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다를 보러 간다 - 북경이야기 1, 전학년문고 3015 베틀북 리딩클럽 17
린하이윈 지음, 관웨이싱 그림, 방철환 옮김 / 베틀북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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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책은 쉬워야 한다? 그래서 그림이 단순해도 좀 부족해도 된다? 아이들은 어렵고 복잡한 문학적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니 현실적이고 간단한 문장으로 써야한다? 너무 깊은 인생의 의미는 말해줘봐야 이해 못한다?

그런 오해 속에서 우리에게 어린이 책들은 대개가 유치하다. 유아나 저학년에서는 그래도 이쁘고 재미난 책들이 꽤 있어도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수준의 책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 대개는 정말로 아직은 이해도 되지 않을 세계명작 다이제스트 들이 초등학교 고학년들에게 억지로 읽혀지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라. 삽화 하나하나가 작품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뛰어나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진정한 성장기 소설이라 할만큼 어른들의 이야기를 모르는 채 시치미 떼지도 않고 순진한 척 하지도 않으면서 어린이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문장은 또 얼마나 시적인가. 책의 제목부터가 그랬다.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간다' '바다' 소리만 나와도 가슴이 설레이는 내가 이 문장이 가지고 있는 설레임을 놓칠 리 없다. 정작 바다를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지의 바다, 그것을 보러 가리라는 의지와 설레임, 그것은 어린 날 먼 어떤 곳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이고 희망이지 않는가. 조금 달뜬 목소리로, 10대 초반기에 세상에 대해 우리도 그렇게 속삭였다.

잉쯔는 어린아이 답게 어리숙한 면도 있지만 때때로 영악하고 벌써 세상으로 발 내딛기 시작할 때라 부모에 대해 조금 심드렁하기도 하고 또 어린애다운 이기심도 있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스한 동정심과 분노도 가지고 있다. 이맘 때 어린 아이란 그런 것이다. 착하기만, 어리석기만, 욕심장이이기만 한 아이는 없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복함적인 성향과 지향을 어른들은 벌써 잊었다. 그걸 잊어버리지 않아야 린하이윈 같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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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초등 저학년을 위한 책동무 1
권정생 지음, 박경진 그림 / 우리교육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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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어진 바지를 기워입으면 밤하늘의 별이 더 맑고 환하게 빛난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그토록 많은 옷들을 만들어내는 걸까. 어렵지 않게 옷을 사입고 얼마 입지 않고 새로운 옷을 또 산다. 낡거나 터졌다고 기워입으려 들지 않는다. 옷은 곧 그 사람의 품위를 나타내기에 헐한 옷을 입는 것은 라면으로 점심을 먹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게 지금의 세태이다. 나 역시 앞발가락 나달나달해진 양말은 아이발에서 획 빼앗아 더 이상 신지 말라 한다. 왜, 부끄러우니까.

도대체 뭐가 부끄러운가. 낡은 옷을 입는 것이? 쓸데없이 내 작은 한 몸에 버거울 만큼 많은 옷들과 차들과 신발들, 누릴 물건들에 싸여 나 자신 점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가며 내 눈에 비칠 별빛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 더더욱 부끄러운 일 아닌가.

그동화 속의 또야너구리는 이쁘게도, 자신의 기운 바지가 시냇물을 더 맑게 하고 거기에 물고기들을 더 많이 살게 해준다는 엄마 말에 금방 설득된다. 또야의 유치원 친구들도 선생님 말씀을 듣고는 금세 자기들도 기운 옷들을 입겠노라고 마음을 모은다. 동화 속 아기 너구리들의 표정이 너무 이쁘다. 그렇게 빨리 엄마의, 선생님의 마음과 말을 이해해 주어서 더더욱 이쁘다. 동화 속 그림만큼이나 이쁘다.

그러나 그것은 동화일 뿐, 돌아와 어디에도 옷 기워입힐 엄마도, 기꺼이 기운 옷을 입을 아기도 없음이여, 다시 더는 빛나지 않을 별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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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6-12-1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엄마가 조그만 전구를 양말속에 넣고 깁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 양말이 참 창피하다고 여긴적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철이 없었던거 맞겠지요?
풀꽃선생님.... 감기 조심하세요..
 
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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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적인 모험과 실험을 다 극복해 내고 자신의 이론에 살을 붙여 살아있는 것으로 일으켜 세우는 '학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혹은 그런 노고를 부렸다 하더라도 교묘한 지배논리나 이념에 악용되어 결국 숭고한 노고를 독재자의 아전인수에 놀아나게 한 수많은 학자들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 레비스트로스처럼 흔들리지 않는 냉철하고 바른 시선을 입증하기 위해 고생과 모험을 마다하지 않은 학자의 존재는 참으로 귀하기 짝이 없다.

'어린왕자'에 나오던가, 남들이 탐험을 하고 돌아와서 주는 자료들로 지도를 만드는 지리학자였던가, 그 동화의 비아냥이 참 재미있게는 생각되었어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실제로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탁상공론을 펼치는지, 그 폐해가 어떤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다. 단순히 다리품을 파는 정도가 아니라 기아와 더위와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브라질 열대림을 원주민들과 함께 헤치고 돌아다녀야 하는 고생이야 말로 다하랴.

레비스트로스의 모험과 실천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떤 부족 사람들이 누에만한 애벌레를 주식으로 삼는다 하기에 그 살아있는 애벌레를 먹어본다. 때로는 정말 식량이 없어서도 그랬고 때로는 그들이 왜 그런 것들을 먹고 사는지 이해하고 알아야 하는 차원에서도 원주민들이 먹는 음식들을 같이 먹곤 했단다. 그 애벌레의 몸통 가운데를 분질러 노랗게 흘러나오는 즙을 먹어보니 무슨 치즈맛 같은 게 난다고 담담히 서술한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의 글은 그의 발품이 열정적이었던데 비해 조금은 건조하고 냉철하다. 그래서 더욱 신뢰를 주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문화상대주의적 시각의 장을 연 사람으로 레비스트로스를 많이 언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개'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명인, 아니 서양인의 입장에서 '문명'이라 부르든 '미개'라 부르든 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에는 어떠한 형태이든 '문화'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다가가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쓸데없는 우월의식도, 특히 지배나 정복의 욕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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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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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화재를 예찬하는 글들은 많았다. 어렸을 때에는 거기에 많이 속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글을 가슴 벅차하며 읽고,(읽는 순간 내가 꽤 괜찮은 민족의 후손이라는 착각에 기뻐하면서) 읽고 난 후 밀려드는 허무감이 더 무거웠다. 과거에 그토록 괜찮았던 문화민족이 지금 이렇게 조악한 건축물, 지저분한 거리, 자부심이라곤 느낄 데가 없는 사람들의 감수성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언지. 현실이 그렇지 못한데 우리가 대단한 문화재를 지녔다고 큰 소리치는 일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우리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지, 그런 허세좋은 글 썼던 이들은 고개 숙여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최순우 선생의 글을 읽으며(이분뿐은 아니다. 이전의 나의 안목으로는 보이지 않던, 좋은 글들을 요즘은 많이 만난다.) 과거에는 가졌으나 지금은 없는 무엇으로서의 문화재가 아닌, 발 하나 내디디면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지금도 살아있고 계속 만들어질 것이며 훗날도 그러할 그야말로 '문화'로서의 '문화재'들을 마음 풍성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안목이다. 허세부리지 않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 읽을 수 있는 눈, 그것이 최순우 선생이 가진 혜안이었고 그것을 잘 모르는 사람도 깨닫게 하는 고졸한 문장력이 그의 능력이었으며 그분 덕에 덩달아 눈뜨고 찾아 읽고 보게 되는 것은 나같은 사람의 행운인 것이다.

부석사에 가서 아무런 칠도 해놓지 않은 그 기둥을 살며시 안아보고 돌아와서 나는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는 말에 정말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지세 생긴 대로 층단을 지으면서 언덕을 기어 넘게 마련이어서 산이나 언덕을 뭉개기 좋아하는 요새 사람들의 생리와는 크게 마음이 다르다.'하는 것은 굳이 경복궁 담장을 따라 가 보지 않아도 이름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의 자그마한 절터나 돌탑 주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한국인이 자연이 가지고 있는 모습에서 어그러지지 않고 건축물을 만드는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내 살던 삼척의 죽서루로 예를 들 땐 한참 전에 본, 바위 지면을 살려 세웠기에 네 기둥의 길이가 다 다르다는 그 누각의 미덕을 다시 떠올리기도 했다.

가령, 어떠한 건축양식이라거나 연대가 어찌되었다거나 어떤 종교정신을 담았다거나, 이러한 근거와 논리를 대지는 못하지만 나에게 어떤 건물이나 돌덩이나 조형물이 기쁨을 준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느낌에 불과하다. 그런들 어떠랴. 나의 일천한 안목이 최순우 선생처럼 깊은 안목과 일치하면 영광이고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앞서 눈뜬 사람들이 이렇게 길잡이가 되어주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기쁨을 우리같은 사람들도 이생에서 누리고 가게 되는 게 아닌가. 그것이 안목있는 사람의 할일이요, 글솜씨 있는 이들의 역할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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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학고재 산문선 3
박지원 지음 / 학고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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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폭이 좁은 사회에서, 폭넓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 살기가 얼마나 피곤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디에도 완전히 자유로운 세상이란 것은 없겠지만 행동 뿐 아니라 생각에도 한계를 지어주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이단아 취급하는 사회에서 인식의 폭이 넒은 사람들은 단순하고 말잗듣는 사람보다 분명 힘겹게 살았으리라.

연암 박지원은 당대에 탄압을 받을 만큼 분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어쩌면 조선후기 사회가 통제할 수 있는 스펙트럼 자체를 뛰어넘고 있었던게 아닐까) 당신 소위 '선비'들의 인식론과는 그 폭이 다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저 허공을 날며 우는 새의 소리야말로 얼마나 생기 넘치는가. 그런데 적막하게도 새 조(鳥) 한 글자로 새들의 빛나는 색깔을 말살하고 몰각시키며 그 모습과 소리를 놓치고 없애버리니...(중략) 문장은 이 광경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

실질을 만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인'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생생한 것들을 글로 표현할 길 없었고, 글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글 그 자체를 위하여 무엇이 살아있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채 허상은 좇던 시절에 박지원의 혜안이 빛난다.

그러나, 그 시절보다는 발에 땅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 지금 세상에도 여전히 '문장은 이 광경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는 말이 뼈에 사무치는 것은 여전히 자기 허영심의 바람으로 둥둥 허공에 떠다니는 '글쓰는 이'들이 많은 현실 때문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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