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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라는 게 ‘분쟁사, 분열사’라고 느껴지면 공부하고 싶지 않은 법이다. 모든 역사를 공부하면서 최후의 승리자, 권력자의 역사라고 느껴져도 더 이상 공부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것을 이겨내려 애쓴 또 다른 지도자들의 투쟁이 얼마나 지난했는지를 볼 때 그 지난함이 권력자들의 수구적인 노력과 충돌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를 바꾸려 애썼던 자들끼리의 자멸적 싸움이었다면 역사는 환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그것을 ‘정- 반- 합’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공부했던 게 언제였나 돌아본다. 대학시절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롯해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 때는 박정희 정권이 가르쳐준 ‘자유대한의 역사’ 말고 또 다른 역사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내용들을 공부하다시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후에는 그저 객관적인 기록들만 나열해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많은 단체와 사건들의 공방을 들여다 보는 게 역사공부인가 싶어 역사책은 들여다 보지 않았다.
아무리 식민지에 강대국 사이에 ‘낀국가’로서의 처지에서, 시기적으로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서, 봉건주의와 근대화 사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치더라도 우리가 맞이한 역사적 결과물 자체가 지질하다 보니 더욱 역사를 공부할 맛이 안 났던 것 같다. 과정이 지난하고 지질하더라도 얻어낸 성과가 있다면 또 몰랐겠다.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은 길고 오류도 많았고 지질한 공방도 있었고 과거로의 회귀도 있었지만 그 모두가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 프랑스의 밑거름이 되었으니까. 어쩌면 우리도 먼 훗날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맞이하면 이 모든 역사를 답답함 없이 공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게 잘 안 된다는 게 안타깝다. 이 역사의 체증은 아직 내려가지를 않는다.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 묻혀졌던 그 이름들에 조명을 비추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근대사를 다룬 이 책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치를 제외하면 역시 당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헌영, 여운형, 김일성, 김구, 김원봉, 김단야 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다들 개인의 안일을 버리고 이타적이고 이상적인 꿈들을 품었던 사람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운명 혹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 나약한 일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능력과 열정을 가졌던 그들이 다들 그렇게 비참하게 짓밟혀야 했던 이유가 뭘까. 그들 중 누구도 민족도 국가도 구하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만약 그들이 좀 더 뛰어났더라면, 좀 더 잘했더라면 역사는 좀 달라졌을까? 옆 사람 말마따나 현장도 없고 골방에서 비밀모임이나 하다가 들통 나고 고초를 당하고 또 들통 나고 흩어지는 일만 반복했던 그들이 다른 전략 다른 전술을 썼더라면 역사는 좀 달라졌을까? 노동자와 농민과 함께 했던 진정한 지도자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일까? 묻혀있던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이 조선희를 만나 살아나듯 박헌영이 아닌 조만식이나 김구가 아닌 노동자의 지도자, 현장의 또 다른 지도자가 새로이 조명 받을 일은 없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무고한 죽음 헛된 노력은 없다는 믿는 사람이다. 저들의 죽음이나 고초가 누군가의 가슴에 좋은 역사에 대한 씨앗을 뿌렸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의 세상이 1920년대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이라면 그건 그들의 노고 덕이라고 믿는다. 나의 이런 막연한 낙관이 힘을 얻으려면 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접고 ‘소설 세여자’에 대한 이야기만 하자.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허정숙을 소개한 부분의 다음 구절을 꼽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정숙은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이 세상 모든 항구에 정박하고 싶었다.
물론 이 세 여인들의 활동이 단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열정에만 기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좋은 세상을 추구하는 이상을 품고, 어떤 이념이 그 이상에 가장 가까울지를 냉철하게 공부해가는 노력은 우연히 갖게 되는 게 아니다. 아무 열정에나 쉽게 휩쓸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분명 있지만 또한 저 사람은 다시 태어나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을 살아도 저렇게 살 것 같다 싶게 확고하고 일관된 삶의 태도를 가진 이도 분명 있다.
세 여자의 삶에는 우연도 있고 운명도 있다. 생애 전체가 다 신념과 태도로만 꽉 차 있지는 않다. 그래도 그냥 어쩌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은 분명 아니라 생각한다. 더 쉬운 삶, 더 안락한 삶도 가능했겠지만 언제나 선택은 자기 자신이 했던 사람들이다. 삶의 형태가 아니라 삶의 주체성이 중요한 것이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이 쓰는 것이다.
(고명자는) 한때는 골방에 틀어박혀 자수나 놓는 처지라 해도 역사를 바라보는 삶이란 그렇지 않은 삶보다 하나의 차원을 더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사는 또한 쓰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형식이 뭐가 중요한가, 내용의 진정성이 가치있지. 아름다운 시를 써도 남에게 보이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일갈하던 동료를 보면서 비웃었다. 이름을 알리고 기록을 남기는 게 허세고 공치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올바른 기록은 실제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멕시코 사파티스타는 ‘말’과 기록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조선희의 작업은 매우 의미 있다. 새롭게 조명하고, 묻혔던 것을 끄집어내고, 의미를 붙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게 새로운 역사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