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수업 - 법륜 스님이 들려주는 우리 아이 지혜롭게 키우는 법
법륜 지음, 이순형 그림 / 휴(休)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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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 경제적인 것은 없다, 라고 법륜스님은 아이 키우기의 중요성을 말한다. 왜 많은 가치 중 하필 경제를 말했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책은 내내 스님의 명성에 걸맞게 간결하고 적절한 조언으로 가득 차 있다. 두 자녀를 낳아 기르고 사춘기 소년들을 30년 가까이 키워온 나로서는 사춘기 아이들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해주는 스님이 고맙다. 가령 아이가 자기가 한 10쯤 잘못했다 싶은데, 벌을 100쯤 받았다면 억울하겠지. 그럼 자기가 잘못했다는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억울한 마음만 남는다. 결국 반항심만 생기고 교육 효과는 없다, 자녀와의 갈등, 훈육상황에 대한 스님의 조언은 경험상으로 보아도 매우 지혜롭다. 잘못에 대한 인정과 설득 작업이 훈육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데 무조건 야단부터 치는 부모는 아이를 억압하여 말을 잘 듣게 했다고 착각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런 억압이 효과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설득되지 않은 채 행동만 수정된 듯 보이는 아이들은 언젠가 그 앙금을 드러낸다. 반항이든, 무기력이든, 부모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든.

 

학교에서 학폭위가 열릴 때 아이들보다 더 기를 쓰고 싸우는 부모들, 자기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부모들의 태도는 결코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만 모른다. 자기 자녀가 잘못을 저질러도 편을 들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이를 망치는 길이라는 걸 모른다. 그래서 특히 다음 이야기는 요즘 학부모들께 꼭 들려주고 싶다.

 

친구들과 싸우고 돌아왔을 때 부모는 네가 잘못했다’, ‘친구가 잘못했다하고 판단하면 안 된다. 아이가 맞고 왔으면 흥분하지 말고 아이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주라. 친구를 나쁜 놈이라고 말하지 말라. 아이 마음에 보복심을 심어주게 된다.

 

스님은 부모가 자식의 자립을 막으면 자식은 반항을 하지만 그렇다고 자립도 못한다. 반항심은 생기는데 막상 어떻게 스스로 서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고마움은 없고 원망만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 간섭하지 말고 놓아두라고 한다. 어렸을 때는 세심한 돌봄이, 사춘기 이후에는 믿음이 양육의 기본이 되어야 함에도 장성할 때까지 들러붙어 있는 것이 사랑인 줄 착각한다.

 

장성한 자녀가 사회성이 떨어지고 대인관계를 두려워 한다면 사춘기 전후 아이가 시행착오를 거듭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 한다. 자식이 강아지처럼 순순하게 말 잘 듣는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때가 되면 부모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고도 한다. 사춘기의 반항은 뒤집어 생각하면 성장에 필요한 성장통일 수도 있다. 그것은 억누르지 않는 것이 교육적이다.

 

하지만 자녀와 많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무조건 허용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음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흔히 부모들은 그 경계를 헷갈려 오류를 범하곤 하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등학생 때는 아이한테 허락을 받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아이를 상전처럼 모시고 허락을 받으면 나중에 문제가 된다. 자신의 일은 자기가 결정하되 아이와 대화를 나눠서 이해를 구하라.

아이가 문제제기를 하면 무시하지 말고 들어주라. 그리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라. 아이도 이성적으로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만 무의식이 안 따라주는 것뿐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엄마들은 헌신적인 사랑은 있는데 지켜봐주는 사랑과 냉정한 사랑이 없다.’, ‘엄마부터 자식을 어른으로 대우해야 자식이 어른이 되는 거다.’라고 한다.

이렇게 개개인 가정과 부모의 양육에 대해 조언하지만 그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고민 상담에 그치지 않는 것이, 양육은 국가와 사회의 공동 책임임을, 그리하여 개인의 노력 못지않게 제도적 노력을 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점이다. 최초 3- 스님은 3살까지의 엄마 돌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 유급휴가제가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부처님은 수행 차원에서 (개인에게) 내려놓을 것을 가르치고, 다른 한쪽으로는 살기 좋은 세상, 즉 정토를 건설하라고 하셨다.’ 고 주장한다. 정토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지만 현실에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 즉 개인적 수행과 함께 제도적으로 바꿔 나가서 아이들의 보육문제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제도적 개선을 위한 싸움이 외롭지 않도록 아이를 키우는 사람 당사자가 제도 개선을 위해 싸우면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고, 분노가 있으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없다. 그러므로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나 앞으로 키울 사람들이 싸워줘야 한다.’라는 주장도 고맙게 들린다. 아기엄마들뿐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 아이들이 자라는 이 세상에 힘을 보태야 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책의 독자인 엄마들에게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자녀문제를 해결하라고 조언할 때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아이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해주어도 부모가 화목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말엔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공손하기를 원하면 아내가 남편한테 공손하면 된다는 말에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엄마들은 말을 줄이고 남편이 뭐라고 하면 알겠다고 대답하라. 남편이 벌컥 화를 내고 비이성적으로 폭발한다면, 아내가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잔소리하며 따지든지, 대답을 안 하고 외면하든지...’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부부가 갈등을 느끼면 모두 아내 잘못이라는 의미인가? 누구나 갈등상황에서는 남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가 옳을 것이다. 그것은 아내뿐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뭐든지 엄마탓? 아빠는?

엄마의 존재가 중요하고 비중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엄마가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엄마 을 하는 것은 다르다. 이 책에 많은 미덕이 있지만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 많다. 심지어 나는 상담실에서 학부모용으로 산 이 책을 아무에게도 읽히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했다. 인터넷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찾아 봤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는지. 호평 일색인 이 책, 많은 엄마들은 읽고 자녀교육의 지표로 삼았을까? 남편에게 소리 지르는 아내는 자녀교육을 망친다는 구시대적 발상에 대해 비판 한 마디 없이 부모교육서로 권위를 인정받는 책이 되어 있다니.

부부가 갈등을 느끼면 아이들이 힘들어하고 비뚤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해서라도 부부의 갈등은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부부갈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원인을 성찰해야 할 사람 중에 아빠의 몫에 대해서 누군가가 이야기해 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당신이 돈 벌어온다고 자녀교육은 아내 몫으로만 돌리고 아이에게는 무관심하지 않았느냐고, 아이와 대화를 나누려 노력하기보다 하지 말아야 할 때는 허용을, 정작 훈육이 필요할 때는 방관을 하진 않았느냐고, 아내가 양육 문제를 의논하려고 다가오거나 자녀가 심리적 어려움을 하소연하려 문을 두드리면 귀찮다고 등 돌리지는 않았느냐고, 양육과 가사에 힘겨웠던 아내가 몸이 아프다고 피곤하다고, 혼자 힘들다고 짜증이라도 낼라치면 소리를 지르면서 윽박지르지는 않았느냐고, 힘든 가사노동을 당연히 아내의 몫으로만 치부하지는 않았느냐고, 심지어 맞벌이를 하는 아내에게도 돈벌이도, 가사도 양육도 모두 당연히 해내며 다정하고 지혜롭기까지 요구하지는 않았느냐고, 왜 우리 집사람은 누구처럼 음식도 맛있게 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남편에게도 상냥한 그런 사람은 아닌 거냐고 따지는 건 너무 욕심이 많은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아이들을 잘 키우려면 남편인 당신이 잘해야 한다고, 아내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고, 아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밥을 해먹이고 공부를 돌봐주고 같이 서점에 가고 운동장에 나가야 한다고, 아빠들에게 누가 그렇게 좀 말해주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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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게 길을 묻다 - 트라우마를 넘어선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찾아서
고혜경 지음, 광주트라우마센터 기획 / 나무연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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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나 세월호는 마음에 새겨진 문신 같다. 책에서만 배운 4.19와는 또 다른 아픈 기억이다. 나는 중학교 때 소위 유언비어로 광주를 만났고 대학 1학년 때 사진전으로 광주를 만났다. 간접적인 경험이었지만 그 아픔은 역사적 유전자에 새겨져 버렸다. 아마도 세월호 사건과 더불어 죽을 때까지 이 각인을, 이 낙인을 풀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직접 겪은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 책은 직접 광주를 겪은 사람들의 꿈 분석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융의 꿈 분석심리학에 바탕을 둔 치료의식이자 사회적 기록이기도 하다.

 

고혜경은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베트남 참전용사라 써 붙인 노숙자가 없는 이유를 한국의 가족주의가 전쟁의 상흔을 가족 안에서 치유시켰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사회적으로 참전용사가 반사회적으로 인식된 미국과, 박정희 군부정권에 의해 칭송받았던 한국 사회의 차이도 있을 것 같다. 사회적 사고는 사회적 트라우마로 남지만 어떤 사회문화 속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현명하게 극복할 수도, 오히려 더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월남전 참전의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니겠지만)

 

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리 상태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래서 내 꿈을 되새겨 보는 일도, 남의 꿈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남의 꿈을 듣는다는 것은 가슴으로 듣는 것이어야 한단다. ‘내 꿈이라면’, ‘내가 상상해 본다면이런 마음으로 듣는다. 꿈을 해석해 주려거나 조언하려 들지 말라고 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대목 중이 이런 것이 있었다. 광주의 트라우마를 가진 내담자 중에는 꿈에 귀신을 자주 보는 이가 있었다. 심리학적으로 꿈에 나타나는 귀신은 내 안의 어떤 에너지, 한의 응어리 같은 것이라고 한다. 고혜경은 꿈 속 귀신에게 말을 걸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라 한다. 그러면 두려움이 순화된다고. 나는 귀신을 자주 보진 않지만 나쁜 남자에게 쫓기는 꿈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린아이를 자주 보곤 하는데 이 대목을 읽은 후 그들을 두려워하기보다 그들은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새벽마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을 곱새기는 시간을 꼭 갖는다. 그때마다 그들의 정체는 내 안의 무엇이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것이 공포든 불안이든 죄의식이든, 나의 것이기 때문에 모두 안쓰러운 것들이다.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 보인다. 어떤 것은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짊어지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그러니 꿈에 등장하는 무서운 존재들을 쫓아낼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광주를 겪은 이들, 세월호를 겪은 이들 앞에 나의 그림자는 새발의 피일 뿐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지난일로 치부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광주의 묻힌 이야기들을 들춰 다 들어줘야 한다.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이들은 지금에라도 감옥에 가야 한다.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의 억울함은 이미 이생에서 도저히 풀 수 없는 것일지 모르더라도, 적어도 그 시신을 찾아 해원하고 그 원혼에게 세상의 미안함을 충분히 보이는 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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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정반대의 행복 - 너를 만나 시작된 어쿠스틱 라이프
난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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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의 어쿠스틱 라이프를 너무너무(너무는 부정적 부사라고 하지만 매우, 정말, 진짜, 그 무엇보다도 이 부사가 가장 적절할 때가 있다) 좋아한다. 만화를 보는 내내 꽉 차게 행복했다. 아껴 읽었다.

 

그래서 난다의 다른 작품을 찾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아이들이 다 커버려 내게 실용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육아일기지만 이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유모차 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장애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목숨 걸고 고속버스에 탑승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싸우고 소리 높이는지. 나의 이동이 제한되기 시작하면서 간신히 이해하게 된 내 좁은 시야가 창피했다.

 

아이를 키우며 아이의 그럴 수밖에 없는특성을 알게 된 뒤에야 다른 약한 존재에게도 관대해졌다.

 

그렇다, 엄마가 된다는 일이 공로를 인정받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사람을 잘 키워내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 그리고 나 자신. 아기를 키우면서 인간으로 내가 성숙해가는 경험을 한다. 수많은 인내해야 할 일들을 겪으면서, 한없이 약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지면서 말이다. 나는 그 경험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연약한 존재들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가 누군가의 엄마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엄마가 되지 않은 사람은 그런 공감을 못하느냐고? 물론 아이를 간절히 원하고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엄마를 경험하는 일의 의미 깊고 신비로움을 논하는 것은 잔인한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엄마를 선택하고 스스로 기꺼이 그 어려움을 감당한 사람이 그 정도의 보람을 얻는 것이 그리 불공평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난다도 역시 아기를 통해 그런 시선의 확장을 경험한 것이다. 약자에 대한 공감, 장애인에 대한 공감, 어린 아이들의 말을 인내하고 들어줄 수 있는 어른스러움을 갖게 된다. 나는 그 대목이 가장 좋았다. 육아를 통한 엄마의 성숙, 육아의 고단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귀한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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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와요, 북유럽살롱 - 북유럽 사람들이 오늘도 행복한 이유, 궁금해요?
정민혜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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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여행을 가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들을 보고 있었다. 스웨덴 하지 축제 미드솜마리도 궁금하고 내가 좋아하는 달라하스트(말 목각인형)과 화관도 좋았지만 이 책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북유럽의 육아법이라는 얀테의 법칙이다. 아이들에게 저런 품성을 기르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배려와 존중의 교육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고슴도치들처럼 안에는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나만 최고인 양, 남을 공격할 무기로 온 몸을 두르고 사는(원래 내면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일수록 공격적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1.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2. 네가 다른 사람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3.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4.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자만하지 말라

5. 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6. 네가 다른 이들보다 더 중요할 거라 생각하지 말라

7. 네가 뭐든지 잘 할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

8.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라

9. 다른 사람이 너를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10.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

 

 

스웨덴의 음식물 쓰레기는 바이오가스로 재활용된다고 한다. 체온, 커피의 온기, 기차의 열기 등도 모두 에너지로 환원해 쓴단다. 생각할 게 많은 대목이다.

스웨덴에서는 부부에게 아이 한 명당 480일의 휴가를 주고 이중 390일 동안은 월 수입의 80%, 나머지 90일은 매월 30만원 정도 지급한단다. 1995년에는 아빠의 달을 만들어 아빠도 한달 이상 육아휴직을 쓰면 총 육아휴직 기간이 한 달 늘어난다. 남성 육아 60일은 의무사용 기간이다. 우리나라에도 아빠에게도 육아휴직을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하는 제도들이 들어와야 할 것이다. 육아의 부담을 나누는 것뿐 아니라 남녀의 평등한 육아부담을 위해서도 꼭 필요할 것이다.

 

북유럽이 지상낙원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유럽이 궁금하고 부러울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가서 살고 싶은가?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을 거닐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반나절 이상, 저 돌 건물에서 1년을, 혹은 평생을 살 수 있겠는가, 하고.

그저 피안의 세계일 때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K팝 때문에 한국을 동경하는 서구인 이야기를 들을 때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지옥이고 현실인데 그곳을 환상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나의 환상은 또 다른 지옥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그 부러움에서 배울 점을 찾아본다면 감성과 영혼은 하늘을 날지라도 내 발은 땅을 디디리라. 북유럽은 분명 제 3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이 따라 하려 들면 귤이 탱자가 되겠지만 분명 우리에게 맞는 다른 모델로의 전용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자전거를 타고 쓰레기를 줄이고 육아를 세계가 함께 책임지는, 매뉴얼과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지만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그런 세상. 많은 세금을 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공정하게 집행되는 복지, 그로 인해 누구나 인간적인 존엄을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이제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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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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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7년 나의 올해의 책이다. 리베카 솔릿의 문장에 매료되었다. 정희진의 매력과 어딘가 닮았다. 정희진이 리베카 솔릿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 두 사람은 문체가 전혀 다르(정희진이 좀더 뾰족하다)지만 문제의식에 더해진 감수성, 자기만의 독특한 표현의 세계가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둘이 만난다면 서로를 경애할 것 같다.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의도해서라기보다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갖다 보니,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회의 부조리함에 눈 돌리다 보니, 도대체 이 불평등하고 평화롭지 못한 세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분노하다보니 자연스레 거기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문장아름다운 글들이 주는 허망함을 잘 안다. 정말 좋은 글은 꽉 찬 느낌이 든다. 진정성으로. 진정성, 그게 뭐냐고?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고?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냥 그건 느껴지는 것인데, 아마도 그걸 느낀 사람들이 많다면 그 글은 확장되고 움직여 세상을 바꿀 것이다. 리베카 솔릿의 글에는 그런 게 있다.

 

그런 것을 떠나서도 그의 문장은 참 정연하고 아름답다. 오죽하면 내가 이 책의 영어본을 샀을까.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대개 영어가 고향이 아닌 경우가 많다. 다시 원어로 읽고 싶어도 불어가 약해 <어린왕자>, 독어를 전혀 몰라 <데미안>, 스페인어 때문에 <바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없거나 영어로 중역된 것을 보면서 찜찜해 해야 했는데 이 책을 만나서 참 좋았다. 정말 좋은 글을 만났는데 떠듬떠듬이라도 읽을 수 있는 외국어로 쓰인 글이니. 원어민은 영어로 도대체 뭐라고 썼는지, 과연 번역된 책만큼 원어도 아름다운지 확인할 수 있으니.

 

물론 책 한권을 통째로 읽기엔 분량이 너무 많다. 이 책은 참으로 정직하게도 가벼운 재생지에 아주 빽빽한 내용이 담겨있다. 요즘 나오는 책들로 따지면 2,3권 분량 정도 된다. 읽는데 오래 걸리지만 마치 고전을 읽을 때처럼 한 권을 다 읽었다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게 꽉 찬 책이다. 그런 책을 영어도 약한 내가 무슨 수로 한 권을 다 읽으랴? 나는 그저 좋았던 문장이 뭐라고 쓰여 있는지 찾아 읽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밤마다 한 페이지 혹은 반 페이지 정도, 영어 사전 찾을 것도 없이 그저 읽고, 해석이 막히면 그냥 한국어판으로도 또 읽고 그런다. 좋다. 문학적으로도 좋다. 공부라서도 좋고 그냥 글 자체가 주는 재미만으로도 좋다.

 

그의 글이 힘을 갖는 것은 사유한 만큼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온 그의 삶 덕분이다. 그 역시 여성 혼자 험한 길을 걷는 일에 두려움을 가졌음을 솔직히 고백하지만, 그래서 밤길, 혼자 걷는 길을 포기한 나 같은 사람 대신 그는 늘 길을 걸어다녔다. 그는 걷는 일이 단지 산책을 즐기는일이 아니라 길은 모두의 것이라는 명제(자연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라는 명제와 닮았다. 어딘가 아나키하기도 하고 매우 사회주의적인 발언이기도 하다)를 몸으로 실천하는 일임을 말한다. 광장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 걷는 것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많은 일이 있음을 온몸으로 선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녀서 거리에 나간다는 일은 격렬한 투쟁과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라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일인 줄로만 아는 우리 세대에게 미국이나 유럽의 피켓시위는 가소로워보였었다. 저런 것도 투쟁이라 할 수 있겠나 싶어서. 그러나 그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만나고 배운다는 것을 이제 나도 조금씩 깨닫는다. 지난 겨울 수백만 사람들과 함께 했던 광화문 광장의 촛불, 엄마를 뺀 우리 집 식구들 모두, 어린 조카까지 다같이 함께 했던 그 겨울광장의 걷기의 경험은 작은 발걸음이나 즐거운 도보로도 어떻게 연대가 가능한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지 않았는가. 리베카 솔릿은 정신차리라고 야단치지도, 평화를 깨는 자들에게 힐난을 던지지도 않는다. 함께 걷자고 하는 말 무미건조하게 던지지도 않는다. 스스로 걸어본 자, 스스로 핵실험장 사막에 누워본 자로서의 경험과 진정성으로 조근조근 권유한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문체로.

 

 

1980년에 반핵 활동가가 된 나는 봄이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네바다 핵실험장에 갔다. 면적이 로드아일랜드 정도 되는, 네바다 남부의 미국에너지부 소유 부지에서 미국은 1951년부터 지금까지 1000개 이상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핵무기가 캠페인, 출판활동, 로비 활동으로 막아내야 하는 단순한 숫자(예산 액수, 폐기물 처리 비용, 잠재적 사상자 규모)로 보일 때가 있었다. 군비경쟁과 저항 둘 다 관료주의적 추상성으로 흐르면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란 살아 있는 몸이 부서지고, 살아가는 곳이 망가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핵실험장에서는 달랐다. 아름다운 사막을 배경으로 대량 학살 무기들이 계속 폭발하는 봄이 오면, 우리는 한두 주씩 근처에 가서 야영을 했다. 우리는 추상적 숫자를 뚫고 나온 사람들 이었다. 추상적 숫자 너머에 장소와 품격과 행동과 감각의 현실이 있었다. 수갑과 불편과 먼지와 더위와 갈증과 방사능 위험과 방사능 희생자 증언도 현실이었지만, 눈부신 사막의 빛도 현실이었고, 탁 트인 지평의 자유로움도 현실이었고, 핵폭탄으로 세계사를 쓰면 안 된다는 우리의 믿음을 공유하는 수천 명이 운집한 감동적인 장면도 현실이었다. 우리 몸이 우리 신념의 증거가 되었고 사막의 격한 아름다움의 증거가 되었고 가까이에서 세계 종말을 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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