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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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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을 전공한 이들에게는 그리스라는 이름이 주는 어떤 아우라가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나라이자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르지 않는 지적 샘물과도 같은 곳이 바로 그리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문학을 전공하거나 문학에 관심 가진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리스는 또한 온갖 상상력의 원천인 신화의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문학의 발원지, 즉 현대 인문학의 기원으로써 그리스라는 이름이 주는 고유한 무게감 같은 것이 있다. 그리스를 문명의 배꼽이라 지칭한 이 책의 제목 역시 이러한 시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일 테다. 물론 이런 식의 설명이 대단히 서구중심적인 시각이라는 지적도 있고, 기꺼이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서구중심의 교육 체제에서 공부를 해온 이들에게 이러한 느낌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터, 이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서구중심성에서 벗어난 동양적인 혹은 우리만의 고유한 어떤 것을 제시해주길 바랄 뿐이다.

 

어쨌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로 들어서게 되는 출입구는 대개 철학이거나 신화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박경철은 특이하게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창을 통해 그리스와 조우한다. 20대의 어느 날 책방에서 우연히 접한 카잔차키스의 책을 읽고 불도장에 찍힌 듯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작은 불씨가 큰 산을 태우듯,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가슴에는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불이 일었습니다. 마침내 그 뜨거운 불길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5~6)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한 권의 책의 경험. 그 후 카잔차키스의 모든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또 읽으며 그의 나라, 그리스에 대한 꿈을 키워오다 마침내 20여 년이 지난 지금 카잔차키스를 길동무 삼아 그리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 여행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의 문명과 역사를 다루면서 시간 중심의 연대기적 서술이 아닌 공간 중심의 서술을 시도하겠다고 언급한다. 왜 공간 중심의 서술이 필요한가?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인식하건 못하건 공간은 중요하다. 구체적인 삶의 자취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고스란히 묻어 있기 때문이다. () 사정이 이러한데도 연대기의 틀을 고수한다면 왕조나 지배 계급을 중심으로 한 주류의 이야기에 머물기 십상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에 명멸했던 그 모든 문명이 그들 주류들의 몫이라 잘못 전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명이란 지배 계급만이 아니라 허리 휘도록 무거운 돌덩이를 등짐지어 나르며 그 위대한 문명의 탑을 쌓아 올린 이름 모를 민초를 빼놓고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법. 문명의 정통성이 바로 민초들에게 있기 때문이다.”(17~18)

 

아마 저자의 의도는 이런 것이리라. 시간에 따른 연대기적 서술이란, 결국 몇 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다음 해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났고 라는 식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역사를 관통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나열이 될 테고, 그런 사건들의 주인공은 대개 왕조나 지배 계급의 인물들이기에 주류의 이야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공간 중심의 서술은 각 지역의 고유한 환경과 지정학적 위치를 중심에 놓고 역사와 문명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실제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 민초들의 삶과 밀착해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 대답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역사란 글로 남겨진 과거의 사료들을 바탕으로 재구성되는 것이고, 역사 구성을 위해 활용되는 자료들이란 대부분 스스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지배 계급의 시각이 반영된 것일 수밖에 없다. 특히 고대사는 이 한계가 더욱 분명하다. 이미 지나가버린 2000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그 지역의 삶의 양태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을 것이기에, 지금 그 지역을 직접 눈으로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지배 계급의 서술 사이사이에 감추어진 당시 민초들의 삶을 복원하기란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물론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경험은 관련 역사에 대한 보다 세밀한 이해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코린토스나 스파르타와 같은 지역이 가진 천혜의 자연 환경을 직접 눈으로 봄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이나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그러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다 자세하게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역사적 정보에 공간에 대한 정보를 추가하는 일로도 충분할 테고, 이러한 시도 자체로 당시 민초들의 삶과 밀착된 역사를 새로이 발굴할 수 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저 연대기적 서술은 이미 여러 종류의 책으로 출간되어 있기에 그들과 중복을 피하고, 기행문이라는 형식을 살리기 위해 공간 중심의 서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굳이 민초들의 삶의 복원이라는 거창한 의도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책을 읽는 내내 유지된다. 저자는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아, 코린토스, 네메아, 아르고스, 스파르타 등을 방문한다. 그냥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우물 하나에도 이렇게 신화와 전설이 있고, 역사가 깃든 곳이 그리스”(62)이기에, 저자는 자신의 발길이 닿는 곳 하나하나의 역사를 친절하게 들려준다. 그러나 저자는 책의 2/3 가까운 분량을 할애하며 이미 호메로스나 여러 비극 작가들의 책을 통해 널리 알려진 역사와 신화들을 재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단지 다른 책에서는 시간과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이 해당 지역에 맞게 발췌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미 그리스 신화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직접 방문의 경험이 뭔가 새로운 해석과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는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저자는 여행 중 만난 여러 그리스인들과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그리스인들의 특질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는 신화 등을 통해 이미 알 수 있던 것을 재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기에 이로부터 파생된 우정이나 용기를 인간의 탁월함의 징표로 여긴다는 것은 당시의 사정을 안다면 굳이 그리스를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풍부한 자원도 없는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소규모 도시국가들이 서로 반목하고 있는 사정이라면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무엇을 공동체의 미덕으로 삼아야 할지 추론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이처럼 거창한 의도에 대한 의구심을 잠시 제쳐놓고 글을 읽는다면 매우 훌륭한 교양도서로써 이 책의 역할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현장에 대한 생생한 설명과 신화에 대한 친절한 해설은 이 책이 가진 미덕이다. 그리스 고전들을 직접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이 책이 제공하는 풍부한 정보와 해설은 원전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이런 점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 지도를 추가해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펠레폰네소스 반도 전체 지도와 코린토스 지역을 제외하곤 상세 지도가 제공되고 있지 않아 저자의 설명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총 열 권으로 출간이 기획되었다고 하니 다음 책에서는 이를 추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놓치지 않고 있는 문제의식 중 하나는 문명의 발전 조건에 대한 것이다. 어떤 사회가 자신들의 문화를 꽃피우고 융성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저자는 코린토스와 스파르타라는 양 극단의 사회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그 중간 어디쯤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과도한 부를 바탕으로 사치와 향락을 누리던 코린토스. 그러나 코린토스의 영화가 순간의 불꽃으로 끝난 데는 깊이 있는 문화가 없었던 점도 크게 작용하였을 터, 사치와 향락의 도시에 인간과 삶의 본질을 고민하는 철학자나 문인, 예술가가 등장할 리 만무했다.”(133) 이와 반대로 엄격한 통제와 절제를 강조한 스파르타. 그러나 획일성은 창조적 긴장이라는 씨앗을 말라죽이고 마는 척박한 토양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문명의 발전이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360) 결국 저자가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여러 도시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나치지 않음, 적절함, 바로 중용의 미덕이 아니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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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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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문화다>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대담집의 기획자인 애덤 블라이는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과학이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엔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과학이 세상을 개선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 세상만사는 과학에서 시작하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의 배후에도 과학이 자리 잡고 있다.”(4) , 그에게 문화란 인간의 삶과 사회의 근본적 토대를 지칭하는 것이고, 이 토대를 과학이 다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혹은 인간 사회에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면, 그건 바로 과학으로부터 비롯된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반대편에서, 과학이 인간 사회에 가져온 다양한 진보를 인정하지만 그와 더불어 온갖 폐해 또한 양산해 냈음을 지적하는 입장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20세기를 과학의 세기로 부르며 앞으로의 세기는 과학에 쏠린 무게중심을 다른 방향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극단적 생태주의나 뉴에이지 운동과 같은 극단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혹은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 중에서도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도 많다. 스노우가 말한 두 문화’, 즉 과학 문화와 인문 문화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의식한 듯 책의 첫 대담은 에드워드 윌슨과 대니얼 데넷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윌슨은 <사회생물학>이나 <통섭> 등의 저서를 통해 생물학과 진화론을 바탕으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을 제안한 생물학자이고, 데넷은 진화심리학을 기반으로 의식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시도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다시 말해 둘 모두 진화론이라는 공통된 토대 위에서 인간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은 진화론이 두 문화를 단단하게 엮어줄 밧줄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가진 분야의 융합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며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두 척의 배가 나란히 서서 밧줄로 서로를 묶으려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서로 상대편 배에 밧줄을 던지기는 했지만 배는 아직도 서로 삐걱거리며 부딪치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는 밧줄을 너무 심하게 잡아당기기도 하고 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일 겁니다.”(데넷, 25) 그렇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사회의 많은 의문들이 과학을 통해 해명될 수 있으리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만능해결사가 될 것인가? 이 부분에서 윌슨과 데넷의 생각이 구분된다. 윌슨은 통섭의 주창자답게 윤리적 규범에 대한 많은 문제들도 진화론적 접근이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데 반해, 데넷은 철학자답게 과학적 사실과 규범적 의문은 논리적으로 상호 독립적인 것이라 지적한다. 인간이 오늘날 이런 모습을 갖추게 된 데 대해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도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데넷, 34)

 

이런 종류의 논쟁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두 가지 기억이 있다. 하나는 과학철학 수업 때 들었던 얘기이다. 교수님께서는 앞으로 많은 윤리적 논쟁이 과학적 발전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거칠게 예를 들어, 어느 시점부터 인간이라 볼 수 있는지 등과 같은 과학적 판단이 끝난다면 낙태와 같은 윤리적 논쟁은 자연스레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종석의 어느 글에서 본 내용으로, 문명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을 억제하면서 이루어졌음을 지적하던 말이다. 인간이 어떤 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그 특성을 활용하며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특성을 밝혀내려는 수많은 과학적 시도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걸 아는 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 주는가?

 

두 생각 모두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아직까지 무엇이 더 바람직한 입장인지 나름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유전자가 특정 행위를 유발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을 우리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러한 조작이 범죄나 심각한 장애와 관련되었을 경우와 멋진 외모나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일과 관련되었을 경우를 동일하게 보아야 할 것인가? 물론 현실은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특정 행위와 관련된 유전자의 수나 조합은 대단히 다양하며, 하나의 유전자라고 하더라도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하우저, 320) 그러나 만약 저런 일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떤 심리적 거부감과 더불어 도대체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어?’라는 생각이 마구 뒤섞여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첫 대담과 관련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첫 대담이 나머지 대담들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윌슨과 데넷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이 대담자로 참여하고 있다. 기획자인 애덤 블라이의 잡지 <시드(SEED)>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기획이기에 대담에 참여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과학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과학이 이뤄낼 성과에 대해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으며, 과학의 성과들이 다른 분야에 끼치게 될 영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첨예한 논쟁이 아니라 서로 덕담을 주고받거나 큰 틀의 동의와 약간의 차이를 확인하는 식의 대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각 분야 대가들의 대화답게, 하나의 대담이 특정 주제에 대해 무수히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자신이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라고 한다면 이 책의 관련 대화에서 많은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접한다면 다소 심심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아마도) 긴 대담 중 특정 논점과 관련된 일부만을 편집해 실어놓았기에 뭔가 더 깊이 있는 내용이 나오겠지 기대하다가 대담이 끝나버려 입맛만 다시게 되는 아쉬움도 남는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을 언급하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과학자들 역시도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과학 연구에는 애매함이 있을 수 없는데, 이는 과학이 재현 가능한 사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레빈, 180)실제로 우리가 하는 작업은 존재하는 대상을 추측하여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시험할 방법을 찾아 진실을 재현하는 것입니다.”(랜들, 214),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아는 것을 설명할 이론을 찾아낼 것이며, 이 이론이 아직 측정해보지 않은 새로운 대상을 예측도 해주리라는 희망도 갖게 해주는 거죠.”(스타인하트, 400)와 같이 과학적 연구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가진 과학자들이 한편에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결국 과학은 일종의 어설픈 추론 과정일지도 모릅니다.”(스틱골드, 168)라거나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사실은, 과학은 어떤 것이 진실임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그저 어떤 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입니다. 그것이 과학이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크라우스, 257)라고 말하며 과학이 진실을 밝혀준다와 같은 거대한 위상에 유보를 표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양쪽 편 모두 과학이 여타의 학문보다는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지 에롤 모리스의 말이 눈에 확 띤다.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려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뭔가 빛을 던져 주리라고 생각되는 단순한 게임이나 모델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간은 그저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악몽의 한가운데 던져져 있을 뿐이죠.”(모리스, 312)

 

과학이 이런 혼란과 불확실을 거두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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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자유교육 -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송순재.고병헌.카를 K. 에기디우스 엮음 / 민들레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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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교육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교육열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사회적으로 교육에 쏟아 붓는 온갖 자원만큼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란 것이 그 사전적 의미,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및 바람직한 인성과 체력을 갖도록 가르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신분상승이나 안정적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교육은 바람직한 사회생활을 위한 기초라기보다는 개개인의 생존을 위한, 더 나아가 남보다 우월한 생존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계급처럼 낙인찍히는 서열화된 학벌과 아이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 입시 경쟁, 경쟁의 스트레스를 폭력이나 왕따와 같은 비인간적 행위로 풀고 있는 아이들이다. 청소년 자살의 제1 원인이 교육인 사회, 사회에 나가기 위한 기초를 닦아주는 곳이 오히려 사회를 포기하게 만드는 현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며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자연스레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물론 서로의 역사나 문화가 다르고 그래서 서로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도 매우 다를 것이기에 다른 나라의 교육체계를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아이들의 잠재된 능력을 계발하고 동등한 시민으로서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토대라는 교육의 목표는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교육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느 나라건 성공적인 교육 모델을 보여주는 모델을 찾아 그들의 방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 덴마크라는 하나의 모델이 있다.

 

덴마크 교육체계의 특이한 점은 무엇보다 자유학교(Friskole)라고 부르는 대안적 성격의 학교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유학교란 무엇인가?자유학교는 다양한 유형의 민간 교육기관을 가리킨다. 정부의 교육정책에 영향 받지 않고, 자체 교육철학과 목표에 따라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대안학교이다.”(202) 각각의 학교가 나름의 교육 목표를 가지고 그에 따른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겉보기엔 우리나라의 대안학교들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그 차이가 드러난다.

 

무엇보다 자유학교는 각각 자체의 교육 목표와 교육과정을 가지고 운영되며 이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전혀 없다. 우리나라에도 자율적 교육과정을 가진 비인가 대안학교가 있지만 학력 인정이 되지 않아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검정고시와 같은 제도를 다시 거쳐야만 한다. 물론 학력이 인정되는 정부인가 대안학교도 있지만 이 경우 상당 부분 정부의 간섭이 이루어진다. 덴마크의 자유학교는 이러한 제한이 전혀 없다. 국민이 선택 가능한 하나의 교육 방식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덴마크의 학교법도 학부모와 교육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들은 공립학교 교육에 상응하는 수업을 스스로 시킬 수 있는 한, 학교에 보내야 할 의무가 없다.”(47)고 규정함으로써 교육 방식 선택의 자율성을 폭넓게 보장하고 있다.

 

교육의 자율성이 인정되다보니 기존의 교육 방식과는 사뭇 다른 교육이 이루어진다. 학생의 자발성과 능동적 참여 그리고 공동체성을 함양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혁신적 교육 실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들은 학생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근본적으로 아이들은 세계를 탐구하고 발견하며, 그것에 대해 배우고 이해를 발전시키려는 호기심과 욕구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교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많은 차원에서, 그들이 행하고 스스로 발견한 것으로부터 세상을 배운다.”(100) 뿐만 아니라 교사의 역할도 달라진다. 이곳에서는 교사 또한 학생처럼 불완전한 이들이며 실수와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존재로 본다. 교사는 학생들이 경험해야 할 것을 앞서 경함한 덕분에 얻은 노하우를 공유하고 기획할 뿐이다. 교육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바꾸게 하고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간이지 책과 자격증이 아니지 않는가!”(248) 학생의 자발성과 잠재력을 존중하고 교사와 학생이 서로 동등한 교육 주체로 상호작용하는 교육, 이것이 바로 덴마크의 자유학교가 만들어가고 있는 대안적 교육의 모습이다.

 

덴마크에서는 기본적인 요건만 갖춘다면 학부모들을 비롯한 의지를 가진 주체들 누구나 이런 자유학교를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다. 학교가 설립되면 정부는 학교 운영비의 약 75% 가량을 지원한다. 교육과정에 대한 간섭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으며, 선생님들 또한 반드시 교사자격을 가진 사람일 필요도 없다. 정부가 운영비를 지원하는 만큼 운영비 사용에 대한 감사가 이루어지는 하지만 이 감사 주체 역시 정부기관이 아닌 학부모들이 선출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 철저하게 교육 수혜자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자유학교는 덴마크 전역에 260여 개가 있으며 전체 의무교육 대상자의 약 13%를 책임지고 있다.

 

얼핏 보기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뜻 맞는 몇몇이 모여 학교를 만들고 애들을 가르칠 테니 지원해달라는 요구를 어떻게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자유학교의 기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덴마크의 자유학교는 덴마크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바꾼 풀뿌리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19세기 중엽 이래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보겠다는 민중들의 의지가 종교, 교육, 정치, 경제 등 제반 분야에 걸쳐 활발하게 형성되었고, 스스로 학교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학교들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판단했다. 지역의 공립학교가 좋으면 전폭적으로 신뢰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스스로 학교를 세웠다.”(68) 물론 이러한 운동에는 덴마크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는 니콜라이 그룬트비와 크리스튼 콜과 같은 인물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민중들의 자발적 의지를 실현하려는 운동은 그들의 새 헌법에도 반영되었다.덴마크에서는 민주주의 도입 초기부터(최초의 민주주의 헌법이 제정된 1894년을 기점으로) 소수자의 민주주의 정신을 헌법에 우선으로 반영했다. 특히 그룬트비와 그의 친구들은 이 헌법의 도입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다. 이들은 소수자들이 다수자에 반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다수자(국가)로 하여금 소수자의 견해가 실현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할 것을 요청했다.”(73) 결국 자유학교가 하나의 제도로서 덴마크 교육체계 내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민중들의 자발성과 이를 보장하고 있는 덴마크 헌법이 가지고 있는 소수자들의 민주주의라는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헌법 정신은 자연스레 민주적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기틀이 된다.덴마크 곳곳은 개개인들의 사적인 영역과 지방정부라는 공적인 영역이 만나 협력하면서 건강한 시민사회로 발전합니다. 민주사회의 살과 피가 되는 에너지는, 사적인 개인의 능동적인 참여를 공적인 영역에서 지원해줄 때 실현되며 민주주의 이념의 토대가 됩니다.”(234) 이 책의 편저자이기도 한 에기디우스 교수의 말에선 어떤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다시 우리 사회로 눈을 돌려 보자. 덴마크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더욱 암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덴마크의 자유로운 학교가 소수자를 배려하는 그들의 헌법정신과 공적사적 영역의 조화라는 시민정신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진다. 최근 방영된 학교 폭력을 다룬 <학교의 눈물>이라는 프로그램도 동일한 결론을 말해준다. 학교는 사회의 거울이다. 우리 사회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학교는 결코 아이들에게 좋은 곳이 될 수 없다.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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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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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제목이 <눈물 닦고 스피노자>라니. 게다가 부제는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제목과 부제만 보고 언뜻 든 생각은, 또 철학자 한 명을 팔아 힐링이니 뭐니 하는 책이 나왔구나, 라는 것이었다. 이런 선입견이 든 것은, 개인적으로 최근 유행하고 있는 힐링이니 멘토니 하는 얘기들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들이 처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대부분 사회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데, 힐링을 말하는 책들은 대부분 이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치환해버린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책을 보자. 이 책의 어느 구절을 보면 나에게 닥친 시련을 축복으로 여기라고 충고한다. 시련은 나를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시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이 시련이란 것이 과연 내가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최저임금이 터무니없이 낮아 아무리 일을 한다고 해도 생활이 어려운데, 이걸 과연 축복으로 여길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다보면 이런 종류의 글들이 제시하는 해법, 즉 지금까지와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고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라는 조언이 부질없는 소리로 들린다. 그런 채찍질의 결과가 지금과 같은 사회가 아닌가.

 

책을 펼쳐들자, 저자는 이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서점에 나와 있는 심리학 책들은 하나같이 너의 마음의 태도나 자세를 바꾸어라. 그러면 마음이 치유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해법은 이와 다르다.”(6) 예를 들어 불안을 단지 개인적 심리 상태로 보고 불안정한 사회 현실들, 이를테면 비정규직, 불안정 주거, 양극화, 경쟁, 빈곤, 실업, 가정 해체, 영양과 위생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단지 의학적이고 임상적 수준에서의 논의로 제한되고 만다. 불안의 배후에는 불안한 사회 현실이 있다.”(16~17) 그러니까 이 책은 개인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의 변화에만 한정되지 않고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 구조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듯하다. 잠시 가졌던 선입견을 반성하며 본문을 읽는다.

 

2.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자주 언급되는 다양한 정신 질환을 여러 등장인물의 가상 사례에 적용하여 풀어내고 있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다소 유치하고 과장되게 설정하긴 했지만, 사실 주인공 김철수나 그의 여자 친구, 혹은 여고생과 그녀의 어머니 등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거나 타인과의 관계에 힘들어하는 등등. 이런 유형의 사고, 태도, 행위가 보다 극단화되면 이를 정신 질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질환의 목록은 불안증, 우울증, 피해망상증, 신경증, 강박증, 과대망상증, 도착증, 공황장애, 중독, 경계선 인격 장애, 조울증, 관계망상, 분열증, 공포증까지 총 14가지나 된다.

 

이처럼 다양한 정신 질환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 해법은 결국 하나라고 할 수 있다.마음을 바꾸기 위해서는 스피노자가 내재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자신의 관계망과 배치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공동체와 접속해야 한다. 서로의 욕망이 긍정되어 기쁨으로 가득차고, 서로를 사랑해서 변해가며 자신의 독특한 가치에 공감하는 공동체 속으로 자신의 배치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관계의 변화에 따라 점차 마음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6) 현대인들이 겪는 다양한 정신 질환은 결국 잘못된 관계망에 놓여 자신의 욕망이 마음껏 표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놓여 있는 관계망의 배치를 바꾼다면, 그리하여 부정적 관계망이 긍정적 관계망으로 변화된다면 우리는 사랑과 기쁨의 관계 속에서 행복의 공동체를 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관계의 배치를 바꾸기 위해선 자신의 내적 욕구와 능력을 진지하게 성찰한 후, 그에 맞춰 지금과 다른 무엇가로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 책에서 스피노자가 권하는 치유의 방법론이다.

 

3.

이렇게 책을 읽다보니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하나는 구체적 내용에 관한 것이다. 잘못된 관계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혹은 현대인은 애초에 어떻게 해서 잘못된 관계망에 놓이게 되었나?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차근차근 따져보자. 먼저 관계망이란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개인들의 집합으로서의 사회를 의미하는 듯하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들로 구성된 그물망 같은 구조가 떠오른다. 이런 그물망은 한 개인에게 특정한 역할을 요구하고 그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요구에 자신을 맞추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주변의 요구가 개인의 자발적 욕망을 제한하는 것이라면 개인은 내적 욕망과 외적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외적 요구에 따르게 된다. 내적 욕망이 억압되는 것이다. 잘못된 관계망이란 이처럼 개인의 내적 욕망을 억압하는 관계망을 의미하며, 이 억압이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된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관계망은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 사회는 나에게 왜 그런 그릇된 요구를 하는 것일까? 그들 역시 잘못된 관계망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릇된 요구를 했던 관계망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잘못된 관계망을 형성하게 한 최초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잘못된 관계망이란 인간 사회의 본질적 조건인가? 아쉽게도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최초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원인을 해소하는 방식의 대안이 가능할 것이고, 인간 사회의 본질적 조건이라고 한다면 관계망을 바꾸려는 혹은 벗어나려는 행위가 무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개인들이 긴밀히 연결된 그물망, 즉 유기체적 관계망이라고 한다면 한 개인의 변화는 그물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배치를 바꾸는 것은 전체의 관계망을 변화시키는 일이 된다. 이는 마치 오셀로 게임과도 같다. 오셀로 게임은 판에 놓인 한 알의 색이 변하면 그에 따라 다른 색들도 변화한다. 하나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아주 멋지다. 그러나 그건 어떻게 가능한가? 개인의 의지, 관계망을 벗어나려는 개인의 적극적 노력을 통해? ‘변용에의 의지와 같은 개인적 결단이 중요한 것인가? 잠깐, 이것은 맨 처음 언급한 힐링 서적들의 조언들과 유사한 게 아닌가? 개인적인 변용과 사랑의 노력이 새로운 흐름을 창출하는 것과 개인적 마음가짐의 변화로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잘 모르겠다.

 

4.

그래서 이러한 의문은 두 번째 의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이러한 말들을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있어 스피노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보다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다.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엄격한 결정론적 세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최종 원인인 신(즉 자연)의 관점에서 만물을 파악하는 것, 이런 것이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다. 물론 이런 이미지는 내가 서양철학사를 읽으며 갖게 된 것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스피노자 철학의 정수가 그의 절대적인 필연성에 관한 학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실제로, 필연성이 모든 것을 다 지배하고 있는 생각이다.”(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하권, p.230) “우리가 사물들을 신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신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난 필연성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그들을 영원의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그들을 논리적으로 결합된 무한한 체계의 일부로서 파악하게 된다.”(코플스톤, 합리론, p.394)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의지적 자유란 환상이며, 진정한 자유란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 필연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나의 견해를 따르자면 나는 본질적인 필연성에 의해 행동하고 현존하는 것을 자유롭다고 부르며, 본질적인 필연성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인해 어떤 정해진 방식으로 행동하고 실존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은 구속 상태에 있다고 부르고 있다.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나는 자유를 자유로운 의지 속에 포함시키지는 않지만 자유로운 필연성 속에는 포함시키고 있다.”(슐러에게 보내는 편지)

 

그렇다면 이러한 필연성에 대한 인식과 변용에의 의지와 같은 결단은 어떻게 양립가능한가? 책 속의 스피노자는 새로운 것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라고 충고하고 있는데, 만일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새로운 것으로 몸을 던질 수 있는가? 코플스톤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만일 각각이 이미 어떤 방식으로 행위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사람들에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킨다. 물론 이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권고하는 자는 이미 그렇게 권고하도록 결정되어 있고, 권고하는 것 자체가 권고를 받는 사람의 행위를 결정하는 요소 중의 하나라고 대답할 것이다.”(위의 책, 400~401)

 

이처럼 치유의 방법론으로 자신의 배치를 바꿀 것을 권유하는 스피노자와 필연성을 인식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스피노자는 얼핏 모순돼 보인다. 왜 모순되어 보일까? 혹시 이는 저자의 전공이기도 한 펠릭스 가타리가 심리치료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 스피노자이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던 스피노자에 대한 지식이 잘못되었거나, 이 책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둘 사이의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고리가 있는데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일 것이다. 어쨌든 술술 읽히는 책이었지만, 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점점 미궁에 빠진다. 어쩌면 이것이 철학책을 읽는 재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꼭 읽어야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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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3-01-21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도 이게 저자의 관점인지, 스피노자의 관점인지, 아니면 가타리의 관점인지 조금은 궁금해지더군요. 그래서 저도 <에티카> 샀습니다. 근데 꽤 두껍네요. 이놈은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ㅋ 아 죽음이란 무엇인가 관련해서 메일 남겼습니다. 리뷰가 조금 늦어져서요.

nunc 2013-01-21 19:56   좋아요 0 | URL
그점을 저자가 솔직하게 밝혔으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되네요.
어쨌든 이 책으로 사람들을 <에티카>로 이끈다면 나름 의미 있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리뷰는 연장신청을 담당자님께 보고하였습니다.^^

2013-01-22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2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3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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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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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나에게 죽음이란 그다지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다.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고, 이처럼 당연한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간과 정력의 불필요한 낭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데카르트 이후 수많은 이들이 강조하듯, 자명해 보이는 사실에 대해 의심해보는 것이 철학함의 기본적 태도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적 통념과 자연과학적 사실은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의심은 전자여야지 후자로까지 나아간다면 결국 무의미한 회의주의나 극단적 상대주의로 귀결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주제에 대한 나의 입장은 책에서도 언급된 에피쿠로스에 가깝다.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306) 명쾌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죽음이란 우리가 경험할 수 없고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죽음에 대한 고민이란 인간의 인식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한 탐구와 같은 모순어법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오히려 삶 쪽에 관심이 있다. 삶이란 매순간순간 내 앞에 예측과 우연으로 뒤섞인 새로운 것들이 펼쳐지는 기묘한 현실 아닌가. 다시 말해 이전 경험의 누적으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삶의 경로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우연히 끼어든 하나의 경험으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경로가 열리기도 하는, 우연과 필연이 마구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놀라운 순간이 바로 삶이며, 이 신기한 경험이야말로 인간이 고민해야할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죽음이란 것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적극적 선택으로서의 삶의 중단’, 자살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저자인 셸리 케이건은 이런 나를 조심스럽게 다독이며 죽음자체도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조언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가 보기에, 우리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진지하게 마주할 때,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되며, 나아가 우리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507) 과연 그러할까. 나 역시 조심스레 저자의 말을 경청해 본다.

 

2.

이 책은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차원의 물음을 탐구하며, 이후 9장부터 14장까지는 죽음에 대한 가치론적 탐구가 이어진다.

 

먼저 앞부분을 보자. 형이상학의 물음은 보통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 이루어진다. 대상 자체가 가진 특성이나 외적 효과들을 검토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은 존재론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등과 같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형이상학적 혹은 존재론적 탐구의 전범을 보여준다. 그러나 죽음이란 대상은 다른 것들과 달리 죽음이 발생하는 그 시점을 특정할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가진 특성이나 외적 효과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사후 체험에 대한 몇몇 증언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신빙성 있는 정보라고 보긴 어렵다. 과연 죽음에 대한 존재론은 가능한가?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일종의 우회 전략을 사용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살펴본 후 그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죽음의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책의 전반부 대부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영혼(혹은 정신)과 육체에 대한 이원론과 일원론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자아정체성(personal identity) 문제이다. 심리철학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두 주제가 얼마나 유명한 철학적 주제인지 눈치 챌 것이다. 저자는 심리철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여러 입장들의 논점들과 쟁점들을 소개하며, 자신은 정신에 대한 물리주의적 관점과 정체성의 육체 관점이 가장 그럴듯한 주장이라고 밝힌다. 간단히 말해 저자가 보기에 영혼이나 정신이란 육체의 한 기능일 뿐이며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육체를 기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물론 죽음이란 것이 인간에게 닥칠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다루는 책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거의 책 절반의 분량을 할애하여 이토록 자세히 다룰 필요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 저자는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개 사람들은 죽음과 같이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현상을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고,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이러한 신비화를 부추기게 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신비화는 오히려 죽음을 진지하게 대하는 걸 방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비주의를 깨는 일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이 된다. 철학자의 시선으로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죽음이라는 개념에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없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266)

 

이처럼 죽음을 덮고 있던 신비의 장막을 벗겨버린 후 저자는 죽음의 가치론을 탐구한다. 가치론이란 쉽게 말해 그것이 좋은가 나쁜가를 따지는 일이다. 죽음이란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이 역시 삶의 중단이라는 죽음의 특징으로 인해 삶과의 관계 속에서 해명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삶과 죽음의 가치를 다루고 있는 여러 논의들, 삶의 박탈로서의 죽음이나 영생의 지루함, 삶에 대한 낙관론-비관론-중간론적 입장,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논의를 거친 후 다소 뻔한 결론에 도달한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삶과 상호작용해 삶을 더 위태롭고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삶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394) , 죽음에 대한 인식은 곧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며, 삶의 한계를 인식할 때 우리는 삶을 더욱 풍요롭게 꾸며나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인간이 음미할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죽을 운명이라는 진실에 직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죽음과 관련된 사실들을 모두 무시하는 게 바람직한 태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적절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태도다.”(403)

 

3.

여기까지 저자의 얘기를 듣고 나니, 그간의 내 태도가 적절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태도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반문해 보자. 삶이 이미 충분히 흥미롭고 즐거운 이들에게도 죽음을 직시하는 일이 필요한가?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죽음이란 삶에 대한 도구적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도구란 그것이 필요한 이들에게 유용할 뿐이다. 즉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괴로움에 빠져 있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이 가지는 본질적가치에 대해 재고하게 되고 삶의 새로운 의미를 되찾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이들에게 이러한 도구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들이 굳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무시하고 있던 데에는 내 자신이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항변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행복에 대해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저자는 행복에 대한 쾌락주의적 관점을 논하면서 최고의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경험 기계를 예로 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 기계 속의 삶을 거부할 거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경험 기계 속에서는 어떤 성취도 없다. 자신에 대한 인식도 없다.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도 없다.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이처럼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경험이 아니라 실제로 가치 있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이”(364)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상당히 이상하게 들린다. 물리주의자로서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을 뇌 기능의 결과라고 받아들인다면 성취감이나 자기 인식 혹은 사랑과 같은 감정도 뇌가 산출하는 효과일 뿐이고, 그렇다면 경험 기계 속의 경험이나 실제의 경험은 결국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상상과 같은 내적 경험과 실재라는 외적 경험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항변하겠지만, 그가 제시한 경험 기계란 외적 경험과 똑같은 자극을 부여하는 것이기에 자극 없이 혼자서 떠올리는 상상과는 분명 다르다. 나 역시 물리주의자로서 이런 식의 경험 기계가 만일 만들어진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빨간 약을 선택하는 것은 영화 속 영웅이나 할 일이 아닌가. 세속적이고 쾌락적인 나는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영미철학의 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이 책에서 여러 입장들과 이를 토대로 한 다양한 가능 세계를 보여주며 각 입장이 가진 논리적 정합성을 꼼꼼하게 검토한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단순히 상식에 호소하고 지나가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교양 강의나 대중 철학서의 한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서술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나 죽음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아포리즘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다소 짜증나고 지루한 책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것이 결국 논증으로 구성되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 책은 죽음이라는 익숙한 주제로 철학을 연습하는 훌륭한 교재가 될 것이다. 만일 이런 강의를 직접 들었다면 나 역시 뒷표지에 실린 학생들과 같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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