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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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누군가는 주석 읽기가 힘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사실 주석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역자가 주석을 달면서 고생을 했겠다 싶다. 누군가는 처음 보르헤스의 글을 읽으면서 팩트에 해당하는 부분을 검증하느라 애를 먹었을 것인데 그 애먹음이 거의 연구자의 고생에 맞먹을 것이다.

 

나는 합리적인 이해에 연연하지 않고 독서의 즐거움을 누렸다. 잘 모르는 (허구의 공간이 뒤섞인) 세계의 등장, 시공을 초월한 듯한 신비로운 인물들, 팩트와 픽션이 섞인 이야기들이 더 신비롭게 느껴졌고 보르헤스 특유의 문체(와 번역체까지 뒤엉켜) 더 아름다웠다고나 할까.

 

여기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발동하지만 그 스케일은 때로 시공을 뛰어넘는다. 남미와 유럽, 아일랜드와 중국을 넘나들고 사후세계와 우주를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바벨의 도서관>을 읽으면서 우주에서 울리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음악을 느끼는 나라는 사람 역시 실제로는 겪을 수 없는 과거와 온 우주를 감각으로, 초감각으로 느낀다는 것인데...

 

보르헤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페이크 기법(마치 정말 있었던 사건인 양, 정말 있었던 작품인 양, 사람인 양, 극사실적 요소들을 부여할 뿐 아니라 실제의 사실과 적절히 섞는다)을 그저 치기어린 재치로 넘길 수 없는 것은 보르헤스의 박학다식함과 아름답고 장중한 문체 덕이다. 나에게는 사실상 이 작품이 첫 보르헤스이다. 그 전에 <말하는 보르헤스>라는 강연록을 읽었지만(그 책을 통해 본격적으로 보르헤스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소설로는 이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왜 사람들이 보르헤스를 자꾸 언급하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많은 문학작품들이 있다. 어딘가 닮은 듯하지만 어느 것도 닮지 않은 세상 많은 이야기들. 그런 신비롭고 아름답고 치열하고 정교한 많은 이야기들 중에 보르헤스는 가장 복잡하고 신비롭다

 

얼굴에 반달모양의 칼자국 흉터를 가진 아일랜드의 사내 이야기는 읽으며 소름끼치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자신을 타자화하는 시점(이런 시도가 다른 작가에게 없는 것은 아니나), 3차원적인 접근이 5차원으로 바뀌는 기법이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 문단에 설명을 덧붙인 것이 사족같이 느껴진다. 독자들은 이미 마지막 문장에서 다 알아챘을 것인데)

 

보르헤스를 잘 읽으려면 남미문화와 서구 문학에 대한 많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애초에 나는 그런 데 연연하지 않고 그냥 그 분위기만으로도 독서를 즐겼다. 때에 따라서는 주석을 따르고 합리성에 의문을 갖고 지적으로 하나씩 짚어나가면서, 때에 따라서는(대개의 경우가 여기 해당된다) 그냥 이해가 되거나 말거나 그 몽환적인 분위기 자체를 즐기면서, 그렇게. 책이 1/3쯤 남았을 때 나는 덜컥 몸살이 났다. 아주 오랜만에 이틀 내내 침대에 누워있었고 돌아눕는 것조차 힘들게 앓았다. 아프니까 당연히 집중해서 독서를 하기 힘들었다. 그저 몸살일 뿐이었지만 늘 그렇듯이 몸이 아프면 별 생각이 다 난다.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서 그러하듯이 죽음과 삶의 경계, 시간과 삶의 경계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독서를 했다. 뒤척거리면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다가 <픽션들>을 보다가, 두 책이 섞이면서 까무룩 잠이 들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시선이 아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나 보다, 라고. 신이 세상을 굽어보듯, 우주적 관점으로, 심지어 시공을 넘나드는 그런 시선으로.. 그런 이들을 천재라고 부를 터인데, 그런 천재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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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려나 서점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고향옥 옮김 / 온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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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즐겨 읽는 책의 분야가 다르다. 우리의 공통분모인 교육관련 서적과 시집은 똑같은 책이 두 권 생기는 일도 있지만 내가 산 책을 그는 읽지 않고 그가 산 책은 내가 읽지 않는, 그래서 효율성 떨어지게 책장만 많이 차지하곤 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점점 많아지는 책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요즘은 열심히 책장 덜어내기를 하는 중이다.

하지만 내가 꼭 구입하고 보관하려 애쓰는 책들이 있다. 그림 그리기 책, 자수나 뜨개질 책, 집 사진이 들어가 있는 책, 강아지 그림이나 사진이 있는 책... 언젠가 자수를 놓고 무민 인형을 만들고 시골집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리라. 여행을 가서 예쁜 집들을 그리리라. 당장은 아니어도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 솜씨가 늘 것만 같고 자수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행복해진다.

요시타케 신스케의 <있으려나 서점>도 오래오래 가지고 있고 싶어서 샀다. 그림도, 책 이야기도, 상상력도, 그 발랄함도 모두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부터 해보련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을 것만 같은데, 어느 날 밤 잠자리에서 책을 읽다말고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서 죽을 날이 가까워온다고 생각하면 다 못 읽은 책들이 아까워서 죽기 싫을 것 같아.”

천국이 있으면 아마도 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는 보르헤스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나에게 남편은 만약 어느 곳에 도서관과 식당밖에 없어. 딱 한 곳만 선택해야 하면 도서관 갈 거야?” 당연하지! 라고 대답하는 나에게 밥을 굶으면 죽을 텐데? 하고 남편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죽어가면서 앞으로도 재미난 책이 많이 나올 텐데, 아직 다 못 읽은 고전도 많은데, 아쉽군.’ 이렇게 생각할 나 같은 사람이라면 요시타케 신스케 무덤 속 책장과 같은 방식의 추모방식이 있다면 그나마 마음을 놓고 눈을 감을지도 모르겠다.

방법은 이렇다.

 

1년에 한 번 찾아가는 무덤에는 그가 생전 아끼던 책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추모하러 간 사람은 그 중 한 권을 골라 가방에 넣고 천국에서 그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그 해의 추천도서한 권을 가져와 무덤 책장에 꽂아둔다, 문을 닫고 기도하고, ‘가방 안에 든 책을 읽을 생각에 설레며 집으로 간다...

 

죽기 전 자기 무덤책장에 놓기로 하여 고르고 고른 책들이라면 분명 엄청 아끼는 책들일 것이다. 그렇게 엄선되어 무덤책장에 놓은 책을 한 권씩 살펴보는 추모하는 이의 마음은 어떨까. 그와 책 취향이 비슷하지 않더라도 이 분은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읽었을까? 죽기 전에 이 책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며 책을 살피지 않을까.

제자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책을 자주 사는데 건네주기 전에 미리, 다시 한 번 그 책을 흝어 보곤 한다. 나에게 사무치던 <데미안>이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소년에게는 어떻게 읽힐지, 사랑에 빠진 아이에게 정호승의 <연인>은 어떻게 읽힐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책을 다시 읽는 것이다. 내 아이에게 책을 건넬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춘기를 관통하는 딸과 아들에게 책을 권할 때마다 그 아이가 된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 책은 전혀 다르게 읽히곤 했다.

그러니 죽은 이를 추모하며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이겠지. 살아 있을 때, 온 몸으로 삶을 누릴 때, 아이를 막 낳았을 때, 30대였을 때, 좌절했을 때, 직장을 은퇴했을 때,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마다 읽었던 책들을 의 마음으로 읽는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이 있는 추모가 되겠지.

 

무엇보다 좋았던 장면은 올해의 신간 중 한 권을 그 책 대신 놓아두고 온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 사람을 기억하는 한 그는 영원히 천국에서도 신간을 읽을 수 있겠다. 물론 유명한 사람이면 그 기간이 더욱 길어질 것이고(노회찬 의원이나 황현산 선생 같은 이의 무덤책장에서 책을 얻고 또 하나의 책을 놓아둘 수 있다면 참 오래오래 좋을 것만 같다.), 우리처럼 평범하여 한두 세대면 잊혀질 사람이라도 적어도 수십 년은 신간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있으려나 서점> 은 참 귀여운 책이다. 책 좋아하는 이들의 마음 속을 다 들여다본다.

사랑스러운 도서관 3에 보면 도서관을 “‘도서관에 갔다 왔어누군가에게 그렇게 은근슬쩍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명한다. 그래, 서점이나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마음이 좀 있다. 물론 누구나 자기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것, 그곳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야구장에 다녀오고 연주회에 다녀오고 산을 오르고 나서 나 어디 갔다 왔어, 라고 말하는 마음도 비슷하겠지. 그래도 하여간 서점이나 도서관을 즐겨 다녀오는 사람이라면 자랑하지 않는 듯(?)하면서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 책 좋아하는 사람이야, 이게 자랑스럽다는 말이다.

 

서점이란 어떤 곳? 이라는 꼭지에도 장차 탄생할 명작을 위해 투자하는 곳’, ‘책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책한테 은혜를 갚기 위해 계속 책에 매달리는 곳이라는, 공감할 만한 문구가 있다. 서점에 온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장차 탄생할 명작을 위해 투자하는 곳이란다. ‘장차 탄생할 명작’, 나 역시 학교에서 어린 소년들을 볼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이다. 복도에서 먼지 나게 뛰는 저 소년들이 곧 당당한 청년이 된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가.

그러니 서점에 근무하거나 서점에 자주 가는 이들이라면 거기에서 앙증맞은 손으로 책을 집어드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이 훗날의 명작(비유적으로든 글자 그대로이든 말이다. 책 좋아하던 그 어린아이들 중에 작가가 되고 시인이 되는 아이들이 나올 터이니)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서점에는 책을 읽다가 책을 쓴 사람, 책을 읽다가 책을 만든 사람, 책을 읽다가 서점에 근무하게 된 사람... 들이 복닥거릴 것이다. 우리 모두는 책에게 은혜를 입었고 책 덕분에 더 잘 살게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더 좋은 책을 쓰고 만들고 팔고 나눔으로써 책의 은혜는 순환된다.

 

베스트셀러가 되길 바랐던 책이라는 마지막 꼭지도 재미있었다. 나도 두어 권의 책을 내면서, 처음에는 무언가 기록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점점 우연에 기대어라도 내 책이 더 많은 이에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저자들의 마음을 이 책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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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 - 고서점에서 만난 동화들
곽한영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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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쿠바 여행 중 들렀던 벤쿠버의 뒷골목을 잠시 떠올렸다. 낯선 거리의 고서점을 뒤지고 있었던 저자에게 감정을 이입해 본다. 마치 내가 그 거리를 걷고 있는 것처럼 설레 보고, 마치 내가 원하던 책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해 본다.

곽한영 교수는 영어가 익숙해서 다른 언어로 된 책(예를 들면 케스트너의 책)을 사기는 꺼려졌다고 하지만 영어도 낯선 언어인 내 입장에서는 원서를 비싼 값 치르고라도 사려 했다는 그가 하여간 부러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행복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서점의 추억들이 떠올라서. 열 살 때까지 서점 뒷방에서 삼남매가 뒹굴거리며 컸다. 12시에 문 닫을 때까지 서점은 우리 안방이고 놀이터이기도 했다. 언젠가 돌돌 돌아가는 <딱따구리 문고><동서문고> 서가가 생겼을 땐 그걸 돌리면서 동생들이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매달 25일이면 잡지코너 구석에서 <소년동아>, <어깨동무>, <새소년>을 봤는데 6학년이 되어서는 엄마 몰래 <주부생활> 같은 것도 보고 안 팔리고 남은 잡지를 반품할 땐 부록을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이 책 속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모두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읽은 책들이다. 겨울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서점 닫을 때까지 구석에서 읽던 책들. 내가 읽은 책 중에는 여기엔 등장하지 않지만 <소공녀>, <소공자>도 있었고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것도 있었다. 나중에 커서는 프랑스 문학과 러시아 문학이 더 좋아졌지만 가만 돌아보니 어린 시절에는 영미 문화권 작품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 추억이 새록새록 좋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식민주의 아닌가 싶어 섬뜩해지기도 한다. 유럽 혹은 북미 어딘가 너른 마당의 목가적인 집들, 거기서 뛰노는 허클베리 핀이나 빨간머리 앤, 혹은 작은 아씨들에 대한 연민, 공감, 친근감 같은 것들이 내 핏톨에 흐르고 있는 것일까.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데, 어쩌면 나 어린 시절 나도 모르게 일제 잔재 문화를 친근하게 어린시절 문화로 습득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동생들과 재미있게 보았던 만화영화가 죄다 일본 것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약소국, 문화적 약소국의 반식민상태는 이지적으로 극복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걸까?

문학을 전공했고 어지간한 문학작품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최근 한베평화재단에서 베트남 참회여행을 다녀오느라 베트남 문학작품이며 동화들을 읽고 있는 남편을 옆에서 보면서도 베트남 문학은 읽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의 태도는 도대체 뭘까. 내 의식 속 깊은 곳에 문화적 식민주의와 사대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 학교 사서 선생님은 다른 말씀을 하신다. 동남아시아나 우리나라 문학은 역사적인 경험 탓에 아프고 참혹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그런 이야기들을 외면하게 된 것은 아니겠는가 하고. 그 말씀에 조금은 위로를 받는다. 죄책감을 더는 느낌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주로 서구의 문학에 노출되어 저도 모르게 그것을 친숙하게 느끼는 것은 독자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 독서를 통해 추억을 소환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일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제 교육자로서 우리는 이런 문화적 불균형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는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누린 행복도 감사하지만 아이들에게 어떤 추억의 독서를 안겨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과제를 품게 된 일도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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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체력 -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
이영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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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지 혹은 신문에서 서평인지 광고인지를 보고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책이 오기를 꽤 기다렸던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방에 있는 걸 더 좋아하고 정신적 활동을 더 중시하는 저질체력의 마흔 넘은 여자(나같은)를 운동의 세계로 이끄는평범하지만 놀라운 마법이 이 책에 있을 것만 같은 기대?

그가 첫 책을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에디터로서 갈고 닦은 읽기, 글다듬기의 힘일 수도 있고 그 사람 안에 글과 말을 재미나게 다룰 줄 아는 재능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가 직접 해본 일을 이야기하는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큰 동력이었을 것이다. ‘정말중요하고 정말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이야기할 때의 가뿐 호흡, 신나서 이야기하는 반짝임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지만 나의 기대에 부합하더냐고 물으면 아니, 라고 대답하련다. 운동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강력한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모자란 열정에 불 지펴줄 것만 같은 기대가 있었지만, 미안하지만 그에는 미치지 못했다(적어도 나에게는). ? 저자가 이룬 성취가 너무 높아서 그렇다. 그가 정말 시작부터 평범한 사람이었고, 평범하나 닿을 수 있는 목표치에 올라선 정도였다면 우리도 , 그럼 나도 해볼래!’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누리는 신세계는 무려 트라이애슬릿의 세계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는 아무 것도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던 그런 평범한 아줌마가 아니었다. 이미 부지런함과 열정을 갖추고 있던 사람이었다. 운동뿐 아니라 매사에.

 

운동을 힘겹게 시작하던 과정, 중간에 게으름이나 힘겨움 때문에 실패의 고비를 넘긴 이야기들을 같이 힘겹게 읽어나가면서 나 자신의 무기력이나 게으름에 대해 위안을 받아가며 같이 극복해 보고 싶었던 나는 중반에 접어들기도 전에 금방 철인3종으로 훅 뛰어넘어가는 이야기에 당황한다. 새벽 수영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랑말랑하다가 갑자기, 오늘저녁부터 동네 운동장을 단 한 바퀴라도 돌아볼까 하다말고 갑자기, 턴을 못 하고 다리가 땅에 안 닿아서 운동장 같은 데서 직진만 하던 자전거를 다시 타볼까 하는 생각이 싹틀까말까 하다 갑자기, 그녀는 한강에서 수영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서 실망하다가 뒤로 가면서 저자의 인생역정을 읽다 보니 이 책은 슬슬 나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킨다. 아이도 잘 키우고 직장생활도 잘 했고 제2의 인생도 잘해나가고 있단다. 저자로도 강사로도 잘나가고 있는 이유를 그녀는 아마도 운동 덕분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건강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맥락일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저자와 비슷한 또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책을 읽으면서 난 뭐했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고대 동문들과 자전거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완주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좀 불편했다. 저자는 굳이 자신의 출신학교를 밝힐 생각은 없었겠으나 손미나와의 인연, 자전거 완주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나온 명문대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주변에서 보면 명문대동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열심히 동문 동아리 활동들을 하던데, 그렇게 열심히 모이는 이유가 우정 때문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잘나가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우정을 쌓으면서 서로 이끌어주기도 하는 것,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이 불평등한 세상에 유능한 이들끼리의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는 게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평범한 아줌마들은 이 책을 읽고 힘을 내기보다 자신의 삶을 초라하게 느끼게 될지 모르겠다. 나만 그런 거면 다행이고.

 

그나마 궁시렁거리며 책을 덮는 나에게 남편이 그거 따라하지 말고 나랑 동네학교 운동장 돌러 나가자.’ 해서 토요일 새벽 5, 별을 보며 동네 한 바퀴 걸었던 거, 고맙게 생각한다. 덕분에 따릉이(서울시 자전거)는 안장을 최대한 낮추면 나 같은 키 작은 아줌마도 탈 수 있다는 걸 새벽 길거리에서 몰래 확인했다는 거, 고맙게 생각한다.

 

부러움에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지금 한창 육아 전쟁에 허덕이는 젊은 아기엄마들, 혹은 3,40대에 접어들었지만 이제 내가 슬슬 늙는 게 아닐까 불안해 지기 시작하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그녀들에게 이영미는 좋은 모범이 되고 희망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저 언니보다 젊은 나, 지금부터 시작해도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나로 하여금 책을 덮자마자 자전거를 꺼내들게 해달란 말이야, 하고 요구하는 것은 나의 칭얼거림에 불과하고 내가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책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의지박약용기부족의 문제일 뿐임을 나는 잘 안다. 이영미의 책 곳곳에 숨어 있는 유용한 팁들만 해도 충분히 감사할 만하다(운동을 처음 시작하는 이라면 비싼 운동화 사서 책상위에 올려놓기, 운동한다고 소문내기, 운동장 한 바퀴부터 시작하기 등을 권한다거나, 프랭크처럼 집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운동도 소개한다거나). 그리고 분명 많은 이들이 이 책 때문에, 이 책 덕분에 몸매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인생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을 게 분명하다고 본다.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머리말의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끝난다.

 

그렇게 내 삶에 일어난 작은 균열은, 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회 날에 시작되었다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하는 소설적 발화 방식, 재미있지 않은가? 이와 비슷하게 어쩌구저쩌구..... 그 이야기는 3장에서. 이런 식으로 끝내는 부분을 보면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는 이 사람, 기질적으로 꽤 재미있는 이야기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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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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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예견된 불행을 짚어가며 읽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아무래도 책 읽는 순서가 잘못되었나 보다. 목로주점을 먼저 읽고 나서 <제르미날>을 읽을 것을.... 제르미날의 주인공 에티엔은 바로 이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제르베제의 아들이다. <제르미날>에서 이미 에티엔 가족의 비극을 엿들었지 않았는가. 그러니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 속 제르베제가 아름답고 배부르고 따뜻하고 행복해 보여도 그것이 곧 무너질 것임을 알고 있는 마음은....

 

그토록 깔끔하고 성실하고 진지하던 제르베제는 왜 불행해져야 했을까

 

지금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프랑스의 현실로부터 2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시에는 빈민이 광산에는 굶주리는 광부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으로 근근이 사는 사람들 중 우연히 불행을 만나지 않는 사람들은 겨우겨욱 포도주나 커피 정도를 누리고 살았지만 갑작스레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몰랐다. 특히 여자들은 남자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폭풍을 맞는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얼마나 싸웠단 말인가. 그러니 그들의 민주주의는 그토록 견고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허술한 복지 시스템을 가졌더라도 스스로 자책할 일은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왕과 왕비를 단두대에 세운 역사를 몹시도 자랑스러워한다는데 우린 그런 경험도 거의 없지 않은가.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이다.

 

200년 전인데, 그런데 거기서 우리의 삶이 엿보인다면 그것은 또 어떤 비참인가. 연금을 받지 않으면 노동으로 근근이 살아야 하는 현실, 누군가 갑자기 아프거나 했을 때 일어나는 가정의 붕괴 혹은 해체, 출산과 노동과 남자의 폭력 앞에 무력한 여자의 운명. 이런 부당한 일들은 지금도 일어난다. 고전의 힘은 그런 것일 터이다.

결과를 알고 보았다고는 해도 제르베제가 한참 잘 나갈 때,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먹고 즐길 때의 장면은 흐믓했다. 그런 아름다운 삶이 무너진 것은 개인의 허영 탓일까 운명 때문일까 제도적 모순 때문일까. 과거도, 지금도 비극은 항상 복합적이다. 좋은 교육으로 삶의 바른 자세를 가르칠 수도 있고 심지어 제도적 모순조차 혁명의 힘을 빌어 고칠 수도 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건가?

 

 에밀 졸라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과 혁명의 정당성을 담기 위해 이 소설을 써나갔겠지만 그 안에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운명을 담는다. 멋진 소설은 불가한 거대한 우주의 질서, 사회의 벽, 그 앞에 한없이 초라한, 그리고 한없이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왜 그것이 멋진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루고 싶은 이상이기도 한 까닭이다. 현실과 이상은 고기와 가죽처럼 떼어내기가 어렵다. 함께 있을 때 더 아름답다. 그래야 살아있다. 문학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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