쿨하게’ 말이다.
작가가 무거운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런 비판도 무의미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런 전복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좀 이야기해보려 한다. 남녀차별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대상이었고 차별하는 남성을 적, 혹은 공격의 대상으로 삼으면 남녀차별이 극복되지 않는 것처럼 동성애에 대한 폭력을 이성애를 소수자로 만듦으로써 극복하려 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전복적 사고’가 요즘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남성역차별’에 대한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여성혐오로도 나아간다. 물론 요즘 나타나는 여혐에는 사회의 극우화가 일조한 면이 크지, 이것을 페미니즘 운동의 잘못으로 보면 안 된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여성가족부라든가 정치적 이유로 악용되고 활성화된 일베로 인한 기형화된 사회현상으로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참에 건강한 페미니즘과 남녀평등의 방향을 새로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경화의 작품은 일반적인 청소년 소설과 많이 달랐다. 학생들이 읽어도 교사가 읽어도 학부모가 읽어도 될, 읽어야 할 논쟁의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좋은 소설이란 게 때로는 좋은 가치를 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작품이 좋은 소설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흥미로웠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었다. 청소년 소설 중에서 ‘청소년’이란 이름이 붙는 바람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작품이 꽤 많다. 어른들이 읽어보시라고 권하는 바이다. 특히 교사들께서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