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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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단 한 권의 책을 출판하기 위해 자그마치 15년 동안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이건 다시 장인의 이야기가 된다. 리처드 세넷이 지적하듯이 장인은 무언가에 확고하게 몰입하는 특수한 인간의 조건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장인들의 모습에서 어떤 감동, 숭고함과도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역시 세넷이 말하듯 굽은 발로 절룩거릴지라도 그 자신이 아니라 자기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헤파이스토스,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도해>라는 사전의 편찬에 확고하게 몰입하는 겐부쇼보 출판사 사전편집부 사람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가장 존엄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이들의 몰입에 깊은 감동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현대 사회의 노동이 장인적 특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포디즘적 생산체제 이후로 대부분의 노동에 부여된 특징인 구상과 실행의 분리, 즉 일에 대한 고민과 실제 작업의 불일치는 스스로 자신의 일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없애버렸다.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사고만 안 나면 된다. 그렇게 우린 인간이 아닌 기계가 되어가고, 퇴근 시간은 해방의 시간이 된다. 그런 점에서 겐부쇼보 출판사 사전편집부 사람들, 즉 마쓰모토 선생과 아라키 씨, 마지메와 니시오카, 기시베의 열정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일종의 이상일 뿐이다. 요리에 전념하고자 하는 가구야 씨나 미끈거리는 손맛까지 재현한 궁극의 종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미야모토를 비롯한 제지 회사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모두 불가능한 현실일 뿐이다. 그러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어쩌면 사전 만들기라는 일 자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전 만들기란 불가능에의 도전이다.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본다. 수많은 단어들과 그 단어들의 적확한 의미를 찾아 짝지우는 일, 시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는 의미들을 순간에 포착해 고정된 틀에 담아내는 일. 마지메의 생각처럼 아무리 훌륭한 사전이어도 시대에 뒤처지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 말은 생물이기 때문이다.”(114)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끊임없이 운동하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방대한 열량이 한순간에 보여 주는 사물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건져 내 문자로 옮기는 일”(92) 뿐이다. 그러니까 물고기처럼 손 안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의미를 붙들어 두려는 사람들.

 

그뿐 아니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고, 조합에 사용된 각각의 단어들은 또 다른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체계. 무한히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며 서로가 서로에 연결되는, 그리하여 끝없는 페이지의 넘김 속에 마침내 제 자리로 돌아오는 미로와 같은 세계. 이 끝도 없고 출구도 없는 미로와 같은 세계를 헤매다 보면 주저앉기 십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을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라키씨는 말한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36) 말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튼튼한 배가 될, 진리를 향한 끝없는 도전의 튼튼한 도구가 될 사전.

 

그런 점에서 장인들은 모두 플라톤주의자다. 도달하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완성태를 향해 무모하게 돌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완성을 향한 여정에 시간이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죽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죽음을 예감하는 병상에서도 용례채집카드 작성을 멈추지 않는 마쓰모토 선생이나 4교까지 완성된 원고에서 누락된 표제어를 확인하기 위해 한 달 동안 겐부쇼보 지옥의 진보초 합숙을 감행하는 사전편집부 사람들의 모습에서, 마침내 15년의 수고가 결실을 맺은 날 다시 개정 작업을 시작하자는 아라키의 말에서, 시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집념과 열정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완성을 향한 열정은 사전편집 일에 무관심하던 니시오카마저 변화시킨다. 한정된 시간밖에 갖지 못한 인간이 힘을 다해 넓고 깊은 말의 바다로 저어 나간다. 무섭지만 즐겁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언제까지고 이 배를 계속 타고 싶다.”(186)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가. 이 점은 아무 생각 없이 사전편집부에 합류했다가 이들과 하나가 되어버린 기시베의 생각이 잘 드러내 줄 것이다. 많은 말을 가능한 한 정확히 모으는 것은 일그러짐이 적은 거울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일그러짐이 적으면 적을수록 거기에 마음을 비추어 상대에게 내밀 때, 기분이나 생각이 깊고 또렷하게 전해진다.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고 울고 화를 낼 수 있다.”(236) 말이란 우리가 가진 감정이나 생각의 미묘한 분위기를 적확하게 포착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단어와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은 결국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타인과 함께 웃고 울고 화를 내고 싶다는 욕망의 실현인 것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바로 이 부분을 자극함으로써 우리 속 깊이 잠들어 있던 어떤 욕망, 불가능하지만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워준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느끼게 되는 뭉클함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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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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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병희 선생의 번역으로 플라톤의 <국가>가 출판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읽기 쉬운 <국가>를 볼 수 있겠구나 라는 것이었다. 이는 이전에 레퍼런스로 자리잡고 있는 박종현 선생의 <국가정체>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박종현 선생의 번역은 꼼꼼하고 치밀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쉽게 나아가기 힘들다. 같은 문장을 두세 번 읽고 곱씹어야 뜻이 파악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기에 서양 사상의 최고 고전이라는 추천에 휩쓸려 <국가>를 읽으려 시도하다, 난해한 문장이 방대한 분량으로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곤 포기해버리는 이들도 많았다.

 

그랬던 사람들에게 이제 훌륭한 대안이 주어졌다. 이전에 국가를 읽고 포기했던 사람들이 이 책을 다시 보게 된다면, 이전과 달리 술술 읽히는, 난해하게 들렸던 플라톤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을 두세 번 정도 읽었지만 매번 힘든 경험이었다. (물론 내가 가진 책은 1997년 초판이기에 2005년 개정판은 사정이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천병희 선생의 번역본은 막힘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비교해 보자. 479c에 있는 의견(doxa)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박종현: ‘존재하지 않음에 있어서 그 이상일 수 없는 것으로 말하면, ‘비존재보다도 더 어두운 것이 없을 것이요, ‘존재함’(있음, : einai)에 있어서 그 이상일 수 없는 것으로 말하면, 실재보다도 더 밝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일세.

 

천병희: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둡고 비현실적일 수 없으며, 실재하는 것보다 더 밝고 현실적일 수 없으니 말일세.

 

박종현 선생 쪽이 원문에 더 충실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의미 파악이나 가독성에 있어서 천병희 선생 쪽이 훨씬 낫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책 전체가 이런 식의 차이를 보인다.

 

2.

그러나 당연히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법. 이 책에서는 가독성을 얻기 위해서 철학적 엄밀함을 다소 포기한다. 예를 들어 335d의 한 구절을 비교해 보자.

 

천병희: 올바른 사람들이 정의에 의해 사람들을 불의하게 만들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착한 사람들이 미덕에 의해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 수 있을까?

 

박종현: 올바른 사람이 올바름에 의해 사람들을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로 만들 수 있겠소? 요컨대, 훌륭한 사람이 [사람의] ‘훌륭함’(:aretē)에 의해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로 만들 수 있을까요?

 

정의/올바름, 착한/훌륭한, 미덕/훌륭함 등의 차이가 보이고,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 훨씬 쉽고 편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각 개념들이 가진 풍부한 의미가 많은 부분 소실될 수밖에 없다. ‘aretē’를 단지 미덕이라고 하지 않고 훌륭함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박종현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retē는 이 책에서도 수없이 반복되어 나오는 말인데, 오래도록 흔히 ’(virtue, vertu, Tugend)으로 번역되어 왔다. 모든 사물에는 그 종류 나름으로 훌륭한 상태’, 좋은(agathos=good) 상태가 있게 마련이다. 이는 대개 그 종류 나름의 기능’(ergon) 또는 구실’, 특유의 기능’(oikeion ergon)과 관련되어 있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것의 생존 기능 또는 그것의 존립 이유나 존립 조건과 관련된 것이든 간에 상관 없이, 그것들의 휼륭한 상태는 있게 마련이다. 가령 우리가 좋은 눈이라 말할 때, 이는 눈의 기능과 관련해서 하는 말이요, 개나 말의 경우에서처럼 그것들의 생존 조건이나 인간에 대한 그것들의 유용성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그 훌륭한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인위적인 산물은 그것들의 유용성 및 기능과 관련된 훌륭한 상태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좋은 칼이라든가 좋은 낫이라 말함은 그 때문이다. 이런 훌륭한 상태’(훌륭함: goodness, excellence)aretē라 한다. 다만 사람의 덕목과 관련된 경우에는 이른 이라 해도 무난하나, 논의의 보편성을 고려하여 훌륭함이라는 번역어를 택했고, 사람과 관련해서는 많은 경우에 ‘[사람의] 훌륭함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1, 36)

 

비슷하게 정의올바름으로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도 1권 주22에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박종현 선생의 번역은 특정 개념이 가진 의미를 그대로 살려내기 위해 어쩔 수 없지만 다소 딱딱하게 들리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이데아를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507b의 한 구절을 비교해 보자.

 

천병희: 우리는 다수의 선한 것과 다수의 아름다운 것이 존재하는 데 그 점에서는 그 밖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며, 우리의 논의에서도 그렇게 구분하고 있네.

 

박종현: 우리는 많은 것(polla)을 아름답’(아름다운 것들 이다’)고 하며, 많은 것을 좋’(좋은 것들 이다’), 또한 이런 식으로 각각의 것(x)()’(einai)라고 말하고 또한 표현상 구별하네.

 

박종현 선생이 다소 복잡하지만 저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리스어 ‘einai’가 가지는 두 용법, 즉 존재적 용법과 서술적 용법을 엄밀히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두 용법의 구분에 대해서는 5권 주57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두 책은 가독성을 위해 엄밀함을 다소 포기한 책과 엄밀함을 위해 가독성을 다소 포기한 책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3.

이러한 차이는 결국 두 사람이 플라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저술들이 2천 년 넘는 오랜 세월을 겪고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심오하고 체계적인 사상 덕분이겠지만, 이런 사상을 극적인 상황 설정, 등장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 소크라테스의 인간미 넘치는 아이러니 등으로 독자들에게 재미있고 생동감 있게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이 그리스의 최고 산문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7)

 

천병희 선생은 플라톤을 무엇보다 뛰어난 산문작가로 대한다. 그러므로 천병희 선생의 번역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진행에 독자가 얼마나 빠져들 수 있는가일 테고, 이 점에 있어서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는 별다른 주저함 없이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정체와 훌륭한 인간상에 대한 논변 속에 빠져든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반면 박종현 선생은 플라톤을 철학자로 대한다. 그가 제시하는 논변 하나하나와 개념 하나하나를 꼼꼼히 따져볼 것을 요구한다. 이 말이 결국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건 과연 말이 되는지, 왜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지 등등. 그러니까 스스로 소크라테스의 입장이 되어 소크라테스의 말을 되새겨보길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책 중 어느 책을 고를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국가>를 읽으려고 하는지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쉽게 말해 교양 수준에서 접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천병희 선생의 번역본을, 전공 수준에서 접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을 선택하면 될 것이다. 물론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을 손에 쥐었다가 막힌 사람이라면, 먼저 천병희 선생의 번역본을 읽은 후 다시 시도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두 책은 함께 소장하기에 좋은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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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4-25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교해놓으니까 좋은데요...
가끔은 미로 같은 말놀이 속에서 헤매다 빠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는데
천병희 선생의 역은 보다 명료하게 뜻을 전달되어서 좋았어요.

암튼!
파트장님,,,[건축을 위한 철학]은 읽고 있는중이에요..30일까지 리뷰 올릴게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nunc 2013-04-26 03:23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읽기 쉬웠다는 점에서 이번 번역에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리뷰 연장은 담당자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좋은 리뷰 부탁드립니다.^^
 
맹그로브의 눈물 - 소금제국의 군왕
케네디 원 지음, 서정아 옮김 / 프롬나드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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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태국 남부 해변 지역 여기저기를 한 달 정도 여행한 적이 있었다. 하늘만큼이나 파랬던 바다와 다이빙과 스노클링을 하며 보았던 바다 속 아름다운 풍경들은 일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그때 해변을 산책하며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 중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바닷물에 직접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들이었다. 저 나무들은 어떤 생존 메커니즘을 갖고 있기에 저렇게 짠 바닷물 위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때의 그 나무들, 바로 맹그로브에 대한 이야기이다.

 

맹그로브는 여러모로 특이한 나무다. 바닷물에 직접 뿌리를 내리며 자랄 뿐 아니라, 바닷물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소금기를 걸러내는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물 위로 드러난 뿌리로 호흡을 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특한 건 맹그로브가 새끼를 낳는 나무라는 점이다. 씨앗을 통해 번식하는 다른 식물들과 달리 맹그로브는 주아라고 불리는 싹이 튼 형태의 작은 나무를 키워낸 후, 이를 바다에 직접 떨어뜨려 번식한다. 떨어진 주아는 썰물의 갯벌에서 바로 뿌리를 내려 자라거나 물 위를 둥둥 떠다니다 정착한 곳에서 자라날 수도 있다. 직접 광합성을 할 수 있기에 바다 위에서도 한 달 정도는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바닷가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일 것이다.

 

단지 신기한 생존전략 때문에 맹그로브가 주목받는 것은 아니다. 맹그로브 숲으로 인해 만들어진 습지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맹그로브 진흙 1세제곱미터 안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기체, 크기가 0.5밀리미터 이상인 유기체가 통상적으로 2만에서 4만 종이 포함되어 있다.”(152) 풍부한 유기체와 견고한 뿌리라는 보호막은 다양한 생물들이 풍부한 먹이를 바탕으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상어와 같은 강인한 생물조차도 어린 시절엔 맹그로브 숲의 보호를 받으면 살아간다. 태국에서도 맹그로브 숲에서 뿌리 사이를 배회하는 새끼 상어를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맹그로브는 오늘날과 같은 지구온난화 시대에 훌륭한 탄소저장고 역할도 하고 있다. 맹그로브 퇴적물이 탄소를 가두어두어 이산화탄소로 산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밀물과 썰물을 통해 맹그로브는 엄청난 양의 용해된 유기 탄소를 배출해 해양 생태계 전반에 필수 양분을 공급한다. 비록 지구 지표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0.1퍼센트밖에 되지 않지만 맹그로브는 육지에서 기원해 바다로 운송되는 유기 탄소의 10분의 1을 공급하고 있다.”(148) 그런데 지금, 이 보석 같은 나무들이 세계 곳곳에서 파헤쳐지고 있다.

 

그곳을 답사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맹그로브 숲은 단단한 땅의 경계에 깊게 뿌리 내려 바다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그야말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해안의 덤불숲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장애물이자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맹그로브는 개발 광풍이 불었던 플로리다에서뿐만 아니라 맹그로브가 자라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서나 뿌리 뽑히고 불태워지고 불도저로 파헤쳐졌다.”(15)

 

첫 단추는 새우양식업이었다. 원래 맹그로브 숲은 새우의 천연 서식지이다. 먼 바다에서 태어난 새우 유생은 맹그로브가 우거진 연안으로 이동하여 다 자라 허물을 벗고 다시 먼바다로 나갈 준비를 갖출 때까지 맹그로브 숲의 뒤엉킨 가지 사이 보금자리에서 먹이를 얻으며 살아간다.”(51~52) 그러나 새우의 양식화가 성공한 이후 최적의 양식지로서 맹그로브 숲은 상업 자본의 무자비한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정부는 구색만 갖출 정도의 임대료에도 기꺼이 땅을 빌려줄 태세였고 새우 양식업자들은 약삭빠르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새우는 귀한 외화를 벌어들이는 효자 종목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당연히 새우 양식업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55)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개발도상국들이 이런 식으로 맹그로브 숲을 파헤쳤다.

 

사정은 부유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가난한 국가에서는 수산양식업이 맹그로브를 감소시킨 기폭제였다면, 부유한 국가와 그 연안 지역에서는 부동산 개발이 원흉이었다.”(107) 리조트와 카지노, 요트 선착장과 골프장 같은 위락 시설을 만들기 위해 포클레인과 불도저로 맹그로브 숲을 밀어내고 있다. 또한 토목공사로 인한 침전물이 주변으로 퍼져나가 주변 생태계마저도 위협하고 있다.상어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새끼 서식지에서 갓 태어난 레몬상어의 5년 생존율은 노스비미니의 준설 작업과 간척 사업의 폐해로 30퍼센트나 감소되었다.”(110) 댐과 보를 건설하기 위해 강바닥을 파헤치고, 골프장과 아파트를 짓기 위해 그린벨트를 훼손하는 우리 모습이 비춰진다.

 

이처럼 맹그로브 숲에 대한 공격의 결과는 생태계의 교란과 환경의 파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맹그로브 숲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던 공동체의 파괴로 나타난다. 안전, 식량 공급, 생계의 원천. 이 모두는 맹그로브가 해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서비스다. 이들에게 맹그로브의 파괴란 표면적인 파장 효과에 머무는 간접적인 환경 손실 정도가 아니다.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산산조각 나고 사람들은 도시로의 이주를 강요당한다. 건강과 복지도 악화된다. 그러나 생태계의 훼손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회적인 손실도 세계 경제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외부 효과에 속한다.”(209)

 

물론 뒤늦게 맹그로브의 가치를 깨달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맹그로브 숲을 복원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한번 무너져 내린 생태계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자원 등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역시 4대강 사업 등으로 인해 망가져가고 있는 하천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 이상의 비용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의 건강이든 자연의 건강이든 망치기는 쉬워도 회복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생태적 가치에 대한 전지구적 각성이 필요한 이유다.

 

이리안자야의 아스마트족 신화에는 외로운 창조자가 벗을 만들고 싶어 맹그로브 뿌리로 인간의 형상을 조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의 외로움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래서 맹그로브를 베어 그 나무줄기로 북을 만들어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간 형상을 한 조각이 생명을 얻어 춤을 춘다.”(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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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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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이라는 제목을 처음 듣고 내가 상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만일 음악을 위한 철학혹은 미술을 위한 철학과 같은 책이 있다면, 과연 어떤 내용을 담게 될까. 아마도 음악이나 미술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여러 개념들을 소개하고 이 개념의 기원이나 배경, 혹은 적용 방식 등등을 엄밀히 검토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와 성찰을 도모하는 책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건축을 위한 철학역시 건축물이나 건축가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을 소개하고 꼼꼼히 다뤄주는 책이 아닐까.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건축물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선을 얻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처음 접하며 이런 질문과 기대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헛된 기대였다.

 

이 책은 건축을 위한 철학이라기보다는 건축 전공자를 위한 간략한 철학사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책의 내용이 대부분 고대의 플라톤에서부터 현대의 분석철학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의 주요 인물과 사상의 핵심 개념을 설명하는데 할애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의 목적은 독자들건축가, 건축 실무자, 학생에게 설계 작업에서 맞닥뜨리는 더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들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다.”(7)라고 저술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혹시나 해서 원제를 살펴보니 'Philosophy for Architecture'가 아니라 'Philosophy for Architects'로 정확한 제목은 건축가들을 위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건축가들에게 철학사책이 필요한가? 그건 일차적으로 아카데미즘의 어떤 경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많은 현장 건축가들과 특히 학계의 건축학자들은 자신의 경력에 보탬이 되려면 철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전문 용어를 사용해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6) 이는 건축에만 국한된 사정은 아닐 것이다. 철학은 고도로 추상화된 사유를 다루는 학문이기에 어떤 분야든 추상화된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철학의 용어들을 빌려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런 분위기에서 건축을 전공하려는 사람들은 철학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들과 자주 마주치게 될 터이기에, 철학사에 대한 일별, 특히 건축에서 자주 다루는 철학 사상에 대한 일별은 연구를 위한 논문이나 저서를 읽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의도를 염두에 둔다면 이 책은 매우 훌륭하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굵직한 사상가들과 현상학,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철학 등 현대 철학에서 주로 다뤄지고 있는 주요한 분야들의 핵심을 간결한 언어로 요약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치고 이렇게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배경과 핵심 개념에 대한 친절한 소개는 일반인들의 교양 철학서로도 손색이 없다. 물론 각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이 보기엔 이러한 간략한 설명이 너무 피상적이고 때론 편파적이며 심지어 왜곡의 소지도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자존심을 세우는 전공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또 한 편으론 전공자라면 그래야 한다고도 생각된다. 자신이 전공한 분야를 엄밀하게 다듬고 옹호하는 것이 전공자의 임무이기도 하므로.) 그러나 이 책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어떤 목적으로 씌어졌는지를 떠올린다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하다.

 

이 책의 또 다른 의도는 철학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 건축 이론을 이해하는 데 있다.이 책에서 선택한 철학적 견해들은 현대 상황과 관계가 있는 건축 및 건축 이론 문제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7) 저자는 의도에 맞게 건축과 관련성이 있는 철학 사상을 선별한 후 친절하게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건축 이론을 풀어나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팔라디오 설계의 결정들은 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추론을 일관성 있게 따랐다”(52), “르네상스 이론가들은 신이 어떤 질서를 도입했고, 건축가는 신성한 동료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비례를 사용함으로써 거기에 동참한다고 믿었다”(88), “역사철학의 특정 입장이 20세기 모더니즘 건축 이론의 기술을 가능케 한 지적 틀을 직접 제공했다”(130), “노르베르크-슐츠가 소개한 건축에 관한 하이데거의 견해는 공간과 장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라는 또 다른 측면에서 그 시대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191~192)

 

그러나 이 부분은 일반 독자로서 다소 아쉬움이 느껴진다. 건축사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전공자라면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철학-건축 이론의 연계에 실제 건축물까지 결합하여, ‘철학-건축 이론-건축물에 이르는 매끄러운 과정을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비전공자들은 그러기 어렵다. 플라톤의 경우 팔라디오의 빌라 로톤다의 도면을 그림으로 실어주었기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지향한 건축물이 어떤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지만, 그 외에는 구체적 건물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에 명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특히 모더니즘 건축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과 관련된 부분은 더욱 애매하게 느껴진다. ‘건축가들을 위한 철학이긴 하지만 일반 독자를 배려해 건물 사진 등을 보강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철학-건축 이론-건축물이라는 연계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저자는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비록 건축 이론가들이 다른 분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는 데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건축 이론은 외부와 격리된 채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견해는 종종 다른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견해에 대한 뒤늦은 반응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건축 이론에서 장차 일어날 발전을 가늠하려면 현재의 철학적 환경을 살펴보아야 한다.”(262) , ‘철학-건축 이론-건축물이라는 연계가 단순한 연관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선후 혹은 인과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꽤 재미있게 들리는데,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형이상학과 같이 철학 고유의 질문을 다루는 분야가 아니라면 개별 철학은 대상이 되는 분야의 뒤를 쫓아가는 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심리 철학은 심리학의 새로운 발견에 따라 매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철학은 과학의 시녀라는 말은 철학의 이러한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저자의 진술에는 이 관계가 뒤집혀져 있다. 철학이 앞장서고 건축이 뒤따른다. 과연 그런가? 만일 그렇다면 건축이란 분야는 다른 분야와 달리 어떤 특성을 가지기에 그렇게 된 것인가? 몇 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천천히 고민해 봐야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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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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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과 부제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지난 2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미국 민주주의가 점차 쇠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민들이 공적 영역에서 함께 살아갔던 정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422) 저자의 용어를 따르자면, 대중민주주의가 점차 개인민주주의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로 인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두 저자는 400여 페이지에 걸쳐 미국 정치를 꼼꼼하게 검토함으로써 이 문제에 답하고 있다.

 

먼저 대중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대중민주주의는 엘리트들이 정치의 장을 장악하기 위해 비엘리트들을 동원해야 했던 방식이다.”(9) 행정과 조세, 그리고 국방이라는 국가의 기본 구성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민들의 대규모 동원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국가의 요구에 단순히 순응하고 따르기만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헌신에 대한 대가로 투표권을 비롯한 다양한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이렇게 시민권이 확립되고 민주주의가 제도화된다. 이는 단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미국의 경우뿐만 아니라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가, 즉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이러한 의미의 시민권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보여준다.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없이도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고안됨으로써 시민들은 정치의 무대에서 조연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정치 엘리트들이 의도적으로 시민을 배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시민권의 쇠락은 정부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높이려는 노력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89) 행정, 조세, 국방 등 국가 통치의 주요 분야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국가는 시민들의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지지에 의지하지 않고도 운영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익 단체 및 시민 단체와 같은 다양한 이익 단체의 활성화는 오히려 시민은 역할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많은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던 과거의 운동 방식과 달리, 관료들에 대한 로비와 법적 소송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방안들이 마련되자 정치의 영역에서 대중의 역할이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각종 단체들은 소규모의 인원만으로 충분히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집단행동을 조직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목적을 지지하고 후원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선전활동을 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명분 아래 공익단체는 특정한 누구와도 거리를 두었다.”(149) 적극적이고 안정적인 지지자들을 확보할 필요가 감소하자 단체의 유지가 더 큰 목적으로 대두된다.단체들이 공공 기관과의 안정적인 관계와 조직의 하부 기반을 유지하는 데 투자하다 보면, 회원들의 이해관계를 강력하게 대표하는 것에서, 조직 그 자체를 건사하고 당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단체의 에너지를 전환할 수밖에 없다.”(206)

 

나아가 다양한 이익 단체들의 대립은 사법 권력의 확대를 가져온다. 이제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대중의 지지보다는 사법적 판단이 더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정치인들은 대규모 지지자들을 동원하기보다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목표에 집중한다. 오늘날 폭로, 조사, 기소라는 정쟁의 전술이 한때 선거 동원이 차지했던 정치의 중심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181) 사정은 이익 단체들도 마찬가지다. 의회나 선거 정치에서 경쟁자들은 이길 승산이 적은 지나치게 협소한 이익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토론장을 법원에서 발견한다. 법원에서는 판사만 설득하면 되기 때문이다.”(301)

 

이러한 변화가 야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정치의 영역에서 일반 대중들이 실종된다는 것이다. 로비나 소송은 시간적, 금전적 수고가 많이 요구되는 방법이기에 정치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한정된 계층, 즉 높은 교육 수준과 경제적 여건을 가진 중상 계급 이상을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 때문에 다양한 정치적 운동들이 소외 계급보다는 중상 계급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한때 정치·사회적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지지를 동원했던 가장 진보적인 정치 운동들조차 이제는 대중 정치의 장에서가 아니라 법원과 관료를 통해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이런 운동들의 목표는 중상 계급 지도부의 제한된 이해관계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328) 소외된 계급의 절실한 목소리는 정치의 영역에서 점차 소멸된다.

 

다시 말해 이제 더 이상 정치 영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던 시민은 없다. 단지 정부의 서비스를 받는 고객만이 있을 뿐이다. 행정 영역이 다양한 방식으로 민영화되면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제공되던 공적 혜택은 국민들 개개인의 사적인 권리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어 교육 바우처는 학교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함으로써 공교육에 대해 문제의식을 더 나은 학교를 찾는 일로 바꾸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대중은 시민이 아니라 개인 고객들의 단순한 집합이 되는 것이다.”(360) 바야흐로 탈정치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오늘날 통치의 기술은 공공 정책을 사적 선택으로 변형시키는 많은 수단들을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공 정책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은, 효율적인 거버넌스의 기술로서 권장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부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편리하다. 집단행동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든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편리함에는 대가가 따른다.”(425)

 

이와 같은 미국 정치사에 대한 통찰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매우 크다. 민주 정부 10년의 시기를 거치면서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고 이를 통해 다양한 시민 단체들의 정치 참여가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참여가 대중 정치의 활성화를 가져왔나 하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철탑 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외침은 더 이상 정치의 화두가 되지 못한다. 1987년 김대중의 여의도 연설과 같이 100만 명 이상의 대중들이 한 곳에 모여 정치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트위터 등과 같은 곳에서 던져지는 정치인들의 드립하나하나에 열광하거나 분노하고 말 뿐이다. 단지 정치인들의 트윗을 리트윗하거나 아무 효력도 없는 인터넷 청원서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을 과연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녕한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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