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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사자의 서
파드마삼바바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5년 8월
평점 :
소중한 나의 친구가 지난 8월 4일 세상을 떠났다.
3년 전 간 이식 수술을 받긴 했지만 회복이 좋아서 그의 죽음을 조금도 상상할 수 없었다.
나이는 나보다 8살이나 많지만 친구처럼 가까웠던 사람...
공학도였지만 문학을 전공한 나보다 더 많은 시를 알았던 사람...
음악과 바다와 술을 많이 좋아했던 사람...
참 좋은 교사였던 사람...
어린 사람에게 배우기를 망설이지 않고 약한 이의 방패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
사랑하던 선배, 동료, 친구였던 나의...
지금 그는 바르도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짓던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고 60년을 채 못 채운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어디선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평소 그의 성품대로 욕심도 없이 침착하게 한 생의 마감을 손수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9월 중순에 49재를 맞이하면 그의 가족은, 나는, 그를 영원히 보내야 할 것이다.
둘째 아이를 낳은 32살부터 이상하게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야 고3 때인들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하필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가장 바쁘고 충만할 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세상에 대한 책무를 다했다는 안도와 더불어 두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두려움, 그 모순된 감정이 축음에 대한 상념을 불러왔나 보다.
삶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언제나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 갈망하고 준비하는 일, 일찌감치 꿈꾸었던 일이다. 20대에 강원도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말마다 대관령 고개를 넘어 서울을 오고가면서, 언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자취방이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었던 일, 여행을 떠날 때마다 살림을 정리하고 중요한 정보에 대한 메모를 남겨두고 오는 일, 시간이 날 때마다 일기장을 뒤지고 부끄러운 기록이 없는지 돌아보는 일...
아마 홍 선생님도 그러지 않았을까. 말씀은 늘 의연하게 해서 치료를 잘하고 계신 줄 알았는데 아마도 그는 수술을 하는 그 순간, 그리고 이른 퇴직을 하는 그 순간 모든 일들에 대비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얼른 나아서 나랑 해외여행 같이 가자고 명랑하게 웃고 떠들었던 일이 엊그제다.
티벳에서는 죽은 사람이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사후 중간 상태를 ‘바르도’라 부른다. 우리가 49재를 지내면서 죽은 이를 영원히 보내는 마지막 제의를 하는 것도 바로 이 바르도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 좋은 저승으로 가기를 기원하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는 “인간은 육신을 버릴 때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음의 삶을 얻으리라. 그의 생각이 몰두해 있는 그 상태를 그는 얻게 되리라.” 라고 말했다 한다. 아버지를 떠나보낼 때도, 홍 선생님을 보내면서도 그들이 바르도에서 한 생을 마무리할 때 부디 좋은 길로, 환한 빛의 길로 갔기를 바라 본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나에게도 닥칠 일, 이 삶을 어찌 살고 죽음을 어찌 맞이해야 영적으로 자유롭고 편안한 세계로 갈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가장 좋은 단계를 어떠한 모태에도 들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28살에 <숫타니파타>를 읽으며 가장 마음에 새긴 구절도 ‘다시는 모태에 들지 말기를’ 이라는 기원 문구였다. <카타 우파니샤드>에도 분별력이 없는 사람, 마음이 불안정하고 가슴이 순결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또다시 태어날 것이나 분별력을 가진 사람, 마음이 안정되고 가슴이 순결한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며 태어남이 없는 세계에 도달할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 불교의 세계는 일관되게 이 생을 벗어나는 일을 최고의 경지로 삼는다. 그러나 삶이란, 비록 대부분은 진흙탕이거나 슬픔이거나 피로한 현실일지라도 가끔씩 찾아오는 아름다운 세상, 평온한 행복들 때문에 이렇게라면 다음 생도 조금 더 살아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평범한 자는 어쩌면 불행한 사람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도 다시는 모태에 들고 싶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내가 죽는 순간에는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정신세계보다 이승에 남기고 가는 아름다운 햇살을 그리워하는 죽음이 나쁘기만 하지는 않으리라.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3일 반 혹은 4일 동안 영혼은 자신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기절 상태 또는 수면 상태에 빠지는데 이 기간이 첫 번째 바르도이다. 두 번째 바르도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르도’이고 이 바르도는 영혼이 환생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이 두 번째 바르도에서 사자는 자신이 여전히 육체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데 이것을 미망(迷妄)이라고 한다. 일반인들이 겪는 정상적인 과정이지만 명상 수행을 한 사람은 바르도 상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평화의 니르바나로 들어가거나 육신을 버리자마자 곧바로 환생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줄곧 깨어있는 의식 상태를 유지한다. 죽어서도 선명하게 자신과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이다. 혹여 환생을 하더라도 맑은 의식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살았던 시절에 늘 명상하고 자신의 영혼을 맑게 유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를 지녔는지 어떤지를 떠나 내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자(死者)가 자신의 전생들의 다양한 모습과 형태들을 기억해 내는 것, 이것이 그의 진정한 앎의 첫 번째 단계이고 명상하는 삶을 산 자들에게 당연히 얻어지는 결과라고 한다. 인간 육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이렇듯 여러 물질계의 영역을 돌면서 끊임없이 윤회하는 동안에도 그 속에 담긴 의식체는 그 짧은 한 생애 기간에는 변함없이 인간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삶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고 죽음의 순간, 심지어 죽고 난 후 바르도의 단계에서도 의식의 선명성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늘 맑은 영혼으로 깨어있으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겠지. 또한 인간은 마음으로 짓는 선하거나 악한 정신적인 행위와 입으로 짓는 말의 행위, 그리고 몸으로 짓는 신체적인 행위 모두에 대해서 과보를 받는다. 좋은 말, 좋은 행동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사는 삶. 그나마 윤회의 질곡에서 종교인이 아닌 범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지난 가을 미술사학을 공부하는 딸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집트 문명 전시회에 간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전시회에 갈 때마다 꼬치꼬치 그림이며 유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던 딸아이는 이제 거꾸로, 자기가 배운 이집트 고대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도슨트 역을 자처한다. 전시회의 대부분은 이집트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들인데 보통 파라오의 무덤 유적들을 주로 전시하는 것과 달리 평민들의 무덤과 귀족이나 왕의 무덤을 비교하여 전시해 놓아 신선한 관점으로 호평을 받은 전시였다. 어떤 그림 앞에서 딸은 죽은 이가 저승의 심판을 받을 때 자기 심장을 저울에 올려 조약돌의 무게와 달아보고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판가름한다는 설명을 해준 적이 있다. 사자는 저울에 올라간 자신의 심장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심장이여, 그대 스스로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말라. 신들의 모임 앞에서 나의 적이 되지 말라....” 이 비슷한 장면이 <티벳 사자의 서>에도 나온다.
죽음의 순간에 나타나는 투명한 빛을 정광명(淨光明)이라 한다. 이때 경전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구해 이 가르침을 반복해 여러 번 읽게 하면 좋다고 한다. 죽음이 급작스럽게 다가오지 않고 가능한 일이겠으나 대개 노화나 오랜 투병 후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가족이 사제에게 달려갈 수 있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행복하겠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의식을 지닌 채 죽을 수 있다면, 그리고 육신을 벗는 더없이 중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나타나는 투명한 빛을 알아차리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면, 그에게 윤회의 환영과 굴레는 그 즉시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그 외에도 바르도의 기간에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기회는 몇 번 있다. 죽은 자는 의식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남아 있는 이들은 죽은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경전을 읽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불교식으로 49재를 치렀는데, 매주 절에 갈 때뿐 아니라 집에서도 엄마는 새벽마다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다.
만약 임종을 맞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오랜 시간을 갖게 되고 서둘러 죽지 않게 된다면 그가 건강했을 때 좋아한 경건한 생애담들과 기도문들을 그의 앞에서 읽어주면 좋다는데 혹여 종교가 다르더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죽은 후에는 살았을 때 비록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였을지라도 모든 감각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회복된다는데 뇌졸중으로 언어와 움직임을 잃었던 내 아버지가 꿈속에서는 늘 가장 건강하고 활발하던 시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으면 참 좋겠다. 죽을 때 고통 받았던 사람도 사후세계에서는 온전하고 건강할 수 있기를...
‘사후 세계의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를 청하는 기원문’ 에는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 고통 없이 살게 해달라는 내용이 많은데 그 중 ‘내가 어느 곳에 태어나든지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이 되게 하소서’라는 구절과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이 행복을 얻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공생과 배려를 꿈꾸지 않고 다음 생이 행복할 수 있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기도를 적어 본다.
“아,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방황할 때
내 마음에서 나온 텅 빈 몸이 나에게 내려올 때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여, 그대들의 자비의 힘으로
두려움과 공포와 무서움이 이 사후세계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악한 행위들의 힘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수호신들이여 그 고통을 내쫓아 주소서.
천 개의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존재의 근원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내 귀를 때릴 때
그 모든 소리가 위대한 진언이 되어 울리게 하소서.
아무런 보호자도 없는 나를 내 생전에 쌓은 업이 추적해 올 때
자비의 신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살아 있을 때 행한 일 때문에 슬픔이 내게로 밀려올 때.
깊은 명상에서 나오는 투명하고 행복한 빛이 나를 비추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