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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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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늘날 불평등은 더 이상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어떤 CEO가 수십억에 달하는 연봉을 받았다거나 퇴임 공직자가 법무법인에서 단 몇 달 고문 역할을 한 대가로 수억을 받았다는 기사는 이제 너무 흔한 얘기가 되어 버렸다. 물론 나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흔하디흔한 얘기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안드로메다 너머에는 이러저러한 종족이 살고 있단다 같은 수준의 이야기인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느 책에선가 박정희는 수입 가전제품을 사용하고 있지 않나 확인하기 위해 고위 공직자의 집을 불시방문하기도 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한 세대가 지나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된 지금, 석 달간 고문 역할을 한 대가로 15천여만 원의 월급을 받은 일은 관례라는 이름표를 달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넘어간다.

 

다시 한 번,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건 아마도 ‘1 99’ 혹은 ‘0.1 99.9’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숫자들은 불평등의 간극을 보여주며, 한줌도 안 되는 소수의 인간들이 지구상의 부를 대부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의 부당함을 강조하기 위해 흔히 언급된다. 그러나 저 숫자들이 말해주는 또 하나의 진실은 ‘99’ 혹은 ‘99.9’에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고만고만하고 엇비슷한 환경과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다. ‘99’ 혹은 ‘99.9’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99’ 혹은 ‘99.9’에 속하는 사람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1’ 혹은 ‘0.1’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TV 드라마나 영화 속의 이야기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는 불평등을 용인한다기보다는 불평등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라는 물음은 객관적 수치로 측정된 사회를 보면 얼핏 당연한 문제제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일상인들의 현실 속에서 실감하기 힘든 질문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진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21~22) 이는 오늘날 너무도 당연한 현실이며, 지난 5년 동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 뻔히 보이는 정당의 후보가 지난 대선에서 당선된 현실을 설명해 준다. 다시 강조하자면, 오늘날 불평등은 더 이상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생존경쟁의 몸부림과 일상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소비라는 유혹이다. 바우만은 이를 함정에 빠져 버린 세계라고 부른다.함정에 빠진 사람들에게, 세계는 의심과 용의자들로 가득 차 있는 곳으로 비춰진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전부 혹은 거의 전부는 무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유죄인 반면, 무죄 선고는 추후 통지가 있기 전까지는 언제든 상소나 즉각 파기의 가능성이 있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는 임시변통일 뿐이며 요구 즉시 탈퇴 가능을 명시해놓은 조항을 동반한다. 헌신은 무모한 것이 된다. () 우리는 안전을 위해 인간의 선의와 친절보다는 입구에 있는 CCTV, 무장경호원에 의존한다.”(105)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세계, 친절한 협력, 상호 관계, 공유, 상호 신뢰, 인정, 존중 등을 바탕으로 하는 공생에 대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갈망을 경쟁과 경합으로 대체한”(109) 세계, 즉 파국, 바로 이것이 우리가 처한 문제이다.

 

이제 궁금한 것은 이러한 파국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우만은 이러한 세계에 대해 어떠한 대안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결론이라 강조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대안 아닌 대안,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여러 세계 가운데 가장 맹목적인 것으로 규정할 세계에 살면서도 그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의 존재다.”(113)라는 말을 들으면,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보다는 어떤 무기력이 느껴지고, 그런 이들의 사례로 진실을 외쳤으나 외면당하고 말았던 여러 예언자들의 이름이 나열될 때는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일까, 위기가 도래했을 때, 경고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라.”(87)라는 바우만의 경고도, 그저 씁쓸한 자조적 독백으로 들린다. 짧지만 우울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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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 DNA에서 양자 컴퓨터까지 미래 정보학의 최전선 카이스트 명강 1
정하웅.김동섭.이해웅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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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카이스트에 재직 중인 세 명의 교수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과학의 최신 성과를 소개한 강연을 모은 것이다. 세 교수의 전공은 복잡계 네트워크, 생명 공학, 양자 역학으로 각각 다르지만 이들이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정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묶인다. 이는 아마도 강연을 기획한 측에서 강연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주제를 한정해 준 것이리라. 이러한 기획 의도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분야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음과 동시에, 또한 폭넓게 분화되어 가는 과학의 각 분야들이 어떻게 서로 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가장 한 주제를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들이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를 가질만한, 가져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1부는 정하웅 교수가 복잡계 네트워크를 소개한다. 복잡계 네트워크란 쉽게 말해 다양한 점들이(복잡계) 서로 연결되어(네트워크)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뇌(뉴런들의 연결), 사회(인간들의 연결), 인터넷(컴퓨터들의 연결)과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이러한 구조로 이루어진 대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그 각각의 대상이 개체()들의 총합 이상의 어떤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정하웅 교수는 이러한 복잡계 네트워크가 왜 중요한지, 복잡계 네크워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쉽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전에 바라바시의 <링크><버스트>를 읽은 적이 있기에 더욱 쉽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뉴런 네트워크로서의 와 그 결과로서의 마음에 대해 관심이 있는데, 다음 카이스트 명강 주제가 라고 하니 더욱 기대된다.

 

2부는 김동섭 교수가 생물학에서의 정보 개념을 다룬다. 이는 가장 신비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을 정보 전달과 발현의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즉 분자 생물학의 중심 학설(Central dogma)‘DNA RNA 단백질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각각 단계에 담긴 정보가 어떻게 보존되고 전달되고 발현되는지에 대한 연구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는 오늘날 대단히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되는데, ‘본성과 환경이라는 오래된 논쟁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이나 인간 복제, 새로운 생명의 창조와 같은 윤리적 논란을 안겨줄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3강에서 언급한 후성 유전체에 대한 설명, 즉 후천적 환경에 따라 유전 정보가 변형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런 논쟁과 논란에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줄 연구라 더욱 관심이 간다.

 

3부는 이해웅 교수가 들려주는 양자 정보학에 대한 이야기다.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양자 역학과 관련된 주제이기에 세 강연 중 가장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전적 암호 체계에서 양자 암호 체계로 넘어가는 과정은 그나마 쉽게 이해될 수 있으나, 3강에서 다루고 있는 양자 얽힘과 이를 활용한 양자 공간 이동 및 양자 정보 전송, 그리고 양자 컴퓨터에 이르면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양자 역학과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읽을 때마다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고 애매하게 남아있는 부분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해웅 교수의 말처럼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이론인 것이 사실이고, 또 양자 역학을 이해한다고 해서 생활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기필코 이해해보리라 하는 투쟁심이 솟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런 강연 혹은 이런 책들이 얼마나 필요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과학에 관심 있는 인문학 전공자로서 평소 가지고 있던 불만 중 하나는 과학 분야에 대한 초보적인 수준에서부터 점차 심화되는 수준에 이르는 체계적 커리큘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아마 대학이 이런 과정을 제공해줄 터이지만, 다시 대학에 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고 수능을 다시 보지 않는 이상 문과계열 학생은 이과계열로 편입할 수도 없다. 그러다보니 결국 대중 강연이나 사설 아카데미와 같은 곳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데, 인문학과 관련된 강연은 수두룩하지만 과학을 다루는 강연은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설혹 과학이 주제로 등장한다고 해도 세부 분야나 이론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본 과학일 뿐이다. 결국 대학에서 이과계열의 교육을 받지 않은 이상 현대 과학 이론을 뒤쫓아 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과학자들의 역할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간혹 트위터나 블로그 등을 돌아다니다 보면 인문학자들이 과학을 제멋대로 재단한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과학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져대는 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따져본다면 우리나라의 과학 전공자들이 자신이 연구하는 내용을 대중들에게 알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인문학보다 어렵다. 이는 두 분야의 논문을 함께 펼쳐놓고 비교해본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일반 대중과 전공 연구자 사이의 중간 다리 역할이 더욱 필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다양한 수준의 교양 과학 서적이나 대중 과학 강연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 이런 기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기에, 나와 같은 사람들은 이것저것 뒤적이며 미로 속을 헤매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출간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카이스트 명강>이 지속되고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과학 대중화라는 새로운 장이 열리길 기대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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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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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혹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가 요즘 열중하고 있는 트위터의 단평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으며, 각종 언론에서도 그의 트윗을 단골처럼 인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말하자면 황우석과 디워 논란, 그리고 촛불시위와 같은 굵직한 상징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진중권은 그의 책 제목처럼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네임드가 그러하듯 여기에도 호오의 평가가 극명하게 교차한다. 아니 어쩌면 그 어떤 네임드보다도 극단적으로 평가가 갈리는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단정적 어조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주 단정적 표현을 사용하여 사태를 재단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아마도 그가 사태를 단순화하여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트위터 상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곽노현 사건이나 공지영의 의자놀이사건이 대표적 경우다.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이러이러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봐야 한다. 혹은 이렇게 보는 것이 맞다.’ 물론 그의 단정은 그가 자주 언급하는 상식이라는 기준에서 나오지만, 각자의 상식은 다르기 마련이므로 찬반이 분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발언마다 입장마다 다양한 찬반과 논란을 불러오는 그이지만 단 한 가지 분야, 즉 그의 전공인 미학과 관련해서는 (물론 내 눈에 띄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논란들이 별로 없다. 진중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변희재조차도 대학 시절 <미학 오디세이>로 공부했고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이니 말이다. 이건 좀 재미있는 건데, 매번 진중권에게 전문가도 아니면서이러쿵저러쿵 떠든다고 비난하는 변희재가 자신의 전공이기도 한 미학과 관련해서 왜 아무런 말을 안 하는지 궁금하다. 서로가 전문가이기에 오히려 할 말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나름 추측해 본다면, 그의 미학 책들에는 전공자의 조심스러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 <미학 오디세이> 삼부작이나 <서양미술사> 삼부작과 같은 책들의 경우 특유의 단정적 어투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정 입장을 강하게 옹호하기보다는 경합하는 다양한 입장들을 세심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자신이 선호하는 해석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타인, 즉 권위 있는 작가나 이론가의 입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마도 그 책들이 자신의 특정한 미학적 입장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개하기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개론서 혹은 입문서의 저자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그 역할에 충실하게 임하는 저자의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이 책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에서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현대미술을 읽는방법을 소개한다. 보는이 아니고 읽는인가? 저자가 제시하는 현대미술의 키워드는 비평이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미술을 비평의 시대로 특징짓는다. 오늘날 비평은 작품 자체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된다. 현대미술은 예술의 정의자체를 주제화하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언제 예술인가?”로 바뀌었다.”(5)

 

언제 예술인가?” 이 물음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일반적으로 비평이란 말 그대로 어떤 작품을 평가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좋은 작품 나쁜 작품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묻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물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물음의 대상, 즉 작품이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 비평이란 언제나 사후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제 예술인가?”라는 물음은 이 관계를 뒤집어 놓는다. 이제 어떤 것이 작품인지 아닌지를 비평이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현실에 대한 이론의 우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 점이 궁금했다.

 

먼저 상황을 유추해 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개념은 폭발적으로 확장된다. 이는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기존의 미술 이론들로 포괄할 수 없는 각양각색의 예술 작업들이 전개되었고, 이제 비평가들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평가하기 이전에 도대체 그것이 작품인지 아닌지를 물어야 했다. 여전히 분명한 미적 기준을 고수하려 했던 평론가 그린버그는 형식주의 비평을 확립함으로써 이 상황을 통제하려 하였다.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1960)를 쓴 것도 실은 당시의 미술이 자신이 설정한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모더니즘의 원리를 다시 한 번 명확히 천명해둠으로써 미술이 더 이상 자신이 설정한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막으려는 제스처였다.”(26) 그러나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그린버그는 비평 활동을 멈추게 된다.

 

미술의 개념이 폭발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은 잭슨 폴록이었다. 캔버스 위에 단지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 같은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새로운 미국 회화의 본질은 추상인가, 아니면 표현인가?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work)’인가, 아니면 과정(process)’인가?”(48) 이 책의 목차에 열거되고 있는 여러 다양한 미술 사조들, 즉 추상표현주의부터 앵포르멜, 색면추상, 탈회화적 추상,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팝아트,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해프닝, 플럭서스, 리히터의 작품, 신표현주의 등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자, 이 갈래길에 대한 선택이 된다.

 

이처럼 기존의 이론으로 포괄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처음 반응은 기존 이론을 보다 확장하여 이 이론에 최대한 포섭한 후, 포섭되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린버그의 노력이 바로 이러한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포섭되지 않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기존 이론을 버리고 새로운 이론을 택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새로운 이론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이론들 간의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 예술인가?”라는 물음은 바로 이러한 이론들의 경쟁, 비평의 경쟁, 그리하여 미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비평 역할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정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언제 예술인가?”라는 질문에서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의 아이디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정상 과학과 이상 현상, 그리고 경쟁 이론의 경합과 과학 혁명의 완성까지 이르는 과정이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사와 유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비유가 허용된다면 현대 미술은 어디쯤에 와 있는가. 아마도 경쟁 이론의 경합쯤이 아닐까. 저자는 나가는 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세 이론을 소개한다. “‘확장된 장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로잘린드 크라우스), ‘연극성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더글러스 크림프), ‘알레고리 충동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크레이그 오웬스)이 그것이다.”(309) 물론 저자는 이 각각의 특성들이 서로 교차하는 공통성을 이룬다고 지적하지만 그 공통성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는 않는다. 항상 분명하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저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결국 미술을 이해하는 상식적 입장의 부재. 이것이 현대 미술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일 테고, 현대 미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애매함 때문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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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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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세넷의 책을 읽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동시에 괴로운 경험이다. 무엇보다도 세넷은 저명하고 권위 있는 사회학자이면서도 일반 독자들이 읽기 쉬운 글을 쓴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어려운 개념이나 이론들을 무턱대고 들이대지 않으며, 필요한 경우에도 충분한 부연 설명과 사례를 덧붙여 독자를 배려한다. 저명한 학자들의 책을 읽어본 이들은 쉬운 말로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는 저자가 얼마나 고마운지 동감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세넷은 다양한 분야와 사례, 이론들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저자이기도 하다. 그가 현란하게 풀어내는 다양한 생각거리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은 무척 힘겨운 일이며, 그가 보여주는 지적 폭넓음에 기가 죽기도 한다. <투게더> 역시 세넷의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세넷은 오늘날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 협력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모색한다. 이 질문은 다시 세 가지 세부 질문으로 분화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어떠한 사회인가?’, ‘이런 사회에서 협력은 왜 약화되는가?’, ‘그렇다면 협력을 복원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 우리가 현재 처한 조건은 무엇인지 파헤친 후, 이러한 조건이 야기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식을 따라가고 있다. 이 질문들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자.

 

먼저 현대 사회는 어떠한 사회인가? 그가 진단하는 현실은 개개인들의 개별화와 고립화를 뜻하는 사일로 효과silo effect’라는 표현으로 압축될 수 있다. 사일로 효과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지나친 의존, 단기적이거나 임시적인 노동 조건의 증가, 그리고 소비 중심의 문화적 획일화가 가속화되며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테크놀로지는 저자 자신이 구글웨이브의 경험을 통해 설명한 것처럼 정보의 공유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정보의 공유와 소통과 분명 다르다. 정보 공유는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는 훈련인 반면, 소통은 말로 표현된 것 못지않게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에도 관련된다. 소통은 제안과 함의의 영역을 파헤친다.”(61) 즉 더 많은 정보가 심층적 관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로 대표되는 현대적 관계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서 사회적 관계 맺기는, 특별한 요구사항도 없고, 직접 만남보다 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친구들이 어디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를 보고, 그에 대해 한두 마디 코멘트를 보내기는 하겠지만, 무슨 일이 있는지 깊이 개입할 필요는 없다.”(233)

 

이러한 피상적 인간관계는 노동 조건의 변화와도 그 궤를 같이 한다. 노동 유연화라는 말로 대표되는 임시적이고 단기적인 일자리의 증가는 전통적인 협력의 장소인 작업장에서의 협력을 약화시킨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직장을 자주 바꿀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어떤 조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면 그 조직에 대한 지식이나 헌신 모두 약해진다.”(30) 한 직장에 오래 머문다고 해도 단기적인 프로젝트 팀 제도를 권장하는 현대적 경영 현실은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애착이나 관심을 가질 기회를 주지 않는다. 팀워크를 강조한다고 하지만 팀워크란 그저 팀원들이 어디서든 누구하고든 실행할 수 있어야 하는 휴대용 사회적 행동”(270)을 의미할 뿐이다.

 

이와 같은 피상적 인간관계는 결국 고립되고 개인주의적인 인간들로 귀결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특별한 성격 유형, 즉 요구가 많고 복잡한 사회적 참여 형태를 감당하지 못하여 움츠러드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 출현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려는 욕구를 잃고 비협동적 자아가 된다.”(288) 사회 속에서 서로 고립된 개인들은 결국 자신에 대한 애착과 타자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게 되고, 이는 결국 소비를 통한 자기만족의 추구와 타자에 대한 경계심 혹은 적대감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점은 특히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데, 명품에 대한 열광이나 점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왕따 현상이 바로 그가 지적하는 현실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질적 불평등이 서로를 고립시키고 단기적 노동이 서로의 사회적 접촉을 더욱 피상적으로 만들며 타자에 대한 불안감을 발동시키게 되자, 좁혀지기 힘든 차이를 다루는 기술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복잡한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필요한 협력의 기술을 잃어버리고 있다. () 인간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이런 자원이 현대 사회에서는 소진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32)

 

결국 세넷이 지적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는 위와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서 열거하는 현대 사회의 특징들은 후기자본주의를 특징짓는다고 익히 거론되던 것들로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특징들이 반자본주의 진영, 즉 소위 좌파라 불리는 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지적한다. 오늘날 급진적 엘리트들과 노조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타인에 대한 피상적 인식에 기반하고 있으며, 피상적 인식은 상대적으로 목표와 이를 위한 규율을 중시하는 하향식 연대로 나타난다. 그리고 개혁이 하향식으로 시행되면 평등성은 무시된다. 평등성은 약해지고, 연대는 추상명사가 된다.”(93) 이 말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침묵하는 우리의 정규직 노동조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이 해야 하는가? 여기서 세넷의 대답이 재미있다. 그는 공동체를 하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1900년에 파리에서 자료 형태로 전시된 사회복지관, 공동체적 조합, 작업장이 그 대안이다. 이런 그룹의 조직가들에게 분명히 신념과 헌신이 모두 있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소명의 의미는 달랐다. 공동체 자체가 소명이 되었다. 그 속에서 협력은 목적 그 자체와 비슷한 것이 되어, 공동체에 살거나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아를 충족시켜준다.”(415~416) 물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 것인지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함께 모여 지지고 볶다보면 무언가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최소한 서로 즐겁게 지낼 수는 있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서 느끼는 차이, 까다로움, 모순점 들이 (그런 것들을 내가 당신에게서 느끼는 것처럼) 우리를 함께 어울리게 해준다. 우리는 서로와도 다르고 자기 자신 속에서도 분열되어 있다. 그러니 이야기해보자.”(208)

 

이러한 결론은 그가 책 전반에 걸쳐 강조해 온 대화적 대화를 염두에 둔 해결책이다. 대화적 대화로 합의를 공유하는 데까지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인식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는 있다.”(48) 세넷은 이러한 대화적 대화의 복원, 사회적인 것의 복원, 공동체의 복원에 대해 말한다. 물론 스스로는 이러한 해결책이 낭만적 사고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지만 다소 낭만적으로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낭만적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지적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에 깊이 공감한다면 그의 대안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누가 알겠는가, 그가 약속하는 진지한 즐거움을 정말로 되찾게 될지.

 

프로이트는 누군가 질 높은 삶을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묻자 사랑하고 일하라로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조언에는 공동체가 빠져 있고, 사회적 팔다리는 절단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는 공동체적 삶을 하나의 소명으로 끌어안았지만, 그녀가 말한 공동체는 대부분의 빈민들이 직접 경험하는 종류의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것은 이상화된 정치적 공동체, 참여자들이 모두 동등한 입지에 서있는 공동체였다. 우리는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빈민이나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그 한계는 정치적 한계이고 경제적인 한계이다.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의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432)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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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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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접해본 역사책의 서술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알려진 사건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다. 독자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바로 뛰어들어 흥미롭게 당시의 사건들을 목격한다. 행위자나 등장인물의 판단에 공감하거나 반성하면서 어떤 교훈을 얻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역사책들이 바로 이런 방식을 띠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다. 해당 시기와 관련된 온갖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고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독자 스스로 당시를 총체적으로 구성해보길 요구한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생활양식이나 법체계 등에 간혹 흥미를 느낄 수는 있지만 역사연구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의 독자는 대체로 지루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두 가지 방식이 하나의 역사책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이야기 중심의 서술이라 할지라도 문화적 배경들이 덧붙여질 때만 사실감과 흥미가 더해질 것이고, 역사적 사실의 나열에도 중요 인물과 관련된 사건이 빠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 두 방식이 상호 조합됨으로써만 특정 시기에 대한 총체적 시대상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 역사책마다 무게 중심을 어느 쪽에 두는가는 구분될 수 있는 것 같다.

 

테오도르 몸젠의 <몸젠의 로마사 1>은 후자 쪽에 보다 무게 중심이 놓인 책이다. 어쩌면 이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대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1권은 이탈리아 반도 지역에 거주하던 최초의 종족으로부터 로마 초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당연히 충분한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최초로 이탈리아로 이주한 인류에 관해 우리는 어떤 정보도, 심지어 전설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9) 이런 상황에서 간헐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로 당시의 시대를 복원해 내기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당대의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대한 역사는 고고학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주어진 정보를 최대한 꼼꼼하게 기록한 후 정보들을 교차 대조하여 빈 부분을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다.

 

몸젠이 보여주는 고고학의 주된 자료는 언어다.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신뢰할 만한 유일한 전승의 원천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에서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민족의 언어들이다. 민족의 성장과 함께 만들어진 언어에 각인된 민족 성장의 흔적은 후대 문화에 의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11) 그는 고대의 비문들에 남겨져 있는 언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 서로 간의 영향들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초기 종족의 기원과 구성을 재구성해 낸다.

 

이러한 분석방식은 그 자체로는 매우 흥미롭다. 주변국과의 언어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이동 경로나 영향력을 추적하거나 특정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고 있는지를 따져봄으로써 당시의 사상이나 생활양식을 복원해 내는 방법은 마치 추리소설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사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라틴어를 교양으로 배우는 교육 체계를 가지고 있거나 유럽의 나라들처럼 라틴어에서 기원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 재밌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끝없이 이어지는 낯선 어휘들의 나열은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이런 부분이 많았던 책의 전반부에서 페이지를 넘기기 쉽지 않았던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로마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후반부는 보다 재밌다. 몸젠이 전하는 초기 로마는 자유분방함보다는 완고하고 경직된 체제라는 인상을 준다. 물론 시민의 자유는 폭넓게 보장되었다.로마 공동체는 이렇게 통치되었다. 로마 시민은 자유를 누리는 한편 법에 복종할 줄 알았으며, 일체의 미신을 단호히 거부했다. 법 앞에서, 그리고 그들 상호 간에 무조건적 평등이 보장되었으며,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외국에 대해서도 관대하고 개방적이었다.”(116) 그러나 궁극적 법률 토대는 언제나 국가다. 자유는 다만 가장 넓은 의미에서 시민권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모든 사유재산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공동체가 각 개인에게 양도한 것이다. 계약은 오로지 공동체가 그 대리자를 통해 계약에 증인으로 참석할 때만 유효하다. 유언은 오로지 공동체가 이를 승일할 때만 유효하다. 공법의 영역과 사법의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나뉘어 있었다. 국가에 대한 범죄는 직접 국가의 법정으로 끌려와 언제나 사형으로 처리되었다.”(226)

 

이러한 경직된 체제는 종교와 예술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희랍에서 종교가 예술적, 사변적 이념을 촉진하고 우주론과 인간관의 확장을 가져온 데 반해, 라티움에서 신의 개념은 매우 구체적이었으며, 굳이 예술과 시인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분명했다. 라티움 종교는 상상 예술과 거리가 멀었으며,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로마 종교는 두 개의 머리를 한 야누스 인의 경우를 제외하면 신의 특정 모습을 그리지 않았는데, 바로(Varro)도 대중이 인형과 조각 따위를 원한다며 조롱했다. 이렇게 로마 종교에 창조적 사유가 결여되었던 것은 다시 로마의 문학과 사색이 완성을 보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249)

 

추측컨대 로마가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완고하고 경직된 체제, 혹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유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 아닐까. 이후의 과정들을 더 읽어보아야 하겠지만, 지금까지의 인상으로 로마는 국가 혹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사회 체제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이러한 태도가 아직 발전되지 않은 공동체들 사이에선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으로 출간될 이후의 책들을 통해 확인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전반부를 다소 지루하게 읽어나가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역사서라는 홍보 문구에 대해 다소 의아했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읽으며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앞부분을 뒤적이자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보석 같은 문구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전이라 불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역사가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는 민중의 삶을 모두 드러내 보일 수는 없다. 그저 전체의 발전을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개인의 창조와 행위, 사유와 문학은, 물론 이런 것들도 역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역사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대략적으로나마 음미해보려는 시도는, 특히 역사적으로는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시대를 다루는 경우에는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와 다른 고대 문명인들의 생각과 감정, 마치 깊은 심연처럼 놓인 차이점을 우리가 이런 영역에서나마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민족 이름들과 흐릿한 전설은 한때는 푸르렀으나 이제는 우리가 간신히 손에 넣은 마른 잎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209)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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