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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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파스칼 키냐르를 그만 읽어야겠다.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은 이후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신비한 결속>을 읽었다. 영화로 나온 <세상의 모든 아침>도 보았다.

처음 <세상>을 보았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한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프랑스의 어느 시골의 느낌은 지금까지 읽은 모든 그의 작품에서 변하지 않고 살아 숨 쉰다. 거기에 등장인물들의 깊은 생각에 빠진 이마들이 있고 슬픔의 향기가 묻어 있는 언어 혹은 음악이 같이 있다. 그렇게 공통된 어떤 아우라가 있으면서도 작품들은 다 달랐다. 그러나, 이제는 그만 읽을까 한다.

 

프랑스와 프랑스 문학이 가지고 있는 그 단단한 기품의 정체가 무얼까 자주 생각한다. 남다른, 콧대 높은, 생각이 많은, 그것이 철학이 되어 바탕을 이루는, 그 위에 예술이 싹트고 자라나는, 자본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있는, 그런 느낌을 빅토르 위고나 에밀 졸라에서도 파스칼 키냐르에서도, 여러 프랑스 영화들에서도 느낀다. 여러 차례의 혁명을 거친 자부심에 기인한 것도 있을 것이고 오랜 역사와 사회적 분위기에 뿌리를 두었으면서도 개별이 존중받는 문화 역시 그런 예술적 성취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여러 결실 중 하나가 파스칼 키냐르이다.

 

하지만 <신비한 결속>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놓지 않았던 경탄의 끈이 의구심으로 바뀌는 순간이 왔다. 어쩌면 질시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누리는 고차원의 문화적 수준, 아무리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흉내 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런 의구심이 단지 부러움에 그친다면, 러시아의 혁명 전 귀족들이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고 요즘도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를 배우려 든다더라, 일본에서 프랑스 문화를 동경한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비웃었던 나도 결국은 같은 부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좀 든다.

 

파스칼 키냐르는 어떻게 그렇게 높은 차원의 문학과 음악의 세계에서 살 수 있었을까?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작품 속 주인공들, <세상..>의 콜롱브 선생, <신비한 결속>의 클레르, 그리고 <빌라..>의 안, 세상의 이목과 물질적 풍요와 안락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의, 자연과 영성에 다가가는 높은 예술성들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그것들은 결코 키냐르 개인의 성취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마음이 씁쓸해진다. 프랑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과 부의 바탕에는 제국의 피가 흐른다. 그것들이 없이 프랑스의 문화적 고양이 가능했을까. 파스칼 키냐르는,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고개를 젓고 싶겠지만 말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치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가슴이 아리다. 그런 물적 토대가 없어서 이룬 것이 별로 없는 우리 같은 주변국의 상대적 열패감에, 정신적으로 사랑하던 존재의 위선과 가면을 벗기고 본질을 봐야 하는 아픔까지.

 

안은 마침 죽음을 맞이하듯 세상 모두를 청산하고 훌훌 떠나버린다. 만약 안이 아닌 다른 보통 사람들도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삶으로의 완벽한 전환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택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안이 조금은 부러웠다.

누구나 한번쯤 다른삶을 꿈꾸어 본다. 농담 삼아서라도 이번 생은 틀렸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볼 테다,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안은 그걸 해낸 거다. 물론 작곡가로서의 삶은 그대로 유지했으며, 그가 선택한 또 다른 삶의 대가는 치열한 외로움이었다는 점에서 세속적인 관점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선택이긴 했다. 안으로서는 그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부럽다고 표현하기에는 그녀의 삶은 너무 힘겨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의 까칠한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안에게는 집이 참으로 많구나, 그 모든 집들(남자친구와 살던 집,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싫어서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날 때 처분할 재산들이 꽤나 많구나, 싶어서. 그의 선택은 그야말로 선택받은 자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어지간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있기에 안의 탈태와 전이와 여행과 전환은 가능했던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끼어들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안의 삶에 대해서보다 안에게 어른거리는 키냐르를 자꾸 생각했다. 안은 키냐르의 아니마이다. 돌아보니 <신비한 결속>의 여주인공 클레르에게서도 키냐르의 그림자를 보았다. 남자인 저자가 어떻게 이렇게 여자의 정신세계를, 마치 자기 이야기하듯 섬세하고 정확하게 그렸을까를 감탄하며 읽다가 닿은 생각이다. 물리적인 몸의 성별과 사회적 성, 그리고 정신적 영역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사회적 젠더가 강요하는 그런 구분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진정 인간으로서 자유로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키냐르는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제국의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키냐르의 자유로운 영혼과 그 성과들을 오래오래 사랑했을 것 같다.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명령하지 않았다.

 

무중력 상태가 찾아왔다. 육체가 자신에게서 살짝 떠나는 야룻한 상태. 내면세계의 모든 것이 바싹 말라버리는 상태. 통찰려 혹은 무념무상이 두개골의 공간 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태.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그것이 덜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상태. 고통이 최소한 육체 자체보다 좀더 먼 곳에서 느껴지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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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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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게 분쟁사, 분열사라고 느껴지면 공부하고 싶지 않은 법이다. 모든 역사를 공부하면서 최후의 승리자, 권력자의 역사라고 느껴져도 더 이상 공부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것을 이겨내려 애쓴 또 다른 지도자들의 투쟁이 얼마나 지난했는지를 볼 때 그 지난함이 권력자들의 수구적인 노력과 충돌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를 바꾸려 애썼던 자들끼리의 자멸적 싸움이었다면 역사는 환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그것을 - - 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공부했던 게 언제였나 돌아본다. 대학시절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롯해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 때는 박정희 정권이 가르쳐준 자유대한의 역사말고 또 다른 역사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내용들을 공부하다시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후에는 그저 객관적인 기록들만 나열해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많은 단체와 사건들의 공방을 들여다 보는 게 역사공부인가 싶어 역사책은 들여다 보지 않았다.

아무리 식민지에 강대국 사이에 낀국가로서의 처지에서, 시기적으로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서, 봉건주의와 근대화 사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치더라도 우리가 맞이한 역사적 결과물 자체가 지질하다 보니 더욱 역사를 공부할 맛이 안 났던 것 같다. 과정이 지난하고 지질하더라도 얻어낸 성과가 있다면 또 몰랐겠다.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은 길고 오류도 많았고 지질한 공방도 있었고 과거로의 회귀도 있었지만 그 모두가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 프랑스의 밑거름이 되었으니까. 어쩌면 우리도 먼 훗날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맞이하면 이 모든 역사를 답답함 없이 공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게 잘 안 된다는 게 안타깝다. 이 역사의 체증은 아직 내려가지를 않는다.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 묻혀졌던 그 이름들에 조명을 비추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근대사를 다룬 이 책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치를 제외하면 역시 당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헌영, 여운형, 김일성, 김구, 김원봉, 김단야 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다들 개인의 안일을 버리고 이타적이고 이상적인 꿈들을 품었던 사람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운명 혹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 나약한 일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능력과 열정을 가졌던 그들이 다들 그렇게 비참하게 짓밟혀야 했던 이유가 뭘까. 그들 중 누구도 민족도 국가도 구하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만약 그들이 좀 더 뛰어났더라면, 좀 더 잘했더라면 역사는 좀 달라졌을까? 옆 사람 말마따나 현장도 없고 골방에서 비밀모임이나 하다가 들통 나고 고초를 당하고 또 들통 나고 흩어지는 일만 반복했던 그들이 다른 전략 다른 전술을 썼더라면 역사는 좀 달라졌을까? 노동자와 농민과 함께 했던 진정한 지도자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일까? 묻혀있던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이 조선희를 만나 살아나듯 박헌영이 아닌 조만식이나 김구가 아닌 노동자의 지도자, 현장의 또 다른 지도자가 새로이 조명 받을 일은 없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무고한 죽음 헛된 노력은 없다는 믿는 사람이다. 저들의 죽음이나 고초가 누군가의 가슴에 좋은 역사에 대한 씨앗을 뿌렸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의 세상이 1920년대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이라면 그건 그들의 노고 덕이라고 믿는다. 나의 이런 막연한 낙관이 힘을 얻으려면 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접고 소설 세여자에 대한 이야기만 하자.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허정숙을 소개한 부분의 다음 구절을 꼽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정숙은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이 세상 모든 항구에 정박하고 싶었다.

 

물론 이 세 여인들의 활동이 단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열정에만 기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좋은 세상을 추구하는 이상을 품고, 어떤 이념이 그 이상에 가장 가까울지를 냉철하게 공부해가는 노력은 우연히 갖게 되는 게 아니다. 아무 열정에나 쉽게 휩쓸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분명 있지만 또한 저 사람은 다시 태어나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을 살아도 저렇게 살 것 같다 싶게 확고하고 일관된 삶의 태도를 가진 이도 분명 있다.

세 여자의 삶에는 우연도 있고 운명도 있다. 생애 전체가 다 신념과 태도로만 꽉 차 있지는 않다. 그래도 그냥 어쩌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은 분명 아니라 생각한다. 더 쉬운 삶, 더 안락한 삶도 가능했겠지만 언제나 선택은 자기 자신이 했던 사람들이다. 삶의 형태가 아니라 삶의 주체성이 중요한 것이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이 쓰는 것이다.

 

(고명자는) 한때는 골방에 틀어박혀 자수나 놓는 처지라 해도 역사를 바라보는 삶이란 그렇지 않은 삶보다 하나의 차원을 더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사는 또한 쓰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형식이 뭐가 중요한가, 내용의 진정성이 가치있지. 아름다운 시를 써도 남에게 보이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일갈하던 동료를 보면서 비웃었다. 이름을 알리고 기록을 남기는 게 허세고 공치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올바른 기록은 실제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멕시코 사파티스타는 과 기록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조선희의 작업은 매우 의미 있다. 새롭게 조명하고, 묻혔던 것을 끄집어내고, 의미를 붙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게 새로운 역사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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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김민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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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실용서를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실용서라고 해놓고 마음가짐에 대해 90%를 채우고 정말 실천할 거리라곤 할 수 없는 일을 늘어놓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나의 절실함과 작가의 진정성이 잘 만나면 실용서가 빛을 발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다.

 

내가 실용서가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외국어 학습지도, 자수나 드로잉에 관한 책도 발음연습에 관한 책도 사보았는데, 그 책들을 사면 언젠가 외국어를 잘하게 될 것만 같고 언젠가 자수를 하게 될 것만 같다. 그런 기대감이 좋다. 아마 김민식 피디의 이 책도 많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감을 건드렸을 것이다. 만약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담고 있다면? 더욱 좋겠지. 책 한권을 못 외우랴, 그렇다면 나에게도 희망은 있다, 라고.

 

남편은 내게 늘지도 않는 영어공부는 왜 그리 열심히 하느냐고 묻는다. 나의 영어 실력은 달팽이 같다. 100을 공부하면 10쯤 는다. 그래도 늘긴 느는 것 같다. 여행갈 때마다 조금 더 말하게 되긴 하니까. 곰실곰실 영어원서 소설도 읽고 있으니까. 써먹을 날이 있을까, 라는 회의가 들기 시작하면 공부가 하기 싫어진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매일 영어 공부를 한다고 훗날 영어를 사용하는 일을 하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영어 공부를 그만 두면 영어를 쓰는 일에 종사하게 될 가능성은 제로다.

 

이 책에는 일단 영어공부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많다. 좋은 사이트 등을 소개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미덕은 구체적인 미션을 준다. 소개한 <영어회화 100일의 기적>을 외워보자. 지금은 40일 즈음을 외우고 있다. 사실은 그 전에 회화 패턴 책 한 권을 다 받아쓰고 나만의 책을 만들기도 했기 때문에 기본 문장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민식 피디도 말했지만, 머리로 알고 해석할 줄 아는 게 말이 되어 나오는 건 아니란 것을 외우면서 실감했다. 이 책, 만만치 않다. 하루하루를 채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과거로 돌아가 외운 것을 확인해 보면 까먹어버린 것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렇게 나선형으로 외워서 다지기를 하면 확실히 나도 모르게 입에서 영어가 튀어나오긴 한다.

 

나는 영어 한 마디를 할 태세가 되어 있고, 다만 먼저 말 걸 용기가 없으므로 누군가 말을 걸어주기를 수줍게 기다리건만, 50대 한국 아줌마가 영어로 대답해주리라 기대하는 외국인은 별로 없는지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나라도 외국 나가면 젊은이들에게 말을 거니까). 써먹을 일 없어서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나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

 

나는 여행을 좀 더 즐겁게 다니기 위해서 영어가 필요하다. 언젠가 동화책 번역을 하고 싶다. 한국어교사자격증이 있는데 언젠가 외국인을 가르치게 될지도 모른다. 읽고 싶은 영어 원서도 무척 많다. 또 아는가? 내 아들딸이나 손주가 외국에 유학을 갈 때 따라가게 될지? 또 아는가? 외국에 나가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생길지? 그런 일이 안 생기면 또 어떤가. 난 지금 로알드 달의 <마틸다>를 원서로 읽고 있다. 모르는 단어가 수두룩한데도 너무나 재미있다. 궁금했던 부분들은 서점 갔을 때 한국어로 찾아 읽기도 한다(일부러 한국어판 책을 안 샀다.) 재미있다! 실력이 늘면 마틸다를 읽는 속도도 는다. 그게 느껴진다. 좋지 아니한가? 심지어 결국은 영어를 써먹지 못하고 죽을지라도 언젠가는이라고 생각하며 기대감을 품었던 시간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 목적이 없이 그저 즐기기 위해서도 취미생활을 하는데,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지만 않는다면 영어공부를 즐기며 놀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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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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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에 대한 이해와 오해

세상에 좋은 책은 많지만 팔리거나 알려진 것만큼이 꼭 그 책의 가치라고 볼 수는 없다. 묻혀있는 좋은 책이 얼마나 많은가. 반면 갑빠허세로 포장된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진정한 독서가는 베스트셀러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나도 가능하면 거기 현혹되지 않으려고 많이 애쓴다.

대형서점 가판에 예쁘게 누워 있는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일단 나는 한강의 <라틴어 수업>을 떠올렸다. 한강의 소설의 리메이크판인가? 하지만 안의 내용을 한두 장 읽어보면서 이 책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라틴어 수업, 이라는 말이 주는 신비로운 울림과 너무 어렵지 않은 내용(아마도 수업 내용 중 인문학적 교양의 선을 넘지 않는 부분만 책에 담았을 것이다), 특히 생활 속에서 자주 들어보던 말들이 라틴어이거나 라틴어에서 유래됐다는 이야기들은 꼭 라틴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질문으로 끝나는 수업

교사인 나는 늘 좋은 수업이 무엇일까를 고민한다. 유창한 달변, 수업 내용의 간결하고 정확한 전달, 학생의 흥미를 끌고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구성 등등 좋은 수업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참으로 많다. 그 모든 것들이 잘 어우러져 한 시간 수업을 완벽하게 마쳤을 때의 보람은 수업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좋은 수업은 그 한 시간의 강의에 폭 빠져 듣게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더 공부해 보고 싶게 만드는 수업, 나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존감이 돋아나는 수업, 생각을 깊게 만드는 수업, 긴긴 세월이 가도 나에게 영향을 주는 수업, 그런 수업이 아니라면 그냥 재미있는 수업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물론 재미있는 수업도 쉽지는 않다).

 

나는 국어선생이다. 많은 어학적, 문학적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잘 요약된 표로 외우게 한다든지 시를 분석함으로써 단기간에 시험을 잘 보는 지식을 입력해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수업은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도 더 좋은 작품으로 인생을 생각하게 하고 세상을 알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그런 수업이고 싶다.

수업의 텍스트는 그래서 중요하다, 똑같은 문법을 배워도 더 좋은 글과 문장으로 배울 수 있다. 한동일 신부도 우리나라 수능 영어 문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기왕이면 좋은 철학, 문학, 역사, 인문학의 글을 읽게 하는 방향으로 영어교육이 바뀌어야 함을 지적한다. 다시, 좋은 수업은 지식 전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기본이고) 생각하게 하고 인생을 깊이 있게 만드는 수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동일 교수의 수업은 모두 질문으로 끝난다. 오늘의 수업으로 라틴어 문법을 2시간, 3시간 분량 배웠을 터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생각거리들을 안고 가라고.

 

수업을 시작할 때 꺼내는 말을 발문이라 한다. 학교 교수법에서는 발문을 중요시한다. 수업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발문보다 중요한 질문으로 끝나는 수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물론 대학생들의 수업과 나처럼 중학생, 그것도 쉬는 시간 종이 치면 매점이나 운동장으로 달려가고 싶어 하는 남자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질문이 꼭 바로 그 시간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는 것은 대학의 수업이나 남중의 수업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 경험으로는 엎드려 잠만 자는 것 같은 소년들도 오후의 아지랑이 같은 수업에서조차 무언가를 배워가는 것을 많이 보았다. 수업의 한 장면, 하나의 질문, 한 구절, 작은 눈빛으로도 소년들은 격려 받고 의아해 하고 생각하게 되고 감동받고, 그런다는 것을. 그래서 수업말미에 교수가 던져주는 저 질문들이 얼마나 많은 인생의 파장을 그릴지 짐작이 되는 것이다. 나도 그런, 질문으로 끝나는 수업을 해보고 싶다.

 

데 메아 비타 (De mea vita) 나의 인생에 대하여

한동일 선생은 수업 관제로 데 메아 비타 (De mea vita) 나의 인생에 대하여 라는 글을 쓰게 한단다. 제목 <나의 인생에 대하여>. 그리하여 맘껏, 떠오르는 대로 써보라고 내 수업에서도 해보고 싶다. 어떤 주제를 주고 글을 쓰라 하면 어린 아이들은 자꾸 질문을 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주어진 주제를 보고 떠오르는 대로 써보라고 말이다. 이번 학기말에 꼭 해보리라.

 

이 라틴어 수업은 서강대, 연세대 같은 공부깨나 한 학생들이 갈 수 있는 대학의 교양강좌였단다. 게다가 교양이라고 하기엔 꽤나 어려운 수업이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한테 자부심깨나 있을 학생들이 특히 이 수업을 많이 듣지 않았을까? 그런데 권말에 놓인 학생들의 글을 읽어보면 생각보다 자존감들이 높은 편은 아닌 듯이 보인다.

젊음이란 게 원래 자존이든 전망이든 불안정하기 짝이 없을 때이기도 하지만 공부 잘했을 학생들이 쉽게 흔들리는 모습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공부, 성적으로 자신의 자존을 확인한다. 그러나 성적이란 것은 올라갈 곳이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경쟁이 아니면 이를 수 없는 곳.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의 멘탈은 참으로 약하기 짝이 없다. 한편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좋은 대학도 못가고 학업을 계속하지도 못하고 학벌 열등감에 상처받고 알바 등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많이 알고 있는 나로서는, 공부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쉽게 자존감을 낮추는 명문대 학생들의 유약한 정신에 안타까움도 좀 느꼈다. 세상 어떤 일도 쉽지 않다. 공부도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꼰대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으나 그보다 더 힘든 일도 많다. 그러니 부디 스스로를 너무 예민하게 다그치고 절망에 빠트리지 말라, 젊음아.

 

공부하는 노동자, 겸손하게 공부하기

이 수업의 미덕은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 했다. 로마의 역사와 철학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바른 태도와 인성과 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유도하는 수업의 방향성이 보인다.

지금은 철학자라는 말의 느낌이 좀 달라졌지만 원래는 피타고라스가 스스로를 겸손하게 일컫고자 한 말이었다고 한다. 지혜를 궁구하는 사람이라... 때로는 삶에 그러한 자세가 필요하다. 한동일 선생은 모든 것을 조금씩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같다 라는 말로써 학문의 자세를 일깨운다. 라틴어수업 자체가 어렵기도 했겠지만 기말고사를 어렵게 내고 이렇게 말한다.

 

문제지를 보면 풀기가 쉽지 않을 거다. 시험을 통해 학문 앞에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느꼈으면 한다.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미천한지, 학문 앞에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는 겸손밖에 없다는 것을 시험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껴보라. 이게 내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마지막 수업이다.”

 

그 자신이 공부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대학을 단지 취업이나 윤택한 삶을 위해 관통해야 할 도구로 여기는 대다수의 학생에게도 공부에 대한 자세를 일깨워주는 말씀이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남들보다 공부를 잘했거나 좀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오만은 더 강해진다. 하지만 공부란 게 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이 보이는 게 맞다. 남들보다 더 어려운 공부를 많이 한 한동일 교수가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을 일컬으며 이렇게 말한다.

에고 숨 오페라리우스 스투덴스(Ego sum operarius studens)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는 앎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잃지 말기를 당부한다.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이 세상에 완벽한 앎은 없음을, 그 누구도 자신이 많이 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됨을 말했다. 그걸 글자로는 많이 만나 알고 있으면서도 아, 내가 이 큰 세상 앞에서 참 작은 사람이구나, 내가 아는 것은 모래 한 알갱이에도 못 미치는구나, 라고 깨닫고 겸손해지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그걸 아마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말,

 

탄툼 베데무스 콴툼 쉬무스 -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공부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지식이 삶의 전부일 수도 없고 지식이 많다고 인생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넓은 안목을 갖기 위해 충실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 인생을 잘 살기 위해 공부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오늘날 한국 교육에 대한 에두른 비판도 눈에 띈다. 특히 영어교육 열풍을 언급한 듯 모국어로 안 되는 것은 외국어로도 안된다는 말은 모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매우 공감이 되는 바이다. 내가 국어교사이지만 지금도 꾸준히 외국어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또 현장에서 영어 공부에 목매는 많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국어공부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야 하는 입장에서 말이다. 이것은 많은 현장의 영어교사들도 공감하는 바이다.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영어력 신장의 한계는 명백하다. 모국어의 능력은 사고 능력과 직결돼 있다. 충분히 옳게 깊게 생각할 수 있어야 남의 말과 글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에게서도 좋은 말, 글이 나온다. 당연하지 않은가? 모국어로 충분히 사고할 능력, 즉 모국어 구사 능력과 사고력을 갖추지 않고 외국어를 먼저 배우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영어조기교육에 목매는 학부모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 공부한 것을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라며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전보다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면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공부, 공부 하면서 아이들을 벽으로 몰아붙이는 오늘날의 부모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Si vales bene, valeo). -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그의 수업 중 들려준 이 따뜻한 라틴어 인사말은 한동일의 강의가 지향하는 바를 잘 보여준다. 어려운 공부지만 겸손하게 할 것, 열심히 해서 남 주는 공부를 할 것,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 그러기 위해 당신 자신의 자존을 잘 지킬 것, 그런 정신을 가르치고 싶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시대의 진짜 어른이라면 고통스러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라면서 그들의 고통을 낭만적 언사로 호도하지도 않을 것이고 진정 바닥까지 아파본 적도 없으면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중동도 가고 알바도 해봐라라고 다그치지도 않을 것이다.

저자는 북유럽에서 배울 것은 보이는 복지가 아니라 미래 세대에 투자하는 제도적 사회적 노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용한 이런 비유가 나는 참 좋았다. 봄날 산의 나무는 모든 에너지와 역량을 나무의 가장 끝인 꽃과 이파리에 몰아준다. 청춘이 힘내서 열심히 살도록 온 사회의 역량을 몰아 지원해줘야 함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야말로 진정한 어른의 목소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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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사자의 서
파드마삼바바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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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나의 친구가 지난 84일 세상을 떠났다.

3년 전 간 이식 수술을 받긴 했지만 회복이 좋아서 그의 죽음을 조금도 상상할 수 없었다.

나이는 나보다 8살이나 많지만 친구처럼 가까웠던 사람...

공학도였지만 문학을 전공한 나보다 더 많은 시를 알았던 사람...

음악과 바다와 술을 많이 좋아했던 사람...

참 좋은 교사였던 사람...

어린 사람에게 배우기를 망설이지 않고 약한 이의 방패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

사랑하던 선배, 동료, 친구였던 나의...

지금 그는 바르도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짓던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고 60년을 채 못 채운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어디선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평소 그의 성품대로 욕심도 없이 침착하게 한 생의 마감을 손수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9월 중순에 49재를 맞이하면 그의 가족은, 나는, 그를 영원히 보내야 할 것이다.

 

둘째 아이를 낳은 32살부터 이상하게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야 고3 때인들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하필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가장 바쁘고 충만할 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세상에 대한 책무를 다했다는 안도와 더불어 두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두려움, 그 모순된 감정이 축음에 대한 상념을 불러왔나 보다.

삶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언제나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 갈망하고 준비하는 일, 일찌감치 꿈꾸었던 일이다. 20대에 강원도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말마다 대관령 고개를 넘어 서울을 오고가면서, 언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자취방이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었던 일, 여행을 떠날 때마다 살림을 정리하고 중요한 정보에 대한 메모를 남겨두고 오는 일, 시간이 날 때마다 일기장을 뒤지고 부끄러운 기록이 없는지 돌아보는 일...

 

아마 홍 선생님도 그러지 않았을까. 말씀은 늘 의연하게 해서 치료를 잘하고 계신 줄 알았는데 아마도 그는 수술을 하는 그 순간, 그리고 이른 퇴직을 하는 그 순간 모든 일들에 대비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얼른 나아서 나랑 해외여행 같이 가자고 명랑하게 웃고 떠들었던 일이 엊그제다.

 

티벳에서는 죽은 사람이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사후 중간 상태를 바르도라 부른다. 우리가 49재를 지내면서 죽은 이를 영원히 보내는 마지막 제의를 하는 것도 바로 이 바르도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 좋은 저승으로 가기를 기원하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는 인간은 육신을 버릴 때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음의 삶을 얻으리라. 그의 생각이 몰두해 있는 그 상태를 그는 얻게 되리라.” 라고 말했다 한다. 아버지를 떠나보낼 때도, 홍 선생님을 보내면서도 그들이 바르도에서 한 생을 마무리할 때 부디 좋은 길로, 환한 빛의 길로 갔기를 바라 본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나에게도 닥칠 일, 이 삶을 어찌 살고 죽음을 어찌 맞이해야 영적으로 자유롭고 편안한 세계로 갈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가장 좋은 단계를 어떠한 모태에도 들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28살에 <숫타니파타>를 읽으며 가장 마음에 새긴 구절도 다시는 모태에 들지 말기를이라는 기원 문구였다. <카타 우파니샤드>에도 분별력이 없는 사람, 마음이 불안정하고 가슴이 순결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또다시 태어날 것이나 분별력을 가진 사람, 마음이 안정되고 가슴이 순결한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며 태어남이 없는 세계에 도달할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 불교의 세계는 일관되게 이 생을 벗어나는 일을 최고의 경지로 삼는다. 그러나 삶이란, 비록 대부분은 진흙탕이거나 슬픔이거나 피로한 현실일지라도 가끔씩 찾아오는 아름다운 세상, 평온한 행복들 때문에 이렇게라면 다음 생도 조금 더 살아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평범한 자는 어쩌면 불행한 사람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도 다시는 모태에 들고 싶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내가 죽는 순간에는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정신세계보다 이승에 남기고 가는 아름다운 햇살을 그리워하는 죽음이 나쁘기만 하지는 않으리라.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3일 반 혹은 4일 동안 영혼은 자신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기절 상태 또는 수면 상태에 빠지는데 이 기간이 첫 번째 바르도이다. 두 번째 바르도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르도이고 이 바르도는 영혼이 환생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이 두 번째 바르도에서 사자는 자신이 여전히 육체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데 이것을 미망(迷妄)이라고 한다. 일반인들이 겪는 정상적인 과정이지만 명상 수행을 한 사람은 바르도 상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평화의 니르바나로 들어가거나 육신을 버리자마자 곧바로 환생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줄곧 깨어있는 의식 상태를 유지한다. 죽어서도 선명하게 자신과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이다. 혹여 환생을 하더라도 맑은 의식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살았던 시절에 늘 명상하고 자신의 영혼을 맑게 유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를 지녔는지 어떤지를 떠나 내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자(死者)가 자신의 전생들의 다양한 모습과 형태들을 기억해 내는 것, 이것이 그의 진정한 앎의 첫 번째 단계이고 명상하는 삶을 산 자들에게 당연히 얻어지는 결과라고 한다. 인간 육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이렇듯 여러 물질계의 영역을 돌면서 끊임없이 윤회하는 동안에도 그 속에 담긴 의식체는 그 짧은 한 생애 기간에는 변함없이 인간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삶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고 죽음의 순간, 심지어 죽고 난 후 바르도의 단계에서도 의식의 선명성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늘 맑은 영혼으로 깨어있으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겠지. 또한 인간은 마음으로 짓는 선하거나 악한 정신적인 행위와 입으로 짓는 말의 행위, 그리고 몸으로 짓는 신체적인 행위 모두에 대해서 과보를 받는다. 좋은 말, 좋은 행동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사는 삶. 그나마 윤회의 질곡에서 종교인이 아닌 범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지난 가을 미술사학을 공부하는 딸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집트 문명 전시회에 간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전시회에 갈 때마다 꼬치꼬치 그림이며 유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던 딸아이는 이제 거꾸로, 자기가 배운 이집트 고대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도슨트 역을 자처한다. 전시회의 대부분은 이집트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들인데 보통 파라오의 무덤 유적들을 주로 전시하는 것과 달리 평민들의 무덤과 귀족이나 왕의 무덤을 비교하여 전시해 놓아 신선한 관점으로 호평을 받은 전시였다. 어떤 그림 앞에서 딸은 죽은 이가 저승의 심판을 받을 때 자기 심장을 저울에 올려 조약돌의 무게와 달아보고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판가름한다는 설명을 해준 적이 있다. 사자는 저울에 올라간 자신의 심장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심장이여, 그대 스스로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말라. 신들의 모임 앞에서 나의 적이 되지 말라....” 이 비슷한 장면이 <티벳 사자의 서>에도 나온다.

 

죽음의 순간에 나타나는 투명한 빛을 정광명(淨光明)이라 한다. 이때 경전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구해 이 가르침을 반복해 여러 번 읽게 하면 좋다고 한다. 죽음이 급작스럽게 다가오지 않고 가능한 일이겠으나 대개 노화나 오랜 투병 후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가족이 사제에게 달려갈 수 있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행복하겠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의식을 지닌 채 죽을 수 있다면, 그리고 육신을 벗는 더없이 중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나타나는 투명한 빛을 알아차리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면, 그에게 윤회의 환영과 굴레는 그 즉시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그 외에도 바르도의 기간에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기회는 몇 번 있다. 죽은 자는 의식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남아 있는 이들은 죽은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경전을 읽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불교식으로 49재를 치렀는데, 매주 절에 갈 때뿐 아니라 집에서도 엄마는 새벽마다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다.

 

만약 임종을 맞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오랜 시간을 갖게 되고 서둘러 죽지 않게 된다면 그가 건강했을 때 좋아한 경건한 생애담들과 기도문들을 그의 앞에서 읽어주면 좋다는데 혹여 종교가 다르더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죽은 후에는 살았을 때 비록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였을지라도 모든 감각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회복된다는데 뇌졸중으로 언어와 움직임을 잃었던 내 아버지가 꿈속에서는 늘 가장 건강하고 활발하던 시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으면 참 좋겠다. 죽을 때 고통 받았던 사람도 사후세계에서는 온전하고 건강할 수 있기를...

 

사후 세계의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를 청하는 기원문에는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 고통 없이 살게 해달라는 내용이 많은데 그 중 내가 어느 곳에 태어나든지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이 되게 하소서라는 구절과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이 행복을 얻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공생과 배려를 꿈꾸지 않고 다음 생이 행복할 수 있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기도를 적어 본다.

 

 

,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방황할 때

내 마음에서 나온 텅 빈 몸이 나에게 내려올 때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여, 그대들의 자비의 힘으로

두려움과 공포와 무서움이 이 사후세계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악한 행위들의 힘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수호신들이여 그 고통을 내쫓아 주소서.

천 개의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존재의 근원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내 귀를 때릴 때

그 모든 소리가 위대한 진언이 되어 울리게 하소서.

아무런 보호자도 없는 나를 내 생전에 쌓은 업이 추적해 올 때

자비의 신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일 때문에 슬픔이 내게로 밀려올 때.

깊은 명상에서 나오는 투명하고 행복한 빛이 나를 비추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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