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명쾌했다. 삶과 죽음, 적군과 아군, 승리와 패배, 명령과 복종, 용기와 비겁...
대적하는 두 개의 가치는 명확했다. 죽음이 아니면 삶이라는 사실은 삶에 연연하지 않게 했다. 어떻게 사느냐, 왜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죽지 않는 것.
전선은 내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결정해주었다. 나는 전성의 이쪽에 있고 적들은 저쪽에 있었다. 이기기 위해서 싸웠고 이기면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수십, 수백의 목숨이 이유 없이 널브러졌지만 살인에 대한 가책도, 부상의 아픔도 이내 잊혀졌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죽음의 이유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살아가는 데 이유가 있듯 죽는 데도 이유가 필요했다.
이곳에는 적군과 아군이 없다. 유일한 아군은 나 자신일 뿐이었다. 적기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싸움이었다. 내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적기 되어 달려들었다. 그것이 이곳의 복잡다단함이었다.-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