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구판절판


그녀는 가려움을 주관하는, 뇌의 이름 모를 두엽을 생각했다. 순수한 고통이나 기쁨이 아니면서 그 두 감각이 공존하는, 당시에는 미칠 것 같지만 긁어주기만 하면 달콤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기이한 감각. 가려움은 성감과도 비슷하다. 처음 섹스를 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던 밤, 왜 그렇게 그 남자의 손길이 닿는 모든 구석에서 가려움 혹은 간지러움을 느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100쪽

속물이 속물인 것을 감추려면 쿨할 수 밖에 없다. 쿨과 냉소가 없다면 그들의 속물성은 금세 무자비한 햇빛 아래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 대도시의 익명성은 세련을 가장한 이런 속물성 덕분에 유지된다. 다시 말해 이곳에선 누구든지 모습을 감추고 살 수 있다.-101쪽

그녀는 문득, 엄마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런 일이 과연 자신의 인생에 닥쳐올까, 따위를 생각했다. 끔찍하기만 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키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까처럼, 끔찍했던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것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 게 인생이 아닐까.-308쪽

"오늘 문득 깨달았어. 지금까지 난 인간들이 상당히 추상적인 고민들을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인생, 운명, 정치, 뭐 이런 것. 너도 알다시피 나 수학 좋아하잖아."
"형이 늘 말했죠. 순수한 추상의 세계라고."
"맞아. 문제 풀고 있노라면 시간 참 잘 가지. 난 다른 사람들도 얼마간은 다 그런 면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아. 그런데 오늘 보니 다들......"
"다들?"
"살아남기 위해, 오직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들 사는 것 같아. 왜 나만 그것 몰랐을까?"-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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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2006-10-0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랬어. 인생이 수학 같이 명확할 줄 알았어. 아니란 것을 알고난 뒤, 아마 죽을때까지 인생이 뭔지 알기 위해 떠돌아다닐 것 같아,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