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 우리는 왜 부정행위에 끌리는가
댄 애리얼리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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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한 친구로부터 열라 원칙주의자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융통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뜻으로 한 말일 텐데, 스스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보였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원칙과 융통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융통성이란 원칙이나 규칙을 약간 벗어나지만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일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좀 생각이 달랐다. 적용할 원칙이 있다면 무조건 원칙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안의 경우 적용해야할 원칙이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때 관련 있는 여러 원칙 중 어떤 것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유연한 판단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융통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역시 큰 틀에서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그간의 경험을 통해 예전처럼 쉽게 단정짓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원칙을 적용해야할 사안인지 융통성을 발휘해야할 사안인지 명쾌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또한 지켜야할 원칙이란 것도 대개 추상적이거나 혹은 현실과 맞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꼭 옳은 일이라고 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차도 사람도 없는 한적한 새벽 도로에서 굳이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와 같은 문제에서부터 불법으로 규정된 파업이라면 무조건 그만두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쉽게 결론내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내리기가 어렵다고 해서 실행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행위가 심사숙고를 거친 완전한 결론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못한 채 굶어죽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대개 실행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검토가 뒤따르는 식이 된다. 이를 우리는 반성 혹은 성찰이라고 부른다. 반성 혹은 성찰을 통해 자신이 행한 행위의 득과 실, 옳고 그름을 판단한 후, 다음 번 행위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기억의 창고에 저장해 두는 것이다. 문제는 앞서 원칙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득과 실, 혹은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판단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듯이 자의적 기준은 대체로 반복될수록 완화되기 마련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의적 기준의 완화와 일상화를 구체적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저자인 댄 애리얼리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실험은 단순하다. 주어진 문제를 풀고 스스로 채점한 후 자신이 획득한 점수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 보상을 받기 전 자신의 답안지를 스스로 파기하는 조건을 덧붙인다. 즉 자신이 획득한 점수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얼마나 정직하게 자신의 점수를 제시할 것인가.

 

실험결과는 예상했던 대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점수를 부풀려 말한다. 부정행위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경우 20문제 중 평균 7문제를 맞추었지만, 부정행위가 가능한 상황이 되자 12문제로 상승한 것이다. 게다가 남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고 나면 이 수치는 15문제로 치솟는다. 저자는 다양한 조건과 상황을 덧붙인 변형된 실험들을 통해 이 같은 부정행위가 대단히 일반적으로 벌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재밌는 사실은 이러한 부정행위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대부분 자신이 맞춘 개수에 몇 개를 덧붙일 뿐, 최대치의 보상을 노리고 극단적으로 정답의 개수를 부풀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 혹은 착한 사람들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사소한거짓말을 하고 산다. (물론 책의 원제는 <부정직함에 대한 (정직한) 진실>로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소한 거짓말. 여기서 사소함이란 원칙이나 규칙이 한정하고 있는 테두리를 약간 벗어나는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물론 엄격히 따지면 잘못된 행위이지만 누군가에게 불쾌할 정도로 큰 해를 끼치지 않기에 들통난다면 서로 겸연쩍게 웃고 넘어갈 정도의 벗어남.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약간의 벗어남을 융통성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어떤 경우 이 정도의 융통성은 그 개인의 대범함이나 삶의 여유를 보여주는 표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소한 일이기에 그저 웃어넘기고 말아야 할까. 저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사소한 부정의 누적은 사회적으로 더 큰 손실을 불러온다.

 

  “우리는 수많은 실험을 하면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테스트했다. 때로 기회가 닿는 대로 최대한 많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봤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 실험에서 전체 스무 문제 중 열다섯 문제 이상 정답을 맞혔다고 주장한 사람을 거의 못 봤다. 그러나 스무 문제를 모두 맞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나타났다. 이들은 비용편익분석을 한 다음 자신들이 챙길 수 있는 돈을 최대한 챙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보지는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외적인 사람들이 우리가 이들에게 빼앗긴 돈은 몇백 달러에 불과했다(바람직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한편 우리는 겨우몇 문제만을 부풀리는 사람은 수만 명이나 봤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나머지 우리가 이들에게 빼앗긴 돈을 모두 합하면 수천 달러 규모에 이르렀다. 우리가 이들에게 빼앗긴 돈은 적극정인 부정행위자들에게 빼앗긴 돈보다 훨씬 더 많았다.”(299~300)

 

그렇다면 이런 사소한 부정행위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저자가 밝히는 사소한 부정행위의 메커니즘을 다음 세 가지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남들도 다 하는데 뭐.’ 먼저 약간의 자의적 기준 완화가 이루어지고(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러한 행위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면 반복적으로 행해지며(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남들도 나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면 자기합리화가 완성되는 것이다(남들도 다 하는데 뭐). 어찌 보면 대단히 상식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말에 뜨끔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암시하는 대안도 대단히 사소하다. 부정행위가 저지러질 가능성이 높은 곳에 윤리적 각성을 불러일으킬만한 사소한 장치만 추가해도 부정행위의 정도가 대폭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인자판기 앞에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로 사람 눈을 그려 넣음으로써, 설문 내용이 진실이라는 서약을 설문 후에 하는 게 아니라 설문 전에 하게 함으로써, 테스트 전에 십계명과 같이 윤리적 기준이 되는 내용을 암송하게 함으로써 부정행위를 줄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부정행위의 사회적 전염을 막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사회 저명인사, 기업 경영자 등과 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부정행위에 대한 엄격한 처벌도 필요하다.

 

여기까지 저자의 논의를 따라오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 사회로 눈을 돌리게 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유명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 관대한 처벌을 받는 것이 점점 당연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소한 부정행위에 대해 엄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허탈한 일로 여겨질 것인가. 오히려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갖지 못해서 당하는 억울한 감정만을 증폭시키게 될 뿐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묻지마 범죄역시도 이런 억울함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폭발한 결과가 아닐는지.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우리가 지켜야할 윤리적 기준을 다시 한 번 확립하고 계속해서 재확인하는 것이다. 윤리적 기준의 모호함 속에서 융통성이라는 이름의 자의적 일탈이 횡행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을 통해 우리들이 세운 원칙과 규칙들을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일 것이다. ‘원칙주의자란 말이 비아냥보다는 존경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회, 이것이 바로 <부정직함에 대한 정직한 진실>을 마주한 이들이 만들어 갈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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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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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미국 드라마 <뉴스룸>의 오프닝 시퀀스는 매우 인상적이다. (혹시 못보신 분들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http://youtu.be/zqYnSuLLIkE) 한 대학의 토론회에 참여한 민주당, 공화당, 그리고 주인공인 뉴스앵커에게 한 여대생이 질문을 던진다. “왜 미국이 가장 위대한 국가라고 생각하시나요?” 민주당측 인사는 다양성과 기회라고 답하고, 공화당측 인사는 자유 그리고 자유라고 답한다.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의 인기를 위해 중립인 척 빠져나가려던 주인공은 진솔한 답변을 요구하는 사회자의 계속된 추궁에 결국 본심을 털어놓는다. 암울한 통계치들을 나열하며 미국은 결코 위대한 국가가 아님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잘 하는 건 딱 세 가지밖에 없어. 인구당 감옥에 가는 비율, 천사가 진짜라고 믿는 성인 비율, 그리고 국가방위비.”

 

가끔 저 장면의 배경을 우리나라로 옮겨 놓으면 주인공의 대사에 무엇이 들어가게 될까 생각해본다. 교통사고율? 자살률? 연간 노동시간? 얼마 전 여기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바로 저임금 비정규직 비율이 세계최고라는 소식. 기사는 IMF 이후 노동시장 양극화가 꾸준히 진행됨으로써 임금 불평등이 점차 심화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비정규직의 증가, -중소기업간 임금 격차 확대, 대기업 일자리의 감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양질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그나마 남은 일자리들도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이다. 언제부턴가 하우스 푸어, 워킹 푸어와 같은 신빈곤층에 대한 얘기가 언론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린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 때문인지 아니면 올해 치러질 대선을 의식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러저러한 복지 정책에 대한 얘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그저 올해 4,580원이던 최저임금이 내년에는 4,860원으로 인상되었다는 소식뿐이다. 법정노동시간인 주당 40시간으로 계산하다면 한 달에 80만원도 채 안 되는 금액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돈으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긴 4인 가족 최저생계비용을 약 144만원(2011년 추정)으로 산정하는 정부입장에서는 부모 2인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면 매달 20만원은 저축할 수 있다고 큰소리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인이라면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잘 알고 있다.

 

2.

저자인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이런 터무니없는 인식을 폭로하기 위해 실험을 실행한다. 과연 비숙련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만으로 실제 생활이 가능할까?”(11) 실험 결과는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다. 웨이트리스, 청소부, 요양원 보조, 대형마트 매장 판매원 등으로 지역과 직군을 바꿔가며 실험을 하지만, 시작하기 전 자신이 세웠던 규칙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으며 어떤 곳에서는 계획했던 기간(한 달)을 채우지도 못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실패하게 된 과정과 그를 통해 깨달은 내용을 솔직하게 기록해 나간다.

 

저자가 이 실험과 실패를 통해 깨닫게 된 내용의 핵심은 각 장의 제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시간당 7~8달러정도에 불과한 임금으로는 집세를 지불하기 어렵다. 가난한 이들은 목돈이 없으므로 보증금을 내고 입주해야만 하는 집은 구할 수 없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싼 월세를 내고 보증금이 없는 집을 찾을 수밖에 없다.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집세로 내야하고 그러다보니 음식과 의복과 같은 다른 필수품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되고 자연히 일상생활은 피폐해지게 된다.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1장 가난하기에 돈이 더 든다)

 

직장에서 다른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만 증가할 뿐이다.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왕따의 일로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역겹기까지 했다. 경비원, 청소부, 단순노동자, 성인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사람들. 이들은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 사회의 불가촉천민들이었다.”(163) 한 가정이 그리고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노동들이지만, 정작 그 노동을 하는 당사자들은 최악의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것이다. (2장 모두가 우리를 무시한다)

 

이처럼 적은 월급에 온갖 무시를 당하면서도 왜 그들은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가? 당신은, 우리는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가? 왜 떠나지 않는가?”(242) 대답은 뻔하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벗어나봐야 지금과 비슷하거나 더 안 좋은 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을 테고, 새 직장을 구하는 동안의 집세와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참고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다. 혹시 아는가, 관리자의 눈에 잘 보여 조금이라도 임금이 오르게 될지. 그렇게 점점 길들여지게 된다. (3동료라는 이름의 노예)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자본주의 민주 국가에 속한 자유로운 노동자인 저임금 노동자들이 늘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전혀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임금, 그리고 중간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대다수는 직장에 들어설 때 시민으로서 누리는 자유권을 모두 다 문 밖에 두고 와야 한다.”(283) 더 나아가 책 말미에 추가된 10년 후의 후기에서 저자는 상황이 오히려 나빠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3.

이제 이것이 단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을 넘어섰고, 저임금 비정규직 비율이 세계 최고라는 우리나라도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다. 이 책과 비슷한 기획의도로 출간된 <4천원 인생>(안수찬/전종휘/임인택/임지선 지음, 한겨레출판, 2010)이나 <한국의 워킹푸어>(프레시안 특별취재팀 지음, 책보세, 2010)에 실려 있는 생생한 진술들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가 과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기획의도 자체가 현장보고에 중심을 두고 있기에 이 책에서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저자가 경험을 통해 얻게 된 몇 가지 통찰은 이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수 있는 적정한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정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 현재의 최저임금은 물가수준과 비교했을 때 터무니없이 낮다. 또한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주거의 안정을 위해 공공임대주택 건설이나 주택 보조금과 같은 빈곤층을 고려한 주택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집을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집이 없는 자들을 위한 정책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자율권을 보장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이것이 오히려 작업의 효율성도 높이면서 박탈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노동에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자율적으로 일하게 내버려두면 노동자들은 나름의 협력 체계와 작업 분배 체계를 고안해 위기 상황이 닥칠 때 훌륭하게 대처할 줄 안다. 솔직히 말해서 복종을 요구하는 것 외에 관리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285)

 

저자가 강조하듯이, 자기의 시간을 1시간당 얼마라고 판다는 것은, 처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겠지만 사실은 인생을 파는 것이다.”(252) 누군가를 고용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인생을 구입하는 일이라는 엄중한 인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글 서두에 언급한 <뉴스룸> 오프닝 장면에서 주인공은 긴 설교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거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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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9-0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거지만 명료하게 그리고 이지적으로 참 잘쓰시는듯. 뒷북이지만 잘읽고 갑니다.

nunc 2012-09-11 02:58   좋아요 0 | URL
항상 좋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참, 지난달 좋은 리뷰 선정도 축하드립니다. ^^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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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공포물을 그다지 좋아하질 않는다. 직접적 이유는 공포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들, 즉 서로 죽이고 난도질하고 썰어대곤 하는 모습들이 끔찍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 죽이는 일을 즐기며 볼 수 있다니! 가끔 호러 마니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런걸 보면서 재미를 느끼고 환호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그 부정적 측면이 극대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생생한 공포인데 굳이 따로 공포물을 찾아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나 할까. 대량해고, 산업재해, 교통사고, 빚더미에 앉아 자살로 떠밀리는 사람들, 충분히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자연재해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상의 공포들이 널려 있는 사회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공포물이란 그런 일상의 공포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수단이 아닐까 하는 혐의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뒤늦게 <렛 미 인>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물론 영화는 스토리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늙지 않는 뱀파이어 소녀와 자신의 전 생을 바쳐 소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한 남자, 그리고 소녀에게 새롭게 선택되어 예정된 삶을 살아가게 될 소년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이 이야기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스토리는 대단히 매혹적이고 긴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뱀파이어가 누군가의 피를 통해서만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 소녀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피를 짜내 소녀에게 바쳐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의 피를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결국 자신의 피를 내줘야하며, 금세 또 다른 제공자로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며, 이것이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대한 하나의 은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노동자의 피로 젊음을 유지하는 부르주아들.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받아들면서 이런 생각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약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뱀파이어 현상의 사회학적 의미를 다루기보다는 말 그대로 뱀파이어의 역사를 차곡차곡 정리한 책이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대상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이 책은 고대 신화에서부터 문학, 회화, 영화, 오페라, 대중음악, 만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르를 망라해가며 대중문화에서 뱀파이어가 다루어져왔던 방식들을 화려한 화보들과 함께 하나하나 친절하게 정리해놓음으로써 나와 같은 문외한이 쉽게 뱀파이어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렇게 뱀파이어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어 얻게 된 첫인상은, 뱀파이어란 존재는 실로 인간을 매혹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총집결한 아이콘이라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이나 좀비와 같은 여타의 아이콘들과는 달리 유독 뱀파이어만이 지속적,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뱀파이어에는 죽음을 회피하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구, 흡혈과 같은 금지된 행위에의 열망, 흡혈을 함으로써 상대를 나에게 복종시키는 권능, 외딴 곳에 지어진 성이나 무덤과 같이 어두침침하고 그로테스크한 공간에 대한 생래적 두려움 등 인간이 가진 온갖 욕망과 두려움이 뒤섞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설명처럼 뱀파이어는 우리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 된다.

 

오늘날의 뱀파이어 영화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욕망을 지극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이는 짐작하건대 우리가 이 상상의 존재를 우리의 불안과 갈망을 비추는 거울로 여기기 때문일 터이고, 또한 욕망과 공포가 더할 나위 없는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329)

 

비현실적 대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언제나 그들이 현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그렇다면 뱀파이어라는 이 거울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불안의 해소와 갈망의 충족일까? 아니면 새롭게 더 커진 불안과 갈망일까? 아니면 우리가 가진 불안과 갈망에 대한 반성과 성찰일까?

 

나는 그것이 우리가 어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불안과 충족되지 못하는 갈망으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가는 이라면,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더 큰 불안, 그러나 실현가능하지 않은 불안에 자신을 맡기기 쉽다. 공포물이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공포영화는 잘 된다는 세간의 통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 영원히 계속될 이야기라는 저자의 단언이 달갑게만 들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하는가에 달려있다. 뱀파이어가 가져다주는 가벼운 자극에 흠칫 몸을 떨다가도 뱀파이어가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함의들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현실의 욕망에 굴복하여 뱀파이어가 되길 갈망하거나 혹은 현실에 대한 회피나 대리만족으로써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모습에 환호하게 될 것인지. 우리가 전자의 방식으로 뱀파이어를 즐길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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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탄생 - 캄브리아기 폭발의 수수께끼를 풀다 오파비니아 2
앤드루 파커 지음, 오숙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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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기란 지금으로부터 54,300만 년 전부터 49,000만 년 전 사이의 시기를 일컫는 지질학의 용어로, 영국 웨일스의 캄브리아 구릉지에서 이 시기의 화석들이 발견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캄브리아기는 약 46억 년이라는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겨우 5천만 년 가량의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생명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시기로 기록된다. 왜냐하면 이 짧은 시기에 급격한 생명의 진화가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화석증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단 3개만 존재하던 동물문이 갑자기 38개의 동물문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이 사건은, 고생물학에서 캄브리아기 폭발이라고 불리며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 책은 이처럼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캄브리아기 폭발의 원인을 추리하는 책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데 있어 추리이라는 말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화석증거의 특성상 (호박이나 만년설에 보존되어 모든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예외겠지만) 현재까지 남겨진 부분적인 증거들을 토대로 원래의 모습을 재구성해야 하고, 다시 이렇게 재구성된 생물들을 토대로 수억 년 전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중의 재구성 과정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해석과 추론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러 경쟁이론들이 난립하게 되고, 더 나아가 여러 경쟁이론들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확증하기도 매우 어렵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통해 증명해 내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을 제외하고 남은 것,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그 나머지 하나가 틀림없이 진실이다.”라는 셜록 홈즈의 대사를 제사로 인용하며 추리소설의 문법을 차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불경하게도 추리소설 독자에게는 범죄행위에 가까운 스포일러를 제목에 담아 놓는다. <눈의 탄생>, 범인은 바로 이었어! (물론 이는 번역판의 제목이고 원제는 눈 깜짝할 사이에를 뜻한다. ‘짧은 시기이라는 의미를 이중적으로 담고 있는 적절한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는 자신의 추리과정이 얼마나 그럴듯한지 확인해보라는 자신감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다. 저자가 이렇게 자신감을 내비칠 수 있었던 이유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들을 넘나들며 수집한 과학적 증거들을 조합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더 많은, 더 섬세한 퍼즐 조각들을 가지고 그림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활용된 과학적 증거들은 비단 생물학뿐 아니라 지질학, 물리학, 화학, 역사, 미술 등에서 추려낸 것이다. 종종 눈, , 화석, 포식자, 이집트 신상, 심해, 산호초 같은 주제들도 끼어들 것이다. 나는 캄브리아기 폭발이야말로 독자 여러분의 시간을 빌릴 만큼 중대한 일이며,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해명을 책으로 출간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17~18)

 

저자의 장담처럼 이 책은 400여 페이지를 읽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흘러갈 만큼 상당히 재미있게 쓰여져 있다. 각각의 조각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책을 직접 읽어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요약하기는 너무 방대하며, 또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만 언급하자면, 지적설계론자들이 진화론에 반대하며 즐겨 제시하곤 하는 눈과 같은 복잡한 구조가 진화와 같은 우연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고 상상하기 어렵다는 주장에 대해 눈이 진화적 과정으로 거쳐 만들어질 수 있음을, 그것도 역사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그런 변이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다양한 증거들을 조합하여 멋진 결론을 내리는 훌륭한 탐정의 면모를 경험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눈의 진화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빛 스위치설에 대한 해명이 다소 빈약하다는 점이다. 눈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빛이 중요한 선택압력으로 작용해야 하기 때문에, ‘왜 캄브리아기에 와서야 갑자기 빛이 선택압력이 될 수 있었는지를 해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몇 가지 가설들을 제시하고는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다른 부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단한 소개만으로 그치고 있는 점이 아쉽다.

 

이 책은 쉬운 설명과 친절한 삽화로 우리를 5억 년 전의 시간으로 이끌고 가 당시의 환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새롭게 진화론이 공격받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 생명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더불어 같은 시리즈인 오파비니아의 책들, 즉 캄브리아기 이전 시기를 다루고 있는 <생명 최초의 30억 년>, 캄브리아기의 대표적 생물을 다루고 있는 <삼엽충>, 캄브리아기 이후의 또 하나의 결정적 사건인 페름기의 대멸종을 다루고 있는 <대멸종> 등과 함께 읽는다면 생명의 역사를 일별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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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0.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 감상을 써야하는 일은 남감하다. 이런 종류의 책이란 나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책을 말한다. 이해 능력을 넘어서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고 물음을 던질 수도 없다. 그저 이해 안 되는 음악이나 영화, 그림을 보았을 때처럼 저런 것도 있구나하고 넘겨버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저자의 지적처럼 무의식적인 자기 방어에 굴복하는 비겁한 일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걸. 마침 사사키 아타루가 어렵고 지루한 책에 대해 말하니 이 얘기를 해보자.

 

1.

나는 어렵다고 느끼게 되는 책은 두 종류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독자의 사유를 극단까지 몰아가는 책들이 있다. 상상 가능한 모든 논리적 근거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토함으로써 말 그대로 독자를 질리게 만드는 혹은 압도하는 책들이 그렇다. 이런 책들은 빈틈없이 촘촘하게 짜인 사유의 그물망을 저자와 함께 직조해나가고 싶다는 열망이나 열정이 없다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 대개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이 비로 이러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오락으로써의 책읽기가 아니라 지적 고통으로써의 책읽기.

 

이런 책들을 끝까지 견뎌내었을 때 결국 남는 것은 직조된 그물이 아니라 그물을 짜는 법이다. 저자의 결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결론에 도달한 과정을 배울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한번 그물 짜는 법을 배우게 되면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실을 가지고도 새 그물을 짤 수 있으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 생각을 덧붙여 새로운 방식의 그물을 짜는 것도 가능해진다.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을 배운다는 칸트의 조언을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쉽게 요약 정리된 입문서보다 고전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어려운 책들도 있다. ‘뭔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에 대해 어떤 이들은 저자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지껄인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는 저자의 속내를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없는 이상 과도한 말이라고 생각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책들이 대부분 독자에 대해 설득보다는 공감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쓰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이런 책들은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가 아니라 제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느껴지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니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대체로 이런 느낌이 드는 책은 모순과 역설 혹은 비약으로 점철된 책일 경우가 많다. 물론 그것들이 은유의 차원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좋은 은유는 컨텍스트 안에서 나름의 정합성이 있기에 설득력을 가진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문장만 따로 떨어뜨려놓고 본다면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대 노 저어 오오라는 문장과 결합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다 모순이나 역설 혹은 비약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단순히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치부하기보다는 그것이 어떤 컨텍스트 안에 위치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독창적으로 어떤 개념을 새로 정의하여 사용할 수도 있고, 독자에겐 낯설지만 저자에겐 당연한 문화적 배경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그러나 이러 시도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나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포기하는 수밖에,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필요해 보이는 말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사사키 아타루의 책에 대해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

사사키 아타루는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39)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무의식과 독자의 무의식이 직접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무의식에 직접 침투하기에 독자의 무의식은 자연스럽게 자기 방어를 하게 된다. ‘지루하고 어려워. 그러니 읽지 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읽는다면 독자의 무의식은 외부의 침투로 인해 점차 변화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사사키 아타루는 이런 무의식의 변화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에 미쳐버리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더 나아가 그는 읽는다는 것이 바로 혁명이라고 말한다.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171~172)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2~43) 즉 읽는다는 것은 미친다는 것이고, 미친다는 것은 나의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읽어버린 이상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더 이상 기존의 가치와 믿음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 것입니다. 즉 고쳐 쓰는 것, 쓰는 것이었습니다. ()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은 읽고 있는 자신과 세계가 동시에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쓴다는 것에 대해서도 신앙은 사라집니다.”(216) 이처럼 읽고 쓴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와 믿음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경우로 국한되지 않는다.읽는 것 그리고 쓰는 것. 이것이 정보를 둘러싼 착취의 구도를 파괴하고, 모든 분야에 걸친 답답한 닫힌 영역을 답파하여 현 상황을 추인하는 조치를 거절한 끝에 인류사적 규모의 중요성을 갖게”(62)되는 식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위대한 두 혁명,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과 16세기의 대혁명이 바로 읽기, 다시 읽기, 쓰기, 다시 쓰기의 결과였다. 중세 해석자 혁명은 로마법을 읽고 다시 씀으로써 현대 사회의 모든 기틀을 마련해 놓았고, 루터의 대혁명은 성서를 읽고 다시 씀으로써 종교개혁과 근대적 법체계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고 쓰는 한 혁명은 지속된다. 문학이 끝났다, 예술이 끝났다, 역사가 끝났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게으른 이들의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 읽고 쓴다는 것은 영원한 혁명의 시간에 놓인다는 것이다.

 

3.

읽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해나가는 일이고 그런 행위들이 계속 누적되어 세상을 바꾸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읽어나갈 때 또 다른 혁명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뭔가 그럴듯하고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따져보자. 사사키 아타루는 어려운 책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저자와 독자의 무의식적 접속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어렵고 지루하다는 느낌, ‘무의식적 자기 방어가 느껴지면 무의식적 접속이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면 포기하지 말고 읽고, 또 읽고 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와 같은 반복적 읽기는 대단히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이 아닌가? 그런 의지적이고 의식적 활동 자체가 바로 무의식적 접속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누구나 그렇게 책을 읽고 있을 것이므로 굳이 읽는다는 것에 대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가 쓰는 혁명이란 개념은 어떠한가? 일상적 의미의 급진적 변화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점진적 변화까지 포괄하는 개념인가?우리는 혁명으로부터 왔습니다.”(63)라고 할 때, 그 혁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중세 해석자 혁명인가 루터의 대혁명인가, 아니면 그 모든 혁명을 모두 총칭하는 것인가? 현대 사회의 모든 기본이, 이것저것 다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왔다”(193)고 하면서 루터가 살았던 16세기는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 즉 교황 혁명의 성과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71)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 해석자 혁명의 여러 성과들 중 특정한 성과만 루터의 혁명에 의해 새롭게 되었다는 의미인가? 루터의 혁명도 법의 혁명”(91)이었고 중세 해석자 혁명도 법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법”(176)을 낳은 혁명이었다면, 12세기 이전-중세 해석자 혁명 이후-대혁명 이후 각각의 법체계는 어떻게 바뀌게 된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계속 뒤적이게 된다. (혹시 이것이 그가 말한 다시 읽는다는 것일까?) 그러나 여러 번 뒤적여 봐도 여기저기서 산만하게 끌어다놓은 전거들만 보일 뿐 논리적 구조를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적게 반복해서 읽으라더니, 이 많은 사상가들이란!) 얼핏 보기엔 멋진 그물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뒤죽박죽 얽혀있는 실타래와 마주한 느낌이랄까. 결국 그가 말하고 있는 읽는다는 것은 혁명한다는 것이다라는 진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0.

물론 이는 내가 가진 이해 능력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내가 처했던 이 어려움을 사시키 아타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까지 읽고 돌아오지 않으면 사실상 납득이 가지 않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것을 입에 담아버렸으므로, 이대로는 약간 되풀이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 되고 말 것 같습니다.”(43) 그래서 몇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반복해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 나의 무의식과 사사키 아타루의 무의식은 만나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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